나부터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세상이 벌어진 겁니다

각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벌어질 일도 없고 인과 법칙도 없을 거고
상대성 원리도 없을 거고 계발도 창조도 없을 겁니다.

아마도 일 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이 지원의 여러분이 딴 데보다 수백 배가 작다 하더라도 작은 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자기 주처를 알아서 길을 걸을 때에 그건 한 우주를 산 거와 같습니다.

항상 얘기하듯 불교라는 자체는 영원하며 진리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불이요,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같이 응용하고 상응하고 작용하는, 그 모든 통신하는 것이 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생의 원리도 일체 만법의 기준이 되며 모든 마음들이, 전구는 다 다르지만 저 전력은 한 전력에 의해서 불이 들어오듯이,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 생명의 근원은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도 말했지만 불교라는 단어는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전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포용할 수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금 모두,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타의에서 구하는 이치가 많습니다. ‘관세음보살이여! 부처님이여!’ 하고 바깥에서 찾는 것, ‘하나님이여! 주여!’ 하고 바깥에서 찾는 것, 티베트 불교나 통일교나 할 것 없이 모두 가만히 보면 타의에서 구하는 건 전체가 다 기복이에요. 그것을 기복이라고 흉보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 집부터 전화를 놓고야 남의 집에서 전화 올 때를 바라기도 하고 전화를 하기도 하는 법이죠?

나부터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세상이 벌어진 겁니다. 각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벌어질 일도 없고 인과 법칙도 없을 거고 상대성 원리도 없을 거고 계발도 창조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온 까닭에, 인연에 따라서 창조력을 기르면서 계발도 하고 성취도 하고 나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로부터 있는 것이지 내가 없고 타의의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자신’을 먼저 알아야 ‘타신’도 모두 둘이 아니게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원리를 알고, 모두가 인연에 따라서 한 줄에 꿰여서 동시에 돌아가는 것도 알고, 세상 일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도 알고,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나의 긴박함으로 말미암아 참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 수, 화, 풍 이 자체의 근원이 아니었더라면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대두해서 발전할 수도 없거니와 밝게 살 수도 없고 모든 면에서 빛이 없는 것입니다. 일체 만물이 왜 지수화풍으로 근원이 돼 있는가. 바탕이 돼 있는가. 그게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도 그 바탕으로 인해서 광력도 태양력, 태양열도 또는 전력도 자력도 모두가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걸로 인해서 발전과 계발과 창조를 다 해낼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모두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습니다. 그거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물이 있기 때문에 전력을 끌어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죠? 이 물과 흙과 불과 바람, 이것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도 네 가지에 속한 물질입니다. 형상입니다. 그 현실의 몸, 육신이 아니었더라면 무효입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을 낼 수가 없어도 목석입니다. 생명이 없어도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수화풍이 모두 바탕이 돼서,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바로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귓결에 그냥 날아가 버리고 말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앞에 그것이 다 자유자재하게끔 주어져 있다고 해도 그냥 날아가 버리죠? 그런 걸 맛도 못 보고 이름도 듣지 못하고 작용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게 뭐 말라빠져 죽은 거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몸이 지수화풍이기 때문에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 마디째입니다. 그게 대두가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보고 듣고 하는 이 오관을 통해서 오신통이라는 그 이름이 있습니다.

