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가족은 사회의 토대
공업윤리로 문제해결 나서야

우리사회가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개탄의 소리는 귀에 면역이 될 정도로 들어왔다. 그래도 이런 개탄의 소리는 유사 이래 현자들의 저술 속에서도 항시 있어 왔고, 중생이 사는 이 세상이 그렇게 도덕적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위안시켜 왔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 보기도 끔찍하고, 듣기도 끔찍하고, 말하기도 끔찍한 일들을 겪으면서 그동안의 위안이 얼마나 안이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곱 살 어린 자식(신원영)을 굶기고, 학대하고, 살해하고 그리고 암매장한 친부와 계모의 자녀살해 사건은 천륜의 붕괴란 용어를 무색하게 만든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계모 김 모씨는 모바일게임에 빠져 원영이를 굶기고 따뜻한 겨울옷 하나 사주지 않으면서 게임머니에 4천만을 썼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목사가 자녀 3명을 살해한 믿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자녀를 살해한 비속살인은 우리 주변에 자주 나타나고 있다. 어쩌랴, 아직 드러나지 않는 아동학대와 비속살인이 다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등교하지 않고 행방불명된 아동 중에서 비속살인의 희생이 된 경우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아동학대와 비속살인은 다른 범죄사건과는 고뇌의 차원이 전혀 다르다. 이 범죄는 가족 관계의 붕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초의 인간관계인 가족 관계 속에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규칙이나 예절을 배운다. 가족은 첫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기본 단위로 구성원의 도덕성을 길러주는 최초의 교육 마당이다. 건강한 가족은 건강한 사회의 토대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가정과 가족 관계는 어떠한가? 결혼률, 이혼율, 출산율 등 가정과 가족관계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통계를 보면 우리의 현실 앞에서 멍해진다. 그런데 지구촌 저 쪽에서 황당한 착각이 있었으니, 2011년 노르웨이에서 기관총으로 1백 여 명을 사살한 극우 청년 브레이그 비크는 그의 일기장에서 한국의 가정문화와 가족관계에 대하여 부러워하고 있는 내용을 수 십 차례나 썼다고 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가정의 구조와 가족 관계의 변화는 사회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옛 가족윤리의 미덕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고향의 문전옥답을 그리는 것과 같다. 문제는 그 변화가 매우 파행적이고 바람직한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학대와 비속살인 사건을 보면 거의가 30대 부부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양육을 한다는 것은 삶의 여정에서 제일 중요하고, 그만큼 책임과 도덕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규범적 개탄만 하는 것은 회피이다. 가정 붕괴와 가족 해체로 인한 비인륜적 문제를 결코 개인의 비도덕성과 무지로 돌릴 수만은 없다.

불교에 업() 이론이 있다. 붓다가 당시 외도들의 숙명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출발한 업 이론은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개인 차원의 업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업인 공업(共業)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사회구성원과 사회구성체의 책임을 묻는 것이 바로 공업이다. 우리는 아동학대와 비속살인을 개인의 부도덕성에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공업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수상 토니블레어는 집권 공약으로 가족가치의 회복(restorat ion of family value)’을 내세웠고, 집권기간 동안 이의 실천을 위해 각종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뜬구름 같은 큰 이념으로 공약을 제시하는 현실을 보면 우리 자신이 허망해지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붓다의 공업윤리를 바탕으로 함께 아파하면서 문제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공업윤리의 정립방안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바로 자비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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