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하는 것도 없고 내가 사량하는 것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왜 죽은 행을 합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생동력 있게 살아 있는 행동을 해야죠.
그럼으로써 항상 흐뭇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고요.

오온이 공한 도리를 알려면
질문 “생사윤회를 벗어나 자유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어떤 스님께 질문을 드리니 “오온이 공한 도리를 알아야 내가 공해서 나 밖의 외부 세계도 없고, 외부 세계가 없기에 이 세상이다 저 세상이다 하는 구분마저도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 알쏭달쏭합니다. 이 오온이 공한 도리를 알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까요?

답변 불법이라는 것이 밥해 놓고 떡 해 놓고 고사를 지내고 부적을 하고 또는 점을 치고 이러는 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걸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모든 게 갖추어져 있고, 자신이 바로 일체 만법의 마음을 낼 수 있는 자연의 ‘자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악과 선을 다 몽땅 공에 놔 버린다면’ 하는 소리는 무슨 소리냐 하면은 여러분이 모든 것을, 고정되게 먹는 것도 없지만 고정되게 듣는 것도 없습니다. 고정되게 가고 오는 것도 없고 고정되게 말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세울 수 없는 것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 도리를 알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체가 없기 때문에, 이 육신은 한계가 있지만 자신의 부처는 수만 개가 됐다가 또 수천 개가 됐다가 하나도 없기도 합니다.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내세울 수가 없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진실하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타의에서 구하고 타의에서 찾고 또 부적에 의존하고 남의 말에 의존하는 그런 습성은 버려야 될 것입니다. 그 습성이 자라면 자라는 대로 우리가 껍데기를 벗는다 할지라도 그 습이 남아 혼이 돼서 유체로서 남의 집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남을 해치게 되는 경향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해야만 이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선으로만 생각해도 선에 걸리기 때문에 바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악에 치달아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도 선도, ‘내가 이렇게 잘하고 있으니까 나는 죄가 없겠지.’ 하는 것도 걸리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잘못함이 없이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 이러는 마음을 갖는 것도 바로 걸리는 마음입니다. 잘 알고 있는 마음도 없고 잘하고 있는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체가 없기 때문에, 또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가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열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알았을 때에 바로 더불어 같이 알아야 하는 것이, 여러분이 나를 알기 위해서 나를 몽땅 놔 버려야만 하는,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공한 그 뜻을 안다면 바로 여러분과 나와 더불어 같이 공해서 돌아간다는 걸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나와 같이 죽어서 같이 나투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열반의 뜻을 가지고 이 세상 우주 만물에 대한 거침없는, 걸림 없는 활용으로 서로 상응케 하면서, 같이 한마음으로 그 능력을 서로서로 줘 가면서 여여하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유(有)의, 이 색상의 법으로서 잘한다고 하지마는 그것은 한계가 있고 너무도 모자랍니다. 지금 시대가 돌아가는 걸 잘 보십시오, 어떻게 모자라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한 말씀 드릴 건, 지난번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만 어느 스님께 제자가 말씀드리기를 “고기가 고기로 보여서 못 먹겠습니다.” 하니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수에 백살을 넣어서 백수탕을 해 오너라.” 했답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어느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말없이 말을 해야 하고 말을 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고 대답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있다면 여러분, 손 들어 보십시오. 그것을 모르신다면 자기 주인공에, 바로 마음속에 넣고 굴리면서 의정을 내 보십시오.

