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⑥ 안토니 따피에스 (Antoni Taipies)

동양사상·禪 심취한 작가
자신의 철학, 작품으로 승화
“정신세계를 표현”이 화두
흙·모래 등 오브제로 구성

안토니 따피에스의 1970년 작품 〈Toile marron tendue〉. ‘팽팽한 캔버스’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작품은 다양한 해석을 내포하고 있다.
시각적인 자극에 의하여 느껴지는 다양한 인식의 흐름들은 많은 관념적 사고를 가지게 한다. 자신이 체험하고 인식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질료를 이용한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표현하는 작가가 있다.

안토니 따피에스(Antoni Taipies, 1923~2012, 스페인)은 현대미술의 많은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에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 중의 한명이다. 법학을 공부하던 그가 예술가가 되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에 깊은 통찰을 하기 시작한 따피에스는 동양사상과 선(禪)사상에 심취하며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보이는 것의 허상을 직시하기시작하며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현실적 고통과 아픔에 대한 치유는 외부로 표출되는 변화에 현혹되기보다 내면의 본질적 변화를 통한 진리의 가치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들을 정립하기 위하여 아시아를 여행하게 되며 많은 수행자들을 보면서 내면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왜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도피하는 것 같은 수행자의 길을 선택하여 가는가’에 대한 의문은 자신이 직접 선을 체험하고 나서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추구하는 예술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추상미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환경적 여건에서도 자신이 주장하는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대상을 버리고 정신성을 표현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성찰은 일상의 환경에서 구할 수 있는 흙, 모래, 헌옷, 실, 돌가루, 천 등의 재료를 통하여 삶의 진정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표현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이 전혀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데 부족하지 않는 이러한 오브제를 사용한 방법들은 당시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각각의 재료가 주는 특성들이 사라지고 작가의 의도에 의하여 조합과 색채를 더한 이미지들은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공부를 한 그가 1950년 이후 파리에 정착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당시 프랑스 파리는 예술의 중심지 이며 세계적인 작가들이 많이 거주하며 교류를 하던 장소였다. 젊은 따피에스에게 파리는 살아있는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앵포르멜,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등 예술과 철학이 혼재되어 각각의 특성들을 통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각축을 벌일 때, 그는 그러한 소용들이 속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철학적 인식들을 정립하기 시작하며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현대미술에서 따피에스의 예술정신을 하나의 장르로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커다란 의미에서 추상미술에 포함이 되지만 추상미술과 표현주의 경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추구하는 예술성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만의 표현기법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였을까?

따피에스는 예술은 철학이며 수행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질문에 자신은 어떠한 것도 ‘단정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의 상태를 자신이 선택한 재료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형상과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1970년 작품 〈Grande peinture aux aiguilles de pin〉는 번역하면 ‘소나무 바늘과 큰 그림’이다. 마치 선사들의 선문답과 유사해 보인다.
〈Grande peinture aux aiguilles de pin〉(1970)은 ‘소나무 바늘과 큰 그림’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마치 선사들의 선문답과 유사해 보인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어법이기도 하다.
따피에스의 작품은 많은 관객들에게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하여 그들이 철학적 사유를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허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신만의 어법인지도 모른다. 즉, 자신의 작품은 그 작품에 표현된 이미지나 색채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징화되고 기호화된 암호인 것이다.

따피에스가 선을 처음 접하면서 느꼈던 생각은 마치 암호를 해독해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깊은 호흡을 하며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것은 바보이거나 천재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은 어떠한 힘에 이끌려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었으며 선사들이 말하는 깊은 깨달음에는 다다르지 못하였지만 이러한 새로운 체험은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고 한다.

작품을 대할 때 많은 관객들은 작품의 제목을 먼저 보는 경우가 많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일부러 작품제목을 붙여놓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대부분의 질문이 이 작품의 제목은 무엇인지이다. 왜 사람들은 작품을 앞에 놓고 그 작품을 보고 내면에서 나타나는 느낌을 알아차리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적 사고 속으로 넣으려고 할까하고 생각해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범주 속에 그 작품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작품은 앞에 현존하는데 자신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니 제목이라도 보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유추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작가가 어떠한 제목을 붙였다고 하여도 그 제목은 그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그 제목과 그 작품이 일치하는 데는 없다. 마치 저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면서 달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Toile marron tendue〉(1970)은 ‘팽팽한 캔버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작품도 앞의 작품과 유사하다. 제목이 주는 느낌보다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색, 기호나 선들을 보는 사람들이 보이는 대로 보면 된다. 하지만 보이는 작품은 하나인데 그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은 각각의 몫이다. 이것이 추상작품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 중의 하나이다. 추상미술의 발전은 크게 과학기술의 발전과 선사상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시각보다 뛰어난 현미경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보이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하던 흐름 속에서 이제는 인간의 시각을 넘어서서 보이기 시작한 세계를 보이는 표현으로 가지고 온 부분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으로 추구해온 인간의 가치와 존재,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선의 세계와 결합이 되며 본질적 진리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정신성의 구현으로 나타나며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표현의 모티브가 되었다.

정신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 대한 물음에서 이성적 관점의 집합체인 철학적 사고 즉, 합리성, 논리성, 객관성 등이 더 이상 인간정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못할 수 도 있다는 의식의 전환에서 탈 이성적 특성을 보이는 선의 관점들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직관·감각적 관점들을 통하여 인식되는 정신의 실체들이 조금씩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추상미술이 모두 심오한 정신성을 표현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추상미술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정신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도 있다. 하지만 추상미술은 저 하늘에 보이는 달을 표현하지는 못하였다고 하여도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관념적 사고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이러한 시도와 표현은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고 보여 진다.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사실(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은 문화의 흐름을 변화시켰다.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의 흐름 속에서 추상미술의 등장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특성 중 하나가 ‘ZEN style’이다. 추상미술의 등장과 함께 선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며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만들어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추상미술의 등장은 미술관, 갤러리 등 새로운 건축을 만들게 하였다. 왜냐하면 추상미술을 전시하기 위하여서는 거기에 잘 어울리는 전시공간과 조명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로운 변화는 건축, 문학, 음악,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나타나게 되었다.

따피에스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선도한 작가 중의 한사람이다. 자신의 선적 경험들에서 생활의 변화를 이끌어낸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삶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젊은 시절에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며 많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한 사람의 예술가에 의해서 파생이 된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예술의 가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인식의 범주를 확장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같다.

따피에스의 작품을 보면서 선사의 호흡이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이 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