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장 도일 스님

참불선원 강좌불교와 정신문화세계

최근 인문학 강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마음에 드는 주제, 일목요연한 명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스스로 탐구하지 않는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정체성을 잃은 대한민국의 문화 사대주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송광사 율원장 도일 스님은 718일 참불선원 인문학 강좌서 불교와 정신문화세계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스님은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잃었다. 문화의식 없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잘못 때문이라며 깊이 있는 삶을 위해 불교를 탐구할 것을 조언했다. 정리=이승희 수습기자

 

 

▲ 도일 스님은… 1973년 양산 미타암에 입산, 1975년 통도사에서 득도했다. 태국 왕립 마하출라롱콘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 객원연구원과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연평균 성인 독서량 9권정도 밖에
교양·자국문화서 멀어진 국민의식
문화적 소양 없음을 깊이 반성하고
불교 탐구해 지혜얻어야 강국 도약

향기 잃은 우리문화
최근 들어 문화콘텐츠와 연계된 인문학 강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문화콘텐츠 개발도 활발해졌습니다. 문화콘텐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우리가 문화를 대하는 인식이 너무 가볍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국민이 갖춘 철학이 얕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핏 가늠하는 것처럼 우리의 교양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사는 아파트를 둘러보십시오. 과연 책이 몇 권 있습니까. 우리나라 연평균 성인 독서량은 1년에 9권 정도입니다.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습니다. 수준 높은 책만이 아닌 만화책까지 포함한 권수입니다. 국민들이 교양을 별로 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인문학이 왜 필요할까요? 그저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교양을 자랑하려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어떤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냐에 초점을 맞춰 사람다움을 공부하는 학문이 인문학입니다. 이 인문학의 토대는 문화입니다. 문화가 없는 나라는 아무리 잘 살아도 문명화된 나라가 아닙니다. 저는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매번 놀라곤 합니다. 이 세상 미남미녀가 다 모였기 때문입니다. 강남대로를 걸으면 키도 크고 늘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굴태가 부유하고 아름다운데, 그만큼 얼굴이나 옷에 투자를 많이 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길거리를 걸으면 그곳엔 아무런 문화의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시멘트 덩어리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입니다. 자기 얼굴은 뜯어고칠 줄 알면서 정작 본인이 사는 곳은 뜯어고칠 줄 모릅니다. 얼굴만 예쁘면 되고 자기가 사는 거리, 도시의 표정은 바꿀 생각을 않습니다.

그래놓고 유럽에 가보면 좋다고들 합니다. 그 도시들도 현지 사람들이 피눈물 나게 가꿔서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내버리고 남의 아름다움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 것인지, 뛰어난 점을 무엇을 통해 보여줄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일본 교토에 가면 마을 구석구석에 조그만 신사들이 많습니다. 대만에도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토니신 사당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옵니다. 외국인은 우리 길을 걸으며 맥도날드만 발견합니다. 그들은 자국에는 없는 대한민국 고유의 문화를 즐기러 우리나라에 오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템플스테이가 인기 있는 이유는 이들에게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마을마다 성황당과 마을 어귀를 지키는 당나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서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자리를 교회와 바꿔버린 셈입니다.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굿판을 보면 깜짝 놀라면서 속된말로 환장을 합니다. 정말 아름답고 신비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전통적으로 1년에 몇 번씩 무당굿을 펼쳤습니다. 그것도 몇날며칠을 이어서 말입니다. 무당은 요즘말로 퍼포먼스를 벌이는데, 온갖 악기가 동원됩니다. 우리 국악과 판소리, 민요의 근원은 굿에 있습니다. 한국이 몇 백년간 전통을 끊이지 않고 이어져오면서 세계인에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은 음악입니다. 우리 국악은 전 세계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훌륭한 문화적 자산이지만 우리는 굿을 단지 미신으로 치부하며 우리 손으로 문화를 없앴습니다. 나중에 정부에서 아차 싶은 마음에 굿하는 사람들을 무형문화재에 지정했지만 명맥이 많이 끊겼습니다.