천이통이라는 것은, 즉 말하자면 무전통신기 역할을 합니다. 천안통, 이것은 바로 마음의 눈입니다. 육안으로 보는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 그것을 비유할 때에 뭘로 비유를 해야 좋겠습니까? 천체망원경이라고 해도 그거는 거기에 가당치도 않지만 비유를 하겠습니다. 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는 천체를 보고도 남음이 있지만 육안으로 보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해서 마음의 눈을 천안통이라고 합니다. 타심통, 이것을 탐지기라고 해도 비유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거고, 남의 속을 뚫어지게 아는 것을 타심통이라고 합니다. 또 신족통은 팩시밀리라고 해도 비유가 됩니다.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 다음에 숙명통, 이 숙명통이라는 것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 현실에 내 걸망에 담아 가지고 나온 업식에 따라서 솔솔 나오는 걸 말합니다. 즉 말하자면 과거에 여러분이 태어나기 이전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과 선업이, 과거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현실에, 여러분 몸속에 지금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살아나가는 데 솔솔 나오는 것이 바로 숙명통입니다. 그거를 비유할 때는 컴퓨터라고 해도 됩니다. 컴퓨터에 과거에 입력된 그 자체가 바로 현실에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렇게 이해가 안 갑니까? 하하하….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바로 그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은 이 지수화풍이 바탕이 됐고 그것이 대두가 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오신통을 자유스럽게 굴릴 수가 있는 자력의 근본을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다섯 가지를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굴릴 수 있다는 사실은 누진통입니다. 그거를 비유하자면 레이더망이라고 해도 비유가 됩니다. 속에서 나오는 거,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 책정을 하고, 이 안에서 모든 게 분류돼서 원자에서 입자가 쭉 많이 나가듯이, 바깥에서 그렇게 들어오듯이 그러는 거를 결정을 하고 책정을 하는 그런 소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누진통의 모든 핵심적인 문제를 그걸로 비유해도 됩니다.

누진이라 하면 바로 우리 혹성의 바른쪽 왼쪽 두뇌의 작용 핵심! 핵심처입니다. 그 핵심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자 세계에서 잘 쓰고 있는 이름, 주인공입니다. 이 주인공은 그래서 ‘주, 인, 공’입니다, 공(空)! 주인 주(主), 사람 인(人), 즉 공입니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부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이. 왜 공이라고 했을까? 주인의 공이라고 했을까? 여러분, 듣는 거나 보는 거나 가고 오는 거나, 먹는 거나 만나는 거나 작용하고 돌아가는 것이 전체 고정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정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중 없습니다!

큰스님 고정된 게 없는 것이 공해서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거 하나, 즉 말하자면 가정에서 내가 아버지 노릇을 하고 남편의 노릇을 하고 형님의 노릇을 하고 아들의 노릇을 할 때 자동적으로 돌아가지 껄껄하게 돌아가지 않죠? “아빠!” 그러면 자연적으로 아버지 노릇이 되고 “여보!” 하면 자연적으로 남편 노릇이 되고 “얘, 아무개야!” 부르면 자동적으로 아들 노릇이 되고. 아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그런데 그 자연스럽게 자기가 작용을 할 때에, 어떤 걸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내가 한 건데 어떤 거를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노라’ 했습니다. 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해서 자꾸 변하고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바로 ‘무’ 했던 거고 ‘나는 한 게 없노라’ 했던 거고, 그렇기 때문에 부처라는 이름이 있다면 부처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라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정신계 50%와 물질계 50%가 서로 작용하고 돌아가는 이 세계 진리를, 우주 진리를 잘 아신다면 머리가 다리고 다리가 머리라고 해도 이거는 다 알게 됩니다. 지구가 돌아갈 때에 머리나 다리가 있습디까, 없습디까? 우리 자체가 모두 지구의 한 벌레라고 할까, 한 인간이라고 할까. 지구에 붙어서 사는 모든 사람들이 유리문도 없는 버스에 타고 만약에 어디를 간다면 우리가 어디를 가는 줄 알겠습니까? 버스를 타고 아무리 돌아도 어디가 어딘 줄도 모르고 그냥 돌아갈 뿐입니다. 돌아가는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진화력을 기르고 창조력을 기르고, 우린 이렇게 노력하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종교는 타신을 찾아서 빌면 꼭 잘된다는데, 모든 것을 태산같이 차로 실어다가 놓고 빌어 봐도 그건 공덕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항상 말을 하죠. 양 무제가 그렇게 절을 짓고 별의별 짓 다 하고, 옷을 갖다 주고 먹을 걸 다 갖다 주고 이렇게 시주를 많이 했는데, 달마 대사더러 물었어요. “이렇게 내가 많이 했는데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물었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달마 대사는 서슴지 않고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공덕은 하나도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를 들어서 나무 몸체와 가지와 잎새 모든 것을, 열매를 위해서라면 어디다 물을 줘야 됩니까? 뿌리죠? 뿌리에다 물을 줘야 이파리도 싱싱하고 모든 게 다 싱싱하고 열매도 열려서 굵고 크게 납니다. 뿌리에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이렇게 해서 가꿔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자기 뿌리에다 주질 않고 항상 남의 이름을 찾고 모습을 찾고 온통 야단입니다. 이 이름 찾고 저 이름 찾고 칠성을 찾아서 명을 길게 해 달라고 빌질 않나, 또는 지장을 찾아서 좋은 데로 가게 해 달라고 그러질 않나, 또는 용신을 찾아서 물에 가더라도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그러질 않나, 지신을 찾아서 길에 가다가 급살을 맞지 않게 해 달라고 하질 않나, 약사를 찾아서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그러질 않나. 그저 요기 놓고 빌고 저기 놓고 빌지 않으면 마음들이 개운치 않아서, 만약에 여기 놓고 저기 놓질 않으면 ‘아이고, 우리 남편이 어떻게 되면 어쩌나? 우리 자식이 어떻게 되면 어쩌나?’ 하고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처럼 관습에 의해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한마음이, 여러분의 가정의 부인이나 남편 되시는 분들도 한마음이 아버지요 남편이요, 한마음이 이름을 지어 놓은 겁니다. 자동적입니다, 그게. 그러면 한 아버지에다가만 약속을 하면 됐지, 한 아버지와 약속을 했으면 그 아버지가 남편 노릇 할 때에 또 할 거고 자식 노릇 할 때도 할 거고, 다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식이 따로 있고 남편이 따로 있고 아버지가 따로 있고 할머니가 따로 있고 형님이 따로 있는 줄 안단 말입니다, 모두.

