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일 위원의 佛母列傳- ⑫ 계심(戒心) 스님
계심 스님의 생애와 조각승이 된 배경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불상에서 나온 발원문과 사적기 등을 통하여 활동 시기와 거주 사찰, 조각승 계보 등을 밝힐 수 있다.
내장산 주석하며 남부지역 활동
상정 계보 이어 18여년 불사 참여
선운사 백련암 불상이 대표 작품
계심 스님은 1771년 4월에 경북 김천 직지사 불상을 개금하는데, 이 불사에 상정 스님을 도와서 부화승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참여한 작가는 8명으로, 계심 스님이 조직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그 후 계심 스님은 1778년 3월 24일부터 4월 3일까지 12일 동안 수화승으로 전남 강진 정수사 목조삼세불좌상을 개금하였다. 불상의 대좌에 적힌 묵서(墨書)에는 정수사 법당 삼존과 여러 암자의 불상 30여구를 중수·개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계심이 우화당 태원의 손제자(孫弟子)라는 기록이 있어 스님의 법맥을 밝힐 수 있다(重修改金大法堂三尊本寺諸庵及外屬庵佛相三十位幷合同○訖功而爲首戒心也卽去壬寅改金主」雨華堂大禪師太元之孫弟也). 현재 계심 스님의 스승을 직접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계심 스님이 1771년에 직지사 불상 개금에 수화승 상정과 작업한 것을 보면, 상정이 태원의 제자이면서 계심의 스승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계심과 같이 직지사 불상을 개금 중수한 우학(宇學, 羽學:-1754~1774-)은 1774년에 지리산 대암정사에서 중간(重刊)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상정과 시주자로 참여하는데, 아버지가 박세강(朴世綱)이고, 어머니가 장만화(張萬花)라고 적혀 있다. 그는 1754년에 수화승 계초와 전남 곡성 수도암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제작하고, 수화승 상정 스님과 1755년에 전남 창평 용흥사 상선암 목조불좌상(양주 회암사 봉안)을 조성하고, 1771년에 경북 김천 직지사 불상을 개금하였다. 따라서 계심 스님과 우학 스님은 선후배 사이로 보인다.
계심 스님은 1778년 6월에 정읍 내장사 원적암에서 치성광삼존불상과 고창 선운사 백련암에 봉안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목조대세지보살좌상을 조성하면서 관음보살을 개금하였다. 이 불상들은 모두 내장사 원적암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아 계심이 원적암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계심 스님은 1780년에 전남 장흥 보림사 천왕상을 개금하고, 금강, 문수, 보현을 칭숙(稱淑), 성민(聖民), 진선(震禪) 등과 제작하였다. 또한 스님은 1787년에 18명의 스님들과 전북 고창 선운사 대법당, 장육전, 팔상전 불상을 중수·개금하였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진 계심 스님의 활동 시기는 1771년 4월부터 1787년까지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발원문과 사적기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계심 스님은 당호가 묵양당(讓堂)으로, 1720년대에 태어나서 1740년대 보조화승으로 활약하였고, 1770년대 상정 스님과 불상 제작과 개금을 주도하면서 암자에 봉안하는 중소형의 불상을 수화승으로 제작하였다.
계심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은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된 목조여래좌상과 목조대세지보살좌상이다. 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건륭 44년 무술 윤유월 일에 무장 선운사 백련암의 아미타존상과 대세지보살을 정읍 내장산 원적암에서 새로 만들었다. 성전에 있는 치성광삼존상과 칠성불은 새로 만든 것이지만, 관음존상은 금칠만 했다.”라고 쓰여 있어 1778년에 원적암에서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치성광삼존불과 칠성(七星)을 묵양계심, 행안, 천민, 세관, 융감이 제작하였다.
이 가운데 고창 선운사 백련암에 봉안할 삼존불은 관음보살상이 남아있어 중수와 개금하고,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을 새로 만들었다. 불상이 조성된 원적암은 〈범우고(梵宇考)〉와 〈가람고(伽藍考)〉에 “전라북도 정주군 내장산에 있다”,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에 “정주읍(井州邑) 내장면 내장산 내장사에 있고, 본사는 백양사의 말사이다”라고 적혀 있다. 원적암은 내장사에서 북쪽으로 비자나무 숲과 월출봉으로 가는 1.1㎞ 지점 일주문에서 고내장(古內藏)을 지나 2.1㎞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적암은 1087년에 적암대사가 창건한 후, 조선시대에 관련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1950년 12월 21일을 전후하여 소실되었다.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된 목조아미타불좌상 내에서는 특이하게 종이로 만든 사각형의 후령통이 조사되었고, 목조대세지보살좌상에서도 발견된 품목과 후령통의 형태가 동일하여 같이 제작된 불상이라고 볼 수 있다.
목조대세지보살좌상은 높이가 48㎝인 중소형으로, 정수리 부분에 단순하게 조각한 보계를 끼웠고, 화염문과 화문 일부가 남아있는 커다란 보관을 쓰고 있으며, 귀 밑으로 늘어진 보발은 어깨 위에서 둥글게 말린 뒤에 세 가닥으로 늘어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여래상과 유사하지만,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은 복부에서 늘어진 중앙의 옷자락이 S자형으로 처리되고, 옆으로 다섯 가닥으로 펼쳐져 대좌까지 길게 늘어져 마치 끝자락 사이사이에 연봉오리가 튀어나온 것 같이 표현하였다. 또한 승각기는 가슴에서 수평으로 묶어 상단에 연판형 주름을 넣어 자연스럽게 좌우대칭을 이룬다. 보살상의 측면은 어깨선을 따라 두 가닥의 옷 주름이 수직으로 내려와 끝자락이 U자형이고, 그 앞으로 한 가닥의 주름이 접혀있다.
또한 같이 조성된 치성광삼존상은 불상은 없어졌지만, 의정부 덕수사에 목조대좌가 남아있다. 이 목조대좌의 상판에 “乾隆四十四年戊戌閏六月日井邑內」莊山圓寂庵七星殿」熾盛光日月兩大菩薩七星如來」新造成奉安蓮臺卓上」毘首後代人讓堂戒心」幸安」天民」世瓘」融襤 … 訂師 定波 瑞和」誦經呪 天定」看香 性主」主穀 進楚 ……”이라는 묵서가 남아있어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대세지보살좌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과 내용이 동일하여 같이 조성된 대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조연화대좌의 규격은 24.3㎝×112.5㎝×28.9㎝로, 본존이 앉은 대좌 밑에서 옆으로 뻗어 나간 연화 줄기와 연봉오리가 좌우 존상 받침을 들고 있는 형태이다. 대좌에는 연봉오리와 연밥 등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목조대좌는 중앙에 치성광여래와 좌우에 일광과 월광보살을 배치한 것으로 추장된다.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에서 치성광삼존상이 만들어진 것은 유일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