절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처음 사미계를 받았던 1975년도에만 하더라도 절은 각 종지에 따라 각자 모양을 소박하게 유지했습니다. 화엄종은 해당하는 종지에 따라 절의 모양을 짓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절 내부에 들어오면 저절로 지혜와 신심이 나올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배려하며 절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의 논리가 침투하면서 교리는 잊고 화려하게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절이 지닌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게 됐습니다.

불교문화 탐구 중요하다
인문학 공부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한국식 공부법 토대에선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요즘은 영어유치원은 기본이고, 일부 학부모들은 유아들에게 한문도 가르친다고 합니다. 최신 지식을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치지만 아직 불교는 모르고 있습니다. 이 점은 대단한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서양인들은 줄곧 미래에 불교만큼 중요한 학문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뼛속가지 유대교를 믿는 아인슈타인 박사 또한 21세기 이후로 종교적 가치를 지닌 것은 불교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불교가 좋다는 건 아는데 좀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 점이 서양 사람들과 우리들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좀 어려우면 안 하려고 하지 않나요? 반면 서양인들은 어려울수록 덤벼듭니다. 온 국민이 같이 탐구합니다. 선진국민이 되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탐구하고 몰두해야 합니다.

불자들이 자녀를 똑똑하게 키워 잘 살게 해주고 싶다고들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문화적 교양의 토대를 잘 다져줘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해도 넓게 볼 줄 모르는 경주마가 되고 맙니다. 어떤 TV프로그램에서 외국인 교환학생들이 우리나라 학생들과 같이 지내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어떻게 노는지 보니 라면 끓여먹고 게임을 합니다. 역사와 문화의식 없는 우리 아이들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어른들, 부모들의 책임입니다. 어른들이 문화적 소양이 없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지난 201011월에 개최된 G20 정상회의 만찬 장소는 국립중앙박물관이었습니다. 당시 박물관에선 고려불화대전을 전시 중이었습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문화적 교양을 쌓은 전 세계 내빈들도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연발했습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우리의 문화 중 많은 부분은 불교미술품이 차지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코리아라는 이름 자체도 고려에서 출발합니다. 고려는 불화, 도자기(그중에서 청자), 팔만대장경이란 값진 문화적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이들 유물의 예술성은 가히 최고의 경지입니다. 고려를 미워한 중국의 소동파 시인조차도 청자를 쓰려거든 고려 것이어야 한다고 칭송했을 정도입니다.

고려 때 도공들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도자기를 빚었습니다. 불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선 하나 긋고 절 한 번 올리며 완성했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매우 달라집니다. 요즘 일부 젊은 작가들이 영혼 없이 그리는 불화가 판을 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잃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정신을 왜곡해서 잘못 알고 있습니다. 흔히 조선의 미를 질박하고 소소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위정자들의 거친 예의와 문화적 수준이 반영되어 변질된 미일 뿐입니다. 우리 전통 예술품이 얼마나 섬세하고 감각적인지 우리 스스로 되새겨 본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인과응보'의 교훈 잊지 말자
우리는 이렇게 문화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균일하고 이성적인 눈으로 헤아려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인과응보에 대해 잊어버린 탓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면 너무나 쉽게 죄를 벗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옥을 겁내는 사람들, 죄를 많이 지은 정치인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 이면에는 이런 주장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과응보는 엄연한 진실입니다. 아랍 테러로 서방세계가 곤욕을 치르는 것은 기독교가 아랍 세계에 행한 잔혹한 일들에 따른 업보입니다. 행동에 따른 결과와 책임에 대해 명확히 설법하는 불교적 세계관은 훨씬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요구합니다. 보조 국사가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고 한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듯 불교는 그 어떤 종교나 철학보다 도덕률과 책임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넙죽 엎드려 빌기만 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구하지 않으면 지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려시대 우리 선인들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문화를 창조했듯이 우리도 이제는 불교의 지혜를 배우고 퍼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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