그래서 부처님의 마음이 생각을 내셔서 이름을 지어 놓은 것이 동방에는 아촉이요, 서방에는 아미타요, 이 세상 사바세계에는 관세음이요, 지천국에는 지장이요, 모든 사람들이 병고에 휘달리는 데에 응해 줄 수 있는 거는 바로 약사보살이요, 이렇게 이름을 지어 놨단 말입니다. 이래도 이해가 안 갑니까? 한 부처님이 하시는 거나 한 가정의 아버지가 하는 거나, 이게 비유를 한 겁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남편이 되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만 된 줄 알거든요. 그러니깐 다른 얘길 못해, 거기서. 부처님 앞에 다 얘길 해도 되는 건데 그만 요기 갖다 놓고 빌고 저기 갖다 놓고 빌고….

그것이 어디서 생긴 거냐. 이조 때에 불교를 탄압할 때, 중들이 도대체 먹고 공부할 수가 없어서 산신이니 독성이니 칠성이니 죄 이렇게 이름을 붙여 놓은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남편이니 또는 아버지니 아들이니 친구까지, 신중당까지 만들어 놓고 이렇게 한 겁니다. 예전에는 쌀 한 말이면 큰 됫박 말이었죠. 정성을 들인다고 그거 한 말만 부처님한테 갖다 놓으면 뭘 먹고 공부를 합니까. 그러니까 여러 군데다가 갖다 놔야만이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그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지는 이상에는 그것을 알아서 좀 벗어나기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영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요. 이렇게 종교가 자유스럽고 한데도 말입니다.

허허, 나도 예전에 견진까지도 받고 고해 성사를 할 때에 회개도 너무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딴 사람을 통해서 고해 성사를 한다고 내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한 것은 자기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위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모르면 위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해결이 나는 것도, 그 죄업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자동적으로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현실에 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럴진대 이 부처님 법이 어디 있는가? 우리들의 법이자 부처님의 법이고 부처님의 법이자 우리들의 법입니다. 우리가 없다면 부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것이죠. 아니 그렇습니까? 정신계가 있으니깐 물질계가 이렇게 있죠. 정신계가 없어도 아니 되고 물질계가 없어도 아니 됩니다. 양 개체에 바로 대두되는 인연의 법칙이니까요.

