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가 김호석 화백

김호석 화백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1999년 올해의 작가-김호석 전’을 비롯해 2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300여 차례의 단체전 및 기획 초대전에 참가했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한국대표작가로 선정되어 미술기자상을 수상했다.
성철 등 14 선지식 진영 그려
친견 한 번 없이 ‘성철’ 그려내
스님 태 자리 흙으로 얼굴 채색
종이 뒷면 칠하는 배채기법 계승
외형 넘어 전신(傳神)의 그림 위해
수행처 답사하고 인물과 함께 생활
“스님 진영 붓만으로 그릴 수 없어
인물의 지난 삶과 오롯이 만나야”

불교를 자신의 종교로 생각해본 적도,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선(禪)의 세계를 궁금해 하고 다가가고 있다면, 그 상황의 근거와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선의 세계가 불교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불교 안에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산문 밖의 선’이 아닐까.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1999년 올해의 작가’이며 한국 수묵화의 일면을 일구고 있는 김호석(59) 화백이다. 그는 1994년 성철 스님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국 근현대 선지식들의 진영(眞影)을 그려오고 있다. 산문의 바깥에서 산문의 안쪽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깊숙한 안쪽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선지식의 진영을 그리면서 다가가게 된 선의 세계다.

인연
1993년 11월 10일. 합천 해인사. 20만의 인파가 성철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에 함께 하고 있었다. 시대를 걱정했던 어른의 열반은 사바의 대중에겐 큰 슬픔이었다. 그 자리에 김호석 화백도 함께 했다. 그는 한 시대가 보내야 하는 한 어른의 입적을 애도하기 위해 동시대의 동거인으로 가야산을 찾았고, 화가로서 그 숙연한 장면들을 스케치북에 담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미 사바의 문턱을 넘어간 성철 스님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성철 스님의 진영을 모셔야겠는데 그릴 수 있겠습니까?”
20여 년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원택 스님이 김 화백에게 성철 스님의 진영을 부탁해왔다. 김 화백은 지난 겨울 스님의 다비식이 떠올랐다. 성철 스님을 친견한 적이 없는 김 화백이었지만 화가로서의 손은 이미 스님의 모습을 더듬기 시작했다. 성철 스님의 진영을 그리기로 한 김 화백은 그날부터 ‘성철’의 삶을 따라가게 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스님
가고 없는 스님의 모습을 그릴 방법은 사진뿐이었다. 김 화백은 사진가 주명덕 선생으로부터 스님의 사진 수백 장을 받았다. 방안 가득 스님의 사진을 붙여놓고 스님의 모습을 화가 김호석의 메모리에 저장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모리’에 저장된 스님의 모습은 그림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노장님의 참모습을 보고 싶고, 그 모습을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시면 고맙겠소. 스님의 모습을 어떻게 구현하든 화가의 몫입니다. 다만 화가 자신, 김호석이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 중 최고의 그림이었으면 합니다.”
성철 스님의 진영을 부탁한 원택 스님의 주문이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현대불교사의 선명한 발자국 성철 스님. 그런 스님의 ‘얼굴’을 그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발자국 ‘성철’을 그려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물화의 궁극인 전신사조(傳神寫照)를 확인하는 말이며, 누구보다 김 화백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성철 스님의 형상만이 아닌, 그의 내면을 품은 그림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벽에 걸린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성철 스님의 삶을 알지 못하는 김 화백으로서는 원택 스님의 주문이 높은 벽으로 다가왔다. 김 화백은 벽에 걸린 사진들을 뒤로하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성철’을 찾아 나선다.

성철 스님 진영. 김호석 화백 작품
‘성철’을 따라가 ‘성철’을 그리다
김 화백은 스님의 태 자리부터 시작한다. 스님이 앉았던 곳에 앉아보고, 스님이 걸었던 길을 걸었다. 스님이 읽었던 책들을 읽고, 스님의 법문을 찾아 듣고, 스님의 생각에 닿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 ‘성철’을 더듬었다. 그렇게 그는 성철 스님의 수행처를 모두 쫓으며 ‘성철’을 마음속에서 조금씩 그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김 화백은 방 안 가득 붙여놓았던 스님의 사진들을 모두 떼어낸다. 그리고 붓을 들어 ‘성철’을 그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사진은 필요 없었다. 화가 김호석의 메모리에 석고상처럼 저장되어 있던 ‘성철’의 형상이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김 화백은 스님의 족적을 밟으며 찾아낸 ‘성철’의 숨결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진영을 그린다는 것은 붓만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명’으로는 ‘내면’을 볼 수도, 그려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알아채는, 언어 이전의 언어와 논리 이전의 논리가 받아들이는 ‘느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김 화백은 진영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화두 하나에 매달린 선방의 수좌와 같았다. 누군가의 생각 안으로 오롯이 들어가기 위해 또 다른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깊이가 얼굴빛으로 형상화되는 스님의 피부 표현은 내게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러다 스님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고, 스님이 태어난 큰 방과 아궁이까지 살피게 되었죠. 그리고 방구들 입구 주변에서 붉게 익은 황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흙이 스님의 피부를 그려내기엔 가장 적당한 물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죠.”

김 화백은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철저하고 새로웠다. 그는 인체가 지닌 가장 자연스러운 얼굴색을 내기 위해 스님의 태 자리에서 가져온 흙으로 물감을 만들고 그 물감으로 스님의 얼굴을 그렸다. 또한 김 화백은 작품의 뒷면에 채색을 반복하여 인물의 자연스러운 얼굴색을 드러나게 하는, 잊혔던 전통초상화 기법인 배채(背彩)기법을 재현했다.

