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母列傳 - ⑦ 진열(進悅) 스님

18세기 전반 대표하는 조각승
영·호남 중심 1백여 불상 조성
통도사 목조사천왕상 조성 당시
‘가선’ 언급… 정2품 공명첩 받아

▲ 진열 스님의 1713년 작품 고양 상운사 목조여래좌상(사진 왼쪽)과 목조보살좌상(사진 오른쪽). 이 불보살상은 오른쪽 어깨에서 대의자락이 가슴까지 내려와 긴 물방울 같이 U자형을 이룬다. 사진제공=(재)불교문화재연구소
18세기 전반은 앞 시기에 활동한 조각승들이 만든 불상 양식을 계승하거나 다른 조각승이 조성한 불상 양식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불상을 만든 시기이다. 이는 전국 사찰 전각이 정비가 마무리되면서 불상을 새롭게 제작할 필요성이 점점 줄어든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은 진열 스님이다. 그는 호남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영남 지역에서도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모셨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당시 대부분 불상을 만든 조각승을 화원(畵員), 양공(良工)으로 불렀다. 하지만 진열 스님에 대한 수식어는 다르다. 일부 문헌을 보면, 중국 황제 때 훌륭한 장인인 수공(工)을 빗대어 ‘목조각상의 수공(工)’으로 기록될 정도로 뛰어난 목수(木手)로 명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진열 스님이 불상 제작에 참여한 작품은 전국에 걸쳐 10여 건, 백여 점에 이른다.

아직까지 진열 스님은 언제 태어나서 열반에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최근 여러 사찰에 봉안된 불상의 복장 조사가 이루어져 그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조각승이 밝혀지고 있다.

진열 스님은 1688년에 도잠 스님과 전북 완주 대원사 명부전 불상을, 1689년에 지현 스님과 경북 상주 북장사 명부전 불상을 제작하였다. 그후 진열 스님은 1695년에 성심 스님과 전북 전주 백련사 보살상과 나한상(전주 서고사 봉안)을 조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진열의 스승은 도잠 스님이나 지연 스님 또는 성심 스님일 가능성이 높다.

진열 스님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가장 앞선 작품은 1706년에 전남 곡성 관음사 대은암 목조보살좌상(곡성 서산사 봉안)이다. 그때 진열 스님이 보살상 제작을 주도한 것을 보면, 최소한 1700년대 수화승으로 불상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진열 스님은 수화승으로 1707년에 경남 함양 도솔암 목조관음보살좌상, 1711년에 전북 임실 중흥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함양 사리암에 아미타불만 봉안), 1713년에 경기 고양 노적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상운사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만 봉안)과 만력 연간에 제작된 목조삼존불좌상(서울 도봉 천축사 봉안)을 개금하였다.

또한 스님은 1718년에 경남 양산 통도사 목조사천왕상을 조성하고, 1719년에 전남 나주 운흥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을 개금하면서 시왕상을 개체(목포 달성사 봉안)하고, 1722년에 문수사 감로암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봉은사 반야암 봉안)과 적조암 목조관음보살좌상(밀양 여여정사 봉안) 및 부산 범어사 비로자나불좌상을 개금하면서 관음전 목조보살좌상을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진열 스님은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제주 용문사 봉안 목조여래좌상 등을 만들었다.

특히 스님은 1718년에 양산 통도사 목조사천왕상을 제작할 때 ‘가선(嘉善)’으로 언급되어 정2품(正二品) 문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공명첩(空名帖)을 이전에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문헌을 통하여 진열 스님은 1660년을 전후하여 태어나서 1680년대 불상 제작의 수련기와 보조화승을 거친 후, 1700년대 초반부터 불상 제작에 우두머리인 수화승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스님은 주로 전라도와 호남 지역 사찰에 불상을 조성했다. 이는 주요 사찰의 주전각이나 부속 전각에 불상이 진열 스님이 활동하기 이전에 대부분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진열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도잠(-1643-1688-), 지현(1648-1688-), 성심(-1695-) → 진열(-1695-1722-), 계초(-1688-1707-), 영희(-1711-1718-) → 태원(-1706-1748-), 청휘(-1707-1722-), 청우(-1722-) 등으로 이어진다.

▲ 1695년 전주 서고사 나한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 사진제공=서고사
진열 스님이 만든 대표작이 봉안된 상운사는 북한산 영취봉(靈鷲峯) 남쪽 중턱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사찰이다. 상운사는 1711년에 북한산성이 축성된 후,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위하여 건립되었던 11개의 사찰 중 하나로, 1745년에 성능(性能) 대사가 간행한 <북한지(北漢誌)>에 “영취산 아래 133칸 건물로 승장 회수가 창건하였다”고 언급돼 있다.

또한 1943년에 인진호(安震湖) 스님이 편찬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1722년 승장 회수가 창건하였는데, 편액은 노적사(露積寺)로 되어 있고, 대략 133칸이다. 1813년 승장 태월지총(太月智聰)이 중창하였다”는 기록들을 통해 상운사의 연혁을 알 수 있다. 천불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전형적인 조선후기 불상으로,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과 달리 관음보살은 크기와 조각수법이 달라 제작 시기와 작가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진열 스님이 만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가 61㎝로,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여 얼굴과 앉은키는 1:3.1의 신체비례를 보인다. 이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과 거의 동일한 신체비례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보다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머리는 뾰족한 나발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로 표현되고, 육계 밑에는 반원형의 중간계주와 정수리 부위에 낮은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방형의 얼굴에 반쯤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콧날이 곧게 뻗었으며, 입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따로 제작된 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고 있다.

바깥에 걸친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대의자락이 가슴까지 내려와 긴 물방울 같이 U자형을 이루고, 나머지 대의자락은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오른쪽 어깨를 덮은 대의자락과 겹쳐져 있다.

특히, 하반신의 대의처리는 네 겹으로 접힌 주름의 가장 안쪽 주름이 넓게 펼쳐지고, 나머지 주름은 물결이 일렁이듯 접혀져 있다. 반대쪽 무릎에 걸친 대의자락은 연판형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데, 이는 17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한 색난이 제작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조선후기 불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연판이 위를 향하는 앙련형(仰蓮形)으로 처리되지 않고, 윗단을 수평으로 접혀 있다. 불상 뒷면의 처리는 목둘레에 대의(大衣) 끝단을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목조대세지보살좌상은 본존 같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염보주로 장식된 커다란 보관 안쪽의 머리카락은 두 갈래로 따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보관 밑으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기존에 제작된 다른 보살상과 달리 어깨와 무릎의 폭이 좁아 얼굴이 더 강조되고 있다.

대의처리는 본존과 동일하고, 손의 자세만 다른데, 오른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고, 왼손을 가슴까지 들어 연화가지를 쥐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지물을 들지 않아 1990년대 개금하면서 연화가지를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진열 스님은 명부전이나 영산전의 불상, 사천왕상 등을 만들었고,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의 절정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표 조각승이다.

진열과 그 계보의 조각승이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불상은 고양 흥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태백 장명사 목조여래좌상, 부안 내소사 지장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순창 두암사 대모암 목조여래좌상, 개인 소장 목조여래좌상 등이 18세기 전반에 진열 스님이 제작한 불상과 전체적인 인상과 대의 처리 등이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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