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삼귀의 가운데 세 번째 귀의불 양족존의 우리 말 번역에 관해서 이야기가 많아서 생각해봅니다. 한글 삼귀의가 잘못되어서 현재 특정종단을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 승단이 타락하였다고 주장하는 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승려들의 타락은 승단 및 사회 분위기 그리고 개인의 일탈행위 등 원과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글 삼귀의 가운데 세 번째 승귀의 해석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너무 안이한 해석 아닐까요?

저는 제가 소속한 종단이거나 특정 종단이거나 또 다른 종단이거나 범계와 관련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하거나 변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계를 줄 때에 전계사께서 해주시는 말씀과 율장에 의하면 때때로 주의를 기울이고 함께 되새기면서 지계의식을 일깨우는 것은 바람직하고 권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포살입니다. 모여 살면서 스스로의 부족함과 다른 이의 모자람을 살펴서 반성하고 바로잡아주는 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자입니다.

삼귀의가 아니라 이귀의라는 말이나 스님들에게 귀의하면 안 된다거나 승가에, 상가에 귀의한다는 표현에는 더 살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견해들을 접하고 여러 차례 주장했습니다. 단체인 상가나 승가를 귀의대상인 승보로 하든,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쌍팔배를 승보로 하든 우리말로 옮길 때는 앞의 불보, 법보처럼 다 옮겨 같은 기준과 표현으로 써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말 삼귀의 탄생 배경은 더 살펴야겠으나 말과 문장구조, 교리적으로 보아도 잘한 옮김 입니다. 그냥 스님이나 스님들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이나 스님들은 귀의의 대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스님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들이므로 단체를 규정한다는 개념에도 맞습니다. 혹시 둘이나 셋을 빼자고 한다면 그 부분은 논의할 필요가 있겠지요.

이는 이미 부처님의 보기에도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이 둘이라서 존경, 귀의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아시다시피 아라한 다섯을 배출하고 이 세상에는 아라한이 여섯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기에 그렇습니다.

현재의 승려, 승려들, 승단에 관한 지율, 수학, 수행에 관한 비판은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말 삼귀의의 세 번째 승귀의를 부정하는 것은 다시 살피기를 한 번 더 제안합니다. 한글 삼귀의 문장에는 부처님과 가르침에도 들어있는 거룩한이 스님들께도 똑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냥 스님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 그것도 단수의 스님이 아니라 복수의 거룩한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은 빠알리어의 상가와 견주어 어긋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승려를 포함한 불자들의 지계의식의 저하는 다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속 모두에게 금하고 있는 행위들을 승속 모두 내놓고 하거나 숨기고 하거나 그런 것들은 우리들이 스스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5계인 살도음망주는 승속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인데 지키는 이들이 많다고 하기 쉽지 않다는 분석입니다. 바르게 잡아가야 하겠지요.

우리말 삼귀의를 다 긍정하는 견해에서 한국승단, 한국불교를 바르게, 제대로 세우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불교, 한국불교에 관한 애정을 가지고 연구해서 대안을 제시하는데 힘쓰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불교의 구성을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승단·승가·상가)에 관한 믿음의 종교라고 정의할 때 삼귀의를 온전히 하고 5계를 수지하는 이를 일러 불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10계를 지니면 예비 승려인 사미, 사미니라 하고 250, 348등 구족계를 수지하는 이를 비구, 비구니라 합니다. 초기불교, 상좌부 불교의 입장이든 대승불교, 대중부 불교의 입장이든 자신의 지향점과 소속을 가지게 되면 스스로 그 교단의 계율을 지니고 따르면 됩니다.

부디 한글 삼귀의는 그대로 두고 다른 것을 주제로 삼아 비판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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