“나는 스님의 태 자리 흙으로 만든 물감을 형상이 그려진 종이의 뒷면에 수백 번을 바르고 말리기를 반복해 앞면으로 물감이 배어나오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피부질감은 물론 스님의 내면을 표현해 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태 자리의 흙으로 인물의 얼굴빛을 표현한다는 생각은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실제 그림에서 거짓말처럼 그 인물의 피부색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는 이것을 초상화 기법의 극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는 고려시대 불화를 그렸던 주요 기법이고, 조선시대 사대부초상화를 통해 초상화 왕국이란 명성을 얻게 한 배채법을 응용하여 새롭게 구현한 것입니다.”

마침내 완성된 〈성철 대선사 진영-1994. 종이에 수묵담채. 253cm×183cm〉은 사실적 묘사뿐만 아니라 그 인물의 내면까지 구현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사롭게는 원택 스님의 주문을 따르는 동시에 우리 전통인물화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미술사적인 업적으로도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한 것이다. 또한 이 작업은 전통형식의 피상적인 추종을 넘어선 것으로 현대적 표현성을 창의적으로 조화시킨 작가의 예술적 역량과 정신적 탐구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 김호석
화가 김호석은 다섯 살 때 붓을 들기 시작했다. 서당의 훈장이었던 조부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스스로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진영’으로부터였다. 고향 정읍 집엔 사당이 있었고 소년 김호석은 매일 아침 조부와 함께 사당에 모신 고조부의 진영에 인사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 김호석은 그 진영을 그림으로 바라보게 됐고, 이내 그 그림에 마음을 뺏긴다. 소년 김호석은 진영을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고 서원한다.

그리고 그는 화가가 되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김 화백은 재학시절인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아파트〉로 장려상을 수상한 이후 1980년대 ‘수묵운동’에 참여하며 수묵의 그림을 그려왔다. 그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화, 역사적 인물화, 서민 인물화, 가족화, 군중화, 동물화 등을 그렸다. 그중에서도 성철 스님의 진영 제작 후 성철 스님의 다비식 스케치를 완성한 〈그날의 화엄〉은 고려시대 불화나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등과 같은 옛 전통회화의 서술적 표현양식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단순히 스님의 운구행렬과 다비식 과정을 담는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정신성과 삶의 모습을 담은 한 편의 대서사로 평가됐다.

왼쪽부터 광덕 스님, 관응 스님, 일타 스님의 진영. 김호석 화백의 작품
선지식의 세계 들여다보며 선의 세계로
김 화백은 성철 스님의 진영과 40여 점의 수묵화를 통해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전신(傳神)이 스며있는 존상을 구현해냈다. 이런 노력의 결과는 진영이라는 것이 ‘인물화’의 영역에서 선화(禪畵)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평론을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그는 많은 문중과 스님으로부터 진영 의뢰를 받게 된다. 관응ㆍ법정ㆍ광덕ㆍ일타ㆍ지관ㆍ만해ㆍ지효ㆍ통광ㆍ청화ㆍ송담ㆍ명성ㆍ초의 스님까지.

그는 성철 스님의 진영을 그린 후 한국불교가 선지식이라 부르는 큰스님들의 진영을 계속해서 그렸다. 그는 선지식들을 만날 때마다 그 선지식의 삶을 오롯이 쫓고 그들의 세계를 느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한 순간 한 순간을 모아 열네 분의 진영을 완성했다. 그는 결국 열네 분 선지식의 삶을 산 것이다. 이렇듯 화가 김호석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산문 밖의 선’인 것이다.

“초상화(진영)는 대상 인물이 돌아가신 뒤 진영각에 모실 목적으로 그리는 그림입니다. 화가 자신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완성한 그림만이 다른 예배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업 내내 표현 대상자에 대한 공부는 물론 그분의 분신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가 관응 스님의 진영을 그릴 때, 그는 스님과 한 달 여를 함께 살았다. 그 또한 ‘관응’을 알아가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전신(傳神)의 진영을 그린다는 것은 얼굴 몇 번 보고 사진 몇 장 찍어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의 내면을 그림에 투영하는 일, 그것도 깨달음의 세계에 닿아 있는 선지식의 내면을 온전히 투영한다는 것은 언어와 논리의 영역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세계인 것이다. 스님의 진영을 그린다는 것이 다른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다른 점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노장의 진영을 시작하면 그 노장의 삶과 세계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욕심 아닌 욕심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고 꿇어앉히기도 합니다. 그렇게 희망과 좌절을 오가며 어쩌다 눈빛과 눈빛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노장의 언어와 스치듯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이 모여 한 노장을 그려냅니다.”
김 화백은 오늘도 언어와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산문의 안 쪽 깊숙한 그 곳을 그리고 있다. 산문 밖에서.

〈모든 벽은 문이다〉 3월 출간
그는 그렇게 지금까지 그린 진영과 그 진영을 그리면서 겪은 이야기를 엮어 지난 3월에 〈모든 벽은 문이다-도서출판 선〉를 출간했다. 책은 2015년 2월부터 2016년 1월까지 본지에 연재한 〈화폭속의 선지식〉의 내용에 김 화백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그림과 글들을 보탰다. 단순한 화집의 개념이 아닌 책에는 언어와 그림, 그리고 그 언어와 그림 너머에서 나눈 인간과 인간의 고단하지만 아름다운 시간들이 들어있다.

“사람을 그린다는 것, 그것도 일가를 이룬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보람이었고 늘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행복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고 김 화백은 책에서 쓰고 있다. 화가 김호석은 조선시대 전통초상화기법을 오랫동안 연구해 현대적으로 계승한 한국미술의 소중한 붓 중 하나이다. 그 붓끝에서 많은 선지식의 세계가 오롯이 남겨져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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