그리고 옛날에 우리 문중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는 지금 차에 치여서 늑막염이 들었는데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는지, 병원에 가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어서 6년 7년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병이 나니깐 어쩔 수가 없이 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나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산토끼를, 시장에 가면 있으니 그거를 마늘을 넣어서 푹 고아서 잡수시오.” 하니까 그 스님께서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살생을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 고기를 먹어서 쓰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 나는 뭐라고 말을 했느냐 하면, 어떻게 말을 할 줄을 몰라서 이렇게 말을 했죠. “그 토끼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과 둘이 아니요, 그 토끼의 몸이 내 몸과 둘이 아니니 즉석에서 요리를 한다면은 바로 그 맛을 알고, 맛을 아는 반면에 그 육신은 바로 약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만약에 모두가 둘이 아니고 모든 생명이 둘이 아니라면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고,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몸과 같이 둘이 아니고 사랑하기에 또 그 고기를 먹어야 하고 살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살생이 아니라 무명만 바꿔 놓을 뿐이지,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살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내가 체험을 해 보지 않고 남의 말만 듣고 귀동냥이나 해서 말을 한다면 이건 진실이 못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좀 더 깊이 생각하셔서, 공부하시는 분들이 마음의 불을 켜야만 됩니다. 마음의 불을 안 켜고, ‘내가 절에 갔다 오면 고만이지.’ 그것도 ‘잘되게 해 주시오. 이렇게 해 주시오, 저렇게 해 주시오.’ 하고 다니는 것만이 불법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바로 내가 공부하는 길에서 자연히, 내가 똑바로 나가고 일심으로 나가는 반면에 일심 자체도 없다는 도리를 알 때에 비로소, 나는 몰라도 그 가정이 화합이 되고 융화가 되고 또 아주 조화가 돼서 잘 돌아가면서 아픈 거라든가 가난이라든가 그런 것은 스스로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해 놓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아파서 급해서 왔는데 뭐 땅뚜개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속으로 중얼중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픈 거나 가난은 면하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것이 묘법이며 우리가 자유자재할 수 있는 법입니까.

이사를 해야 하는데
질문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10년 가까이 살던 곳을 떠나서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어보니 삼재가 들어서 이사를 무사히 하려면 비싼 부적을 사서 집에 붙여야 한다고 하는데 걱정입니다. 집안 살림도 어려운 형편에 그분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

답변 여러분 중에는 동서남북 방위를 보고, 무슨 동쪽이 막혔으니까 이사를 못 가고 뭐가 어떻게 돼서 못 가고 그러는데, 뭐가 그렇게 못하는 게 많아요? 그렇게 피땀 흘려서 번 돈으로 몇만 원씩, 몇십만 원씩 들여 부적을 해서 부엌에 안 붙이나 마루에 안 붙이나, 방에 안 붙이나 대문 바깥에 안 붙이나, 베개 속에 안 넣나 요 속에 안 넣나, 몸에 지니고 안 다니나. 도대체 그게 뭐 말라빠져 죽은 겁니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여러분은 갈대같이 흔들립니까? 그것을 듣는 놈은 누구고 그렇게 말해 주는 놈은 누굽니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사람은 발바닥에 흙을 안 묻히고 다닌답니까? 자기보다도 더 부족한 사람들에게 물으러 다닌다면 귀신 짓이다 이겁니다.

사람이 마구니 짓을 안 한다면 마구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방생하러 다닌다고 놀부 짓이나 하는데 말입니다, 길을 오가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떠한 생명을 보거나, 길거리에 앉아서 돈을 달라는 가난한 사람을 볼 때 무주상 보시나 물질 보시의 방생을 해야 하고, 밥을 굶어서 애를 쓰는 가정이 있다거나 또는 학비를 못 내서 애들을 학교에 못 보낸다거나 이러한 문제가 있으면 십시일반으로 거둬서 줄 수 있는 그런 방생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이 왜 죽은 행을 합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생동력 있게 살아 있는 행동을 해야죠.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항상 흐뭇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고요.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죠?

마음이 너무 뾰쪽한 것 같아요

질문 가정에서나 친구 간에 저도 모르게 뾰쪽한 말이 나가서 상대를 아프게 만들어 버립니다. 속이 넓지 못하고 옹졸한 것이 돌아가신 할머니를 닮아서 그렇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데도 쉽지가 않습니다. 저의 내면 의식이 바꿔질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을 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그전에 제가 산중에 이렇게 돌아다닐 때 보니까, 바람이 휙 부니까 향기가 휙 나면서 꽃 속에 있는 그 꽃가루가 날아서 저쪽 나무의 꽃 속으로, 그 열매 속으로 들어가서 열매의 그 충을 다 죽이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묘한 겁니까, 세상에. 그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서. 그게 우연이라고 봅니까? 아닙니다. 대자연입니다. 거기 가서 그 꽃가루가 묻는 대로 그 충이 죽더라는 얘깁니다. 녹아서 물로 떨어져요. 죽으면 그게 인제 아침 이슬에 다 녹아 떨어집니다.

그렇게 서로 협동심이 있고 전부 조화를 이루고 사는데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고 삽니까? 한 가족에서도 서로 말로 뜯어야만 하고…. 그래서 항상 내가 말하죠. 말로 듣기 싫은 소리 하지 말라. 언제나 듣기 좋은 말 하면서 마음이 좋게 서로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살아도 다 못 산다. 이상에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천국이요, 이상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지옥인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듣기 싫은