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⑭ 헬무트 페덜레(Helmut Federle)

▲ 헬무트 페덜레의 작품 은 화면에 크기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면적을 연결하여 새로운 도형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관점과 개념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전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분야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등 많은 다양한 요소들의 반발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릴 적 고향서 한국 난민 만나
한국인과의 기억, 소중히 생각해
한국 문화 친숙… 불교 ‘禪’ 관심
기하학적 추상주의로 정신 표현
빈틈없는 정교함 내면엔 ‘자유’가
“예술 정신 중요” 작품 전엔 명상

헬무트 페덜레(Helmut Federle, 1944∼, 스위스)는 시대적 어려움을 몸소 겪으며 삶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예술을 하고자 하는 작가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자신의 고향인 졸로투른(Solothurn)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와 경계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 어린 그가 체험한 경험 중에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자신의 마을에 한국에서 온 난민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며, 페덜레의 눈으로 본 그들의 삶의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삶의 가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필자의 독일 유학시절 지도교수였던 그에게서 직접들은 이야기이다. 그는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예술, 특히 선(禪)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헬무트 페덜레가 예술가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하안리히 클로츠라는 평론가에 의해서 이다. 철학, 미학, 건축 등에 많은 지식을 가진 클로츠는 자신의 새로운 미학을 완성시키며 이를 ‘제2의 모던(Zweite Moderne)’으로 명명하며 새로운 미학적 개념들을 정립시켜 나아갔는데 그의 이론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작가가 페덜레이다.

페덜레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기하학적 추상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이해한 선의 세계이기도 하다. 선의 세계는 정확한 관계(자연의 이치)를 형성하며 그 속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정형화된 사각의 틀은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며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다. 빈틈이 없어 보일정도로 정교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유분방함이 동시에 표현되고 있다.

마치 수행자가 수행할 때 엄격한 규율과 정해진 과정을 수용하여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가듯이 그는 자신의 수행적 모습을 정형화된 선(線)과 면으로 규정하며 질서와 자유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 관점들을 통하여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이 형성된 것이다.

모던, 포스트모던, 제2의 모던으로 구분하는 클로츠의 철학적 관점에서 페덜레는 제2의 모던의 내용들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술가이며, 포스트모던에서 지향하던 탈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중심과 관념적 사고들을 모조리 사라지게 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서구의 철학과 사상, 예술이 중심이고 그 밖의 문화와 예술은 변방이라는 모던적 관점에서 벗어나 탈 중심적 사고를 지향하던 포스트모던 역시 모던이 가지고 있던 대상에 대한 관점들이 남아있었던 것에서 탈피해 절대적 개념의 개별적 특성과 정신적 사유와 깊은 사고를 작품에 도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경계가 없다는 것은 둘을 모두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 방식이 수용이든 비수용적이든 중요한 것은 경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Untitled, Drei Formen(1/4, 1/6, 1/16, 3. Fassung, 1996)>은 페덜레의 대표 작품 중의 하나이다. 화면에 크기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면적을 연결하여 새로운 도형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계산법은 대상에 대한 이해에서 오는 경우보다는 생각의 법칙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생각은 머물러 있지 않지만 또한 생각의 범주가 크게 확장되지도 않는다. 즉, 사람마다 생각의 굴레가 있어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화면에 나타난 도형들은 모양은 변화하나 면적은 변화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도형은 생각의 또 다른 모습이다. 생각의 변화가 매 순간 일어나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 생각의 변화는 커다란 호수의 작은 파장에 불과할 뿐이다. 파장의 크기가 다르다고 하여 그 호수의 물이 변화하지 않듯이 생각의 파장을 관조하는 것이 중요하며 나아가서 생각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작가는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화면을 가까이에서 보면 무수히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작가가 어떠한 생각으로 그러한 흔적들을 만들어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흔적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모습으로 보여 지고 있다. 여기서 하나의 모습은 다름 아닌 청정한 마음의 모습이다.

작가가 작품을 하는 과정은 청정한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정하다고 하여 나타나는 흔적이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닌 것이다. 청정하니까 모두가 질서정연하고 동일한 모습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청정함에 대한 관념일 뿐 청정함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나의 나타나는 흔적이나 모습을 가지고 청정함을 논한다는 것은 모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청정한 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청정한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청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마음으로 보면 어떠한 청정함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페덜레는 오랜 시간 선(禪)에 관심을 가지며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고자 노력하였다. 많은 시간 스스로 수행자적인 생활을 하며 예술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고자하는 많은 작가들처럼 그도 예술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청정한 마음자리를 찾아가고자 한 것이다.

필자가 유학시절 스승에게서 배운 것은 바로 예술의 정신적 가치였다. 예술을 논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재료나 대상, 기법 등이 아니며 작가의 생각과 그 생각의 깊이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술가의 길을 가는 필자인 저에게 지금까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큰 울림이다.

작가의 생각은 작품을 통하여 나타나지만 그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작가의 정신을 관람객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작가는 붓을 들기 전에 반드시 명상을 한다. 오로지 작가의 청정한 마음이 관객에게 전해져서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길에 나침반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이다.

요즈음 한국미술판에 여러 가지 논란이 일어나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픈 것이 사실이다. 위작, 대작, 가짜 감정서 등 작가와 작품과는 관계가 없는 부분들이 모두 돈과 연관이 되면서 나타나는 모순적인 부분들이다. 유럽에서도 이러한 사건은 끊임 없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작가와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부분이며 작가들은 이러한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예술이 돈이 되는 것을 경계하기도 한다.

▲ <Black Series X(1992)>는 화면에 하나의 선이 많아지면서 나타나는 흔적들을 통하여 생각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페덜레는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 작품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거나 연구하는 기관에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거액에 판매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많은 작품을 하지 않는다. 주문이 들어오거나 전시를 해야 하는 경우 온 정신력을 모두 투사하여 작품을 제작한다. 그 작품의 가치가 돈과 연관되어 평가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철저한 관리를 위하여 그가 많은 노력을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본적이 있다.

<Black Series X(1992)>는 그의 생각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에 하나의 선이 많아지면서 나타나는 흔적들을 통하여 생각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처음과 마지막 작품을 같이 보면 하나의 확대된 모습이 된다. 이를 통하여 생각이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각각의 흔적들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호흡의 흐름처럼 반복하는 가운데 변화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선을 한번 그으나 선을 여러 번 그으나 선은 하나의 선이다. 그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선을 긋는다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호흡을 조절해가는 것이며, 나아가서 마음의 청정함을 찾아가는 것이다. 청정함을 인지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의 행위일 뿐이며 조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다른 작품들과 차이점이 없어지는 것이다.

페덜레의 예술적 특성은 조형적, 미학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존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신성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조형적으로 아주 독특하다거나 표현력이나 색채가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특히 그가 자주 사용하는 검정색은 모든 흔적의 종착점이다. 다시 말해 생각의 종결점인 것이다.

작은 흔적들이 모여 나타나는 커다란 도형은 기하학적이면서 수학적이다. 철저히 계산된 흔적이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함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수행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인지하는 깨달음은 철저함이다. 그 속에서 자유로움이 나온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고는 철저함이 바탕이 되어야 그 가치가 드러나며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숨겨진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거의 무채색이거나 어두운 녹색, 연두색계열이다. 이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생명력은 빛이 어둠이 있어야 그 가치가 드러나듯 그의 작품은 빛을 드러내기 위한 어둠처럼 자기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것에서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필자가 예술가의 길을 가는데 커다란 가르침을 준 스승 헬무트 페덜레의 작품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작가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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