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 스님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은… 1952년 해인사서 선행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6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1970년부터 1989년까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다섯 차례(3·4·5·8·9대) 역임했다. 1970년 운문사 강주로 운문사에 첫발을 내디딘 스님은 1977년부터 1998년까지 운문사 주지소임을 다섯 차례(8~12대) 겸임하면서 청도 운문사를 세계 최대 수준의 비구니 교육도량 대가람으로 일신시켰다. 2003년 전국비구니회 회장(8·9대)을 맡을 당시엔 비구니회를 탄탄한 조직으로도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존하는 비구니계의 최고 대강백으로 일컬어지며 〈불교학논문집〉 〈구사론대강〉 등 다수의 논문과 번역서가 있다. 또한 서예로 대한민국 국전에 입선할 만큼 붓글씨 솜씨도 빼어나다.
전국비구니회서 초대 원로의장에 추대
문서포교위해 올 5월 법계문학상 제정
2003년 법계 장학회 설립…총 93명 수여
2006년에는 법륜 비구니장학회도 창립

청도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대인 557년 한 신승(神僧)이 3년간 수도끝에 큰 깨달음을 얻은 뒤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한 곳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나이 500년 된 커다랗고 우아한 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로, 가지가 축 처져 있어 땅에 닿을락말락한다.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도 있어 1400여 년 된 ‘천년 고찰’의 깊이를 더한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담벼락 돌 하나까지 손수 정성껏 가꾼 이가 바로 ‘비구니계 역사이자 대모’ 인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이다. 운문사가 곧 명성 스님이요, 스님이 곧 운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명성 스님이 1977년부터 20여년 간 5차례에 걸쳐 주지를 맡으며 운문사를 현재와 같은 대가람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6월 1일 경내 스님의 주석처에 들어서자 다실에 걸려 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 온다. 명성 스님의 평소 가르침이자 좌우명이라 할 수 있는 ‘즉사이진(卽事而眞)’이다.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쓴 이 말은 성심으로 하지 않은 일은 진실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일을 할 때 스스로 그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일이 바르고 잘 되지 않음은 물론이요, 또한 진실되지 않음은 당연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즉 성심을 다해 진실되게 하는 일이야말로 스스로를 만족시키고 다른 이에게도 감동을 주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렇듯 명성 스님은 후학들에게 모든 일을 성실히 하고 진실되게 하라고 강조한다. 겉모양만 번드레해서는 그 실속 없음이 이내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된 일은 하등의 이익을 자기나 남에게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명성 스님과 동석하자마자 여쭈었다. 법계 문학상 제정 취지에 대해서. 명성 스님은 “조계종이 가장 역점을 두는 3대 사업이 역경, 포교, 도제 양성입니다. 그런데 역경과 도제 양성은 어느 정도 열심히 해온 것 같은데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포교 였습니다. 포교중에서 문서 포교는 다른 방법에 비해 매우 편리하고 효율적이라 생각해 제 호를 따서 법계 문학상을 제정한 것입니다. 특히 제 주변 지인들한테 불교문학이 침체됐다는 말을 듣고 문학상 제정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제가 우선 첫 발을 내딛었으니까 나중에 제가 없어도 후학들이 계속 이어갔으면 합니다. 또한 앞으로 법계 문학상 상금 규모도 점차 늘릴 생각입니다.”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거목인 명성 스님이 지난달 5월 불교계 신진 장편 작가 양성을 위해 기금을 출연해 문학상을 제정했다. 법계문학상 운영위원회에 따르면 운문사를 전국 최대규모의 비구니 전문 교육도량으로 키운 명성 스님의 법호인 ‘법계’를 따서 만든 법계문학상은 한국문학의 발전과 불교 포교를 위해 마련한 것이다. 명성 스님은 문학만큼 불교정신을 대중에게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매체가 없다고 판단해 문학상을 제정했다.

법계문학상은 기존 불교계 문학상들이 쉽게 다루지 못한 장편소설과 동화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불교계를 대표하는 문학상으로는 현대불교문학상과 유심작품상이 있지만 시ㆍ시조ㆍ학술ㆍ단편소설ㆍ평론 등에 대해 시상하고 있다. 명성 스님은 말을 이었다.

“불교계에 장편 작가들이 활동할만한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에 법계문학상이 갖는 의미가 남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이 상이 역량 있는 작가를 길러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문학상들이 더욱 힘을 받고 늘어나 인재를 양성하고 문서 포교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명성 스님은 역시 호인 법계를 따 불교인재양성을 위해 운문사서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법계장학금은 명성 스님이 고희 논문출판과 수행 생활 틈틈이 마련한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지난 2003년 장학생 5명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14회에 걸쳐 모두 93명의 스님과 불자학생에게 총 2억37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올 3월 12일에도 운문사서 14회 법계장학회 장학금 전달식을 개최했다. 명성 스님은 이날 중앙승가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정각 스님을 비롯한 6명의 스님과 뉴욕주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최하원씨 외 1명 등 8명에게 각각 300만원씩 총 2400만원을 전했다.

