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서 벌어지는 신입생 환영회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술 권하는 모임이 되어버렸는가 하면, 술을 핑계로 고삐 풀린 방임과 폭력이 난무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신문지상이나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그런 소식들은 입맛을 씁쓰레하게 만든다.

대학교! 한때는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최일선이었고, 한때는 사회적 양심을 외면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보루이기도 했던 곳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대학교란 이 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인재를 양성하는 최고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대학은 미래의 한국사회공동체를 꿈꾸고 만들어내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교는 조금 다르다. 지금의 대학교는 철저하게 출세를 위한 인생의 중간 목표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출세하는 길에 당연히 챙겨야 하는 스펙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대학마저 순위를 매겨 출세의 스펙으로 삼는 것을 당연한 풍토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어린이집부터 고등학교까지 약 15년에 이르는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 어렸을 때부터 어떤 대학에 갈 것인지가 중요한 목표가 되어버린다. 다섯, 혹은 여섯 살이 되면, 이미 대학을 가기 위한 스펙 쌓기 혹은 대학 수능점수를 잘 받기 위한 경쟁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왜 공부해야 하지?”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요.”

엄마가 자식을 기르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어느 순간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사이에 있는 모든 청소년들의 삶은 온통 대학 가기하나에만 쏠려버린다.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의 삶 전체가 밥 먹는 것 외에는 모두 대학 가기와 연관되어 있는 숨찬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 주위의 모든 친구들도 역시 그러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 신입생에게 대학은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할 곳이 아니고, 방임하고 방종할 수 있는 곳이 되어버린다.

목표를 성취하고 나니 허망함이 가득한 까닭이다. 그런데 그 대학이 다시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해서 다시 한번 경쟁의 스펙을 강요하며 압박을 가한다. 이제 대학준비생이 아니라 취업준비생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대학생의 우아함(?)을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모순이 아닐까?

대학준비생의 경쟁사회에서 갓 벗어난 대학생에게 취업준비생의 경쟁을 강요해야 하는 모순. 우리 사회는 그리고 그 사회구조의 모순에 예속되어 버린 대학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이겨야 한다는 생존경쟁만 가르치는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런 현장에서 강요당하는 경쟁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학생이다. , 언어, 몸짓에서 일방적인 폭력이 자행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사회인 셈이다.

우리가 만나는 대학사회의 모순은 대학사회만의 모순이 아니다. 인류사회는 짐승과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추구하는 정점에 대학이 존재하고 대학생이 존재해야 한다.

대학은 생존경쟁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함께살기, 더불어살기를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 그것을 허용하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의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계율은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가기를 위한 지침들이다. 거기에는 생존을 위한 경쟁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서로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일탈한 듯 한 대학생만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스무 살 인생 전부가 대학준비생일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자유로울 것 같았던 대학이 취업경쟁소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대학생은 탈출구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일탈, 방종 그리고 힘겨움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부처님이 남기신 승가공동체가 더불어 살기의 희망적인 사례이듯 우리 사회의 대학공동체 또한 미래의 공동체를 예비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에 갓 들어온 새내기에게도, 대학생활에 익숙해진 재학생에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생은 생존경쟁의 밀림이 아니어야 한다고! 인생은 더불어 살기 위한 관심과 애정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현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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