이 모두가 인연의 법칙에 따라서 우리가 마음이 발전도 될 수 있고 물리가 터질 수도 있고 모든 면에 지혜로운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못나도 못난 걸로다가 내내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닙니다. 잘났어도 아주 잘난 걸로 내내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열두 번 변하고, 열두 번뿐 아니라 무한정입니다. 열두 번이다 하면 해우년을 따져서 얘긴데 그건 열두 번이 열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혜롭게 이끌어 갈 수도 있고 지혜가 딱 막혀서, 몰라서 어리석은 짓을 할 수도 있고 몰라서 악한 일도 할 수 있고, 모두가 몰라서 죄가 있는 거지 알면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업보니 죄업이니 이런 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모르는 게 죄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까 얘기했듯이 한 가정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남편이다 부인이다 부모다 자식이다 할 때 이 애로점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이 애로 건을 어떻게 해야만이 이것을 슬기롭게 방지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불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부처님 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불당에 가야만 부처님 법이 있고 댁의 가정에 들어가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댁네들이 있으니까, 한 분 한 분 있으니까 부처님도 있고, 한 분 한 분 계시니까 부처님 법도 있는 거고, 한 분 한 분 계시니까 바로 세상이 있는 겁니다. 생명의 근본은 한 식구가 똑같습니다, 이 전력이 똑같듯이. 안 그렇습니까? 팔만대장경에 그 어려운 한문으로 된 거를 지금 푹 내려 가지고 가정에다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다 부처님 법이니까.

지금 모든 생명은 똑같은데 모습은, 이 전구가 전부 다르듯이, 여기도 뭐 저런 거 저런 거 전부 다르네요, 한방 식구가. 하하하. 그런데 전력은 같아요. 크면 큰 걸로 전력이 조금 더 들어올 뿐이고, 작으면 작은 대로 전력이 덜 들어올 뿐이에요. 그러니까 다섯 식구다 하면 주인공이 다섯이죠? 그런데 그 주인공은 잡으려야 잡을 수도 없고 보려야 볼 수도 없고 만지려야 만질 수도 없는 겁니다.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보지 못하듯이. 그러나 틀림없이 전력은 있죠. 틀림없이 우리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모두 ‘아유, 쟤는 쟤고 나는 나다.’ 요렇게 각각 본단 말이야. 전력은 다 똑같은데도 ‘저건 저것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전력이 어떻게 하나인 줄 알겠습니까?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이든 부인이든 또는 부모든 자식이 어떻게 잘못됐다 하더라도, 잘못돼서 나가서 안 들어온다 하더라도, 공부를 안 한다 하더라도…. 어떠한 경우에 따라서 항상 부모 속을 상하게 한다든가 이런 문제가 있다면 여러분은 ‘들어오기만 해 봐라. 요놈의 새끼 가만 놔두나.’ 이러고, 허허허, 또 남편이 잘못하면 ‘들어오기만 해 봐라. 그냥 두나. 그냥 박살을 내고 말지.’ 요렇게 생각합니다. 다섯 식구든 여섯 식구든 그렇게 살아나가는 데에 어느 누구가 잘못돼 가지고 저거 하면 ‘죽일 놈’ 소리가 허양 나옵니다. 그리고 자식이 잘못하고 나갔다가 들어오고 이러면 좀 따뜻하게 할 생각은 안 하고 아예 폭력이 나갑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럭하면 안 되죠. 말로, 행동으로 이렇게 해서 나가면 ‘아이고, 추워. 따뜻한가 하고 들어왔더니 또 추워.’ 그러니깐 또 나가. 하하하…. 그럽니다.