2010년 운문사 승가대학장시절 법문 출판기념회서 축하 케이크 절단을 하는 명성 스님.(왼쪽서 네 번째)
이외에도 명성 스님은 전국비구니회 회장 당시 ‘법륜비구니 장학회’도 설립했다. 2006년 법련사서 서예전을 열어 얻은 수익금 5억원과 이사스님들이 기부한 2억원을 합해 총 7억원 규모의 ‘법륜비구니 장학회’를 2010년도에 설립했다. 해마다 5~6명 대학원 과정의 학생들에게 각각 5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이런 선행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명성 스님은 운문사를 넘어서 한국불교 비구니계에서 브랜드이자 정신적 지주이다. 이에 전국비구니회 원로회의는 5월 3일 서울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에서 회의를 열고 초대 원로의장에 단독으로 추천된 명성 스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하기도 했다. 이날 회의 참석자들이 현재 비구니계서 명성 스님만큼 큰 업적을 남긴 스님이 없다며 만장일치로 추대한 것이다. 명성 스님은 “원로회의는 전국비구니회라는 수레바퀴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전국비구니회가 불교 발전의 초석이 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할 것입니다. 전통 계맥을 이어오는 한국 비구니계는 세계 여러 불교국가들로부터 신망과 부러움을 사고 있는 만큼 세계 제일의 비구니회가 되도록 후배들과 손잡고 노력할 것입니다” 라고 밝혔다.

올해로 세수 87세, 운문사 주석 47년을 맞은 명성스님은 전통 학문과 현대 학문을 섭렵한 대강백이면서 한국 비구니계의 얼굴이다. 특히 지난 2010년에는 명성스님의 운문사 주석 40년을 기념해 제자들이 명성스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책 3권을 출간해 봉정식(출판기념회)을 가지기도 했다. 출간된 책은 명성스님의 상좌 서광스님이 쓴 명성스님 평전 〈후박꽃향기〉, 명성스님의 법문을 모은 〈즉사이진(卽事而眞)-매사에 진실하라〉, 불교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명성스님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꽃의 웃음처럼 새의 눈물처럼〉 등 3권이다. 명성스님이 동국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운문사로 내려와 비구니교육에 투신한 이후 길러낸 제자는 2천여명이 넘는다. 사실상 우리나라 현재의 비구니 스님 상당수가 명성스님의 손길을 거친 셈이다. 23세에 ‘늦깎이’로 출가한 명성 스님은 여성이 초등학교를 나오기도 힘들 당시 명문인 강릉여고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 엘리트 여성에게 발심 출가를 권유한 것은 대강백인 부친 영향이 컸다. “내가 이렇게 승려 노릇 하는 게 나쁘면 너한테 권하겠느냐”는 부친의 권유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출가했다.

명성 스님은 국전에 입선할 만큼 붓글씨 솜씨도 빼어나다.
명성 스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출가 후에도 계속됐다. 서울 청룡사 강원 강사로 10여년간 후학을 지도한 후 동국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1970년 운문사로 내려와 강사를 시작했다. 1977년부터는 운문사 주지 겸 운문승가대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후학 교육과 운문사 불사에 매진했다. 또한 스님은 2004년부터는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제 8대와 9대 회장을 맡았으며,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5차례 지내는 등 종단 일에도 참여하면서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을 끌어올리는데 힘썼다. 특히 비구니스님들이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공부하도록 하는 민주적인 교수법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스님이 강조한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으니까 부처님의 행을 따라하면 됩니다. 부처님의 행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 것.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부처님의 뜻이고 불자 자격이 있는 거예요.” 어쩌면 명성 스님은 그 꼿꼿함으로 인해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고, 전세계 비구니 수행승들의 사표가 됐을 것이다.

이같은 명성 스님의 노력과 열정으로 운문사 승가교육은 다른 강원(講院)서 벤치마킹 할 정도로 한국 불교 교육의 기틀을 잡았다는 평을 받았다. 스님은 경전뿐만 아니라 교양철학, 역사, 피아노와 서예까지 가르쳤다.

“경(經)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禪)은 부처님 마음입니다. 제자들 중에는 화가도 있고 성악가도 있습니다.”

명성 스님이 법륜장학회 장학금 수여식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 앞줄 왼쪽서 세 번째가 명성 스님)
스님 말씀은 짧고 간결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숫자에도 1단위, 10단위, 100단위, 1000단위가 있듯이 우리 선 자리서 자기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해야 합니다. 스승은 스승답게, 제자면 제자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지요.”

명성 스님이 내전과 외전을 두루 겸비한 것도 이렇게 매사에 최선을 다한 결과다. 비구니계의 큰 사표로서 2007년에는 조계종 사상 처음으로 열린 ‘비구니 법계 품서식’서 비구니 최고의 법계에 해당되는 ‘명사’에 품서돼 존경받는 큰 어른이 됐을 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알려져 한국 비구니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명성 스님은 부산서 제정된 ‘일맥재단 사회봉사상’을 지난 2004년 수상했고, 2008년에는 운문사 승가대학과 중국 명문대인 칭화(淸華)대와 학술교류 협정을 맺었다. 이로써 운문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칭화대 대학원에 우선적으로 입학이 허락되게 했다. 스님은 또한 19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종교지도자대회에 참석했으며 2001년엔 스리랑카 ‘Sasana Kirthi Sri’ 공로상을, 2008년 3월에는 태국 방콕서 UN 국제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지위 향상을 위한 협회가 수여하는 ‘탁월한 불교여성상’을 받기도 했다.

명성 스님은 말한다. “절에 와서 수행을 따로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장소가 수행 도량입니다. 가정, 직장이 다 수행하는 장소지요. 유마경에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곳이 도량이다’라고 했습니다.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일곱 가지 보석을 갖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입니다. 즉사이진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정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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