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八正道) ⑥

여덟 가지 성스러운 수행 길’(八正道)의 여섯 번째는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하도록 노력하여 나아감’(正精進)이다. 팔리어 원어에 따르면 이 말의 핵심주제어는 노력’, 힘을 기울임이다. 얼핏 생각하면 그 어떤 분야든 노력을 권장하지 않는 데가 없다는 점에서 팔정도만의 독특함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의 의미인 바르고 적절하고 온전함에 그 독특함이 있다. 여기에는 꾸준함이 동반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노력하여 나아감의 면모라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권에서 쓰는 ()’자의 기본적인 뜻은 쌀을 찧는 것이다. 벼를 재배하여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쌀로 가공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자에는 가공으로써 힘을 기울임이라는 뜻이 있고, 대강이 아니라 곱게 빻아야 한다는 점에서 정밀’ ‘정교의 뜻이 추가되며,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능숙함’ ‘뛰어남’ ‘정성이 필요한 것으로 그 의미가 점차 확장되는 것이다.

꾸준하게 힘을 기울이는 목적이나 이유가 올바름적절함온전함의 가치를 지향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수행길이 유익청정해탈열반의 가치를 지향하는 방법이자 실천이라는 선언이 된다. 불교에서 ()’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팔리어 짜리야(cariya)’에 그 연원이 있다. 기존의 팔리어 사전에서는 이 뜻을 행위행동으로 옮기고 있지만, 이 말의 어원이 되는 동사어근 짜르(car)’에 초점을 맞추면 가는 일이 더 적합한 뜻이다. , “가야지, 가야지하면서 가지 않는 것, “해야지, 해야지하면서 하지 않는 일상의 모습이 바로 꾸준함이 흩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 그림 나은영.

지눌이 쓴 계초심학인문에는 처음 마음을 내어 공부하는 이들이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생각’()이 나온다. 바로 벼랑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懸崖想)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말이라는 생각’(慣聞想)이다. 첫째는 공부하는 일이 막막하여 자신에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말하는데, 벼랑에 매달려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비유하였다. 둘째는 익숙한 내용이라서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들어봐도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만큼이나 이미 익숙하여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생각도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왜 이런 생각을 조심하라고 했을까? 두 가지 생각의 공통점이 바로 꾸준한 노력을 미리 포기하게 만든다는 점, 즉 하나는 가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미리 포기하고, 또 하나는 가는 일이 필요 없다고 해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지눌의 당부에 따르면, 꾸준함의 힘을 존중하는 사람은 어려움에 맞서려는 도전 의식을 내고, ‘통념이라 여기는 기존의 사고 체계의 문제점에 대해 성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꾸준함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 꾸준함의 결과를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게 어느 곳이든 또 어떤 길이든 좀 더 너른 시선으로 거기에 내재된 의미와 가치를 볼 것이다. 이를테면 매일 아침 줄넘기를 꾸준하게 해서 건강을 도모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수준이 낮으니 그만두고 스포츠 센터에 가서 특정의 그 무엇을 배우고 익혀야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권유의 수준이 아닌 강요의 형태라면, 꾸준함의 가치를 무시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꾸준함의 이면에 불건전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길과 길 사이에 우열의 가치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꾸준함의 힘에 있으며, 꾸준함의 힘을 오롯이 자신의 성장과 성숙’()에 쓰게 될 때가 아닐까? ‘정정진으로의 길 안내는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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