그러나 이 주인공에다가 모든 것을 ‘저 마음도, 저 전력도 내 전력도 똑같으니까, 저 주인공이나 내 주인공이나 똑같으니까 당신만이 저 애를 다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을 때, 진정코 맡겨 놓을 때, 진정코 믿고 맡겨 놓을 때, 그러고 맡겨 놓고는 입으로는, 속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어휴, 너 배 안 고프냐. 나갔다 들어와서 피곤하지 않으냐. 어디서 그렇게 지냈니?” 하고 따뜻하게 말해 주고 따뜻한 행동으로 따뜻하게 해 주면, 한 번 두 번 이렇게 하다 보면 ‘자기가 이렇게 잘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그때는 귀에 띄고 눈에 보여요. 그래서 이 불이, 내 마음의 불이 거기까지…. 둘이 아니니까, 전력이 둘이 아니니까 전력을 거기다가도 넣고 여기다가도 넣으니까 불이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이거 내가 가정의 모든 애로점을 해결하는 방식을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지금. 똑똑히 잘 들으시고 믿으셔야 됩니다. 나는 제삼자로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전력이나 내 전력이나 똑같으니까요, 허허허. 그래서 그렇게 맡기고 남편이든 자식이든 어떠한 경우든 천차만별로 돼 있는 거를 닥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자기가 맡겨 놓고, 그렇게 아리땁게 또는 알뜰하게 잘 다독거리고 사랑해 준다면 그건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식구가 어떻게 조건을 붙이고 사랑을 합니까? 식구라면 조건 없이 사랑을 해야지.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데 사랑하듯. 부모가 이익을 취해서 자식을 기릅니까? 그러진 않으시겠죠? 부모는 자식이 잘돼서 잘 살기만 바라고 자식을 기릅니다. 그러니 내내 그런 생각 변치 마시고 어떠한 잘못이 있더라도, 어떠한 길을 잘못 들었더라도, 어떠한 강도질을 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그것이 잘못됐다고 내색하질 말고 모든 거를 부드럽게 말을 해 나가라 이겁니다. 그러고 거기다 맡겨 주면, 내 마음 전구에 불이 들어오면 걔 마음 전구에도 심지가 올라가서 불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그것이 다 그 사람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것이죠. 그 사람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렇게 해 나가면 벌써 한 번 해, 두 번 해, 세 번 해 이렇게 자꾸자꾸 해 나가니까 판도가 달라져. 사람이 벌써 달라져요. 사람도 달라지거니와 사람이 달라지니까 가정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지니까 화목이 와. 화목이 오니깐 돈도 들어와. 돈도 아주 잘 압니다. 그 집안이 살벌하고 아주 악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러면 그냥 돈이 오다가도 ‘에이그, 난 너희 집에 안 가!’ 그러고 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받을 게 있어도 내일 준다 모레 준다 그러고는 안 들어와요, 그건.

이 모두가 그런 업보에서…. 나에게 집의 주인이 없다면 그 모두가, 즉 유전성에서, 인과성에서, 세균성에서, 바로 영계성까지 첨보해서 그렇게 살벌하게 들고 나게 되고, 그러면 내 집은 망가지고, 내 집은 악해질 수밖엔 없고, 내 집은 그렇게 선후가 없이 천차만별로 변질이 오고 그래 가지고 결국은 악한 마음을 지워 버리지 못한 채 육신은 썩어 가고 그렇게 되고 말아 버립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그렇게 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루는가 하면, 나쁜 업보도 다 제거하고 애고도 제거하고 병고도 제거하고 이렇게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여러분 몸뚱이 안에 수십억의 생명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악업 선업의 의식들이 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그렇게 착하게 쓰고, 착한 일을 하고, 착한 행을 하고, 착하게 모든 식구들을 대하고, 바깥의 식구들을 착하게 만들고, 안의 마음도 그러니까 안의 식구들도 그 마음을 따라서 수십억의 그 의식들이 다 한마음으로 따라 준다 이거야. 한마음으로 따라 주니까 ‘아, 이렇게 된 사실이구나.’ 하고선 속에서 알고는 전부 화해서, 즉 말하자면 이 사람의 화신이 돼 줘요. 보신이 돼 주고 화신이 돼 주고 법신이 돼 주고 부처가 돼 주고. 이렇게 하니깐 모든 게 이 한 의식이 전부 이렇게 한데 모아져서 기둥이 돼서 하늘을 받칠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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