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조용히 병원법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자신을 한 환자의 언니라고 소개했다.

스님, 제 여동생이 말기암 치료를 받고 있는데 기도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그렇군요. 얼른 가십시다.”

병실에서 결코 멀지 않은 법당이지만 언니가 이곳을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나는 주저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언니와 함께 병실을 찾아갔다. 언니의 안내를 따라 병실에 들어가니 침상에 누워있던 여동생은 스님이 왔다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합장했다.

스님, 안녕하세요.”

몸도 편치 않은데 누워 계세요. 마음만 받을게요.”

간단히 쾌유기도를 하고 그녀와 담소를 나눴다. 말기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50세였다. 미혼이었고 무척 동안이었다. 오랜 병원생활로 충분히 지칠 법도 한데 그녀는 한 번의 찡그림도 없이 맑은 미소로 대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해 병실을 방문한 나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 그림 박구원.

대화를 마치고 언니에게 몇 가지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녀는 20003월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어려운 곳에 매월 후원금을 보내고, 이웃의 고통도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등 평소 나눔을 몸소 실천해온 그녀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특히 크로마하프와 기타 연주의 달인이었고, 오카리나와 가야금, 장구에도 능한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언변 또한 뛰어나 사회를 도맡아 보기도 했다. 회사에서도 뛰어난 능력으로 늘 모범을 보였던 그녀였기에 충격은 더했으리라.

한동안 방황하던 그녀는 어느 날, 병마와 싸우지 않고 화해하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다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무너질 수는 없었단다. 그녀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을 찾아가 화해하고 마음을 다독여줬다. 그리고는 언니에게 죽어서 돈 욕심 없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2003218일 대구지하철 참사가 있던 바로 그날, 그녀는 운명의 기로에 섰다. 나는 병실을 방문해 기도를 했지만 저녁에 제사가 있어 오랜 시간 함께하지 못한 점이 안타까웠다. 결국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언니의 문자를 받았다.

스님! 우리 미열이 지금 아미타부처님 곁으로 갔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마음 깊이 영가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다. 퇴직금으로 병원비와 장례비까지 다 마련해둔 그녀는 조의금을 받지 말 것과 영안실·무덤가에서 노래를 불러줄 것, ()푸른우포사람들 사무실 증축을 위해 100만원을 전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장례기간 그녀의 빈소에는 애도의 소리 대신 잔잔한 하프연주가 이어졌다.

세월이 몇 해 지나고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면서 불현듯 고인이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생전에 임종기도를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점 때문이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환자가 상심할까 걱정돼 쾌도기유만 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떠날 때가 언제인지 알았고, 모든 것은 아쉬움이 남을 때 떠나야 한다며 담담히 가족들 품에서 임종했다.

말기암 환자 중 3~40%는 자신의 상황을 모른 채 임종한다고 한다. 사실을 알리는 걸 가족들이 꺼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삶을 되돌아 볼 시간이 필요하다. 말기 암환자의 마지막 가는 길, 우리 모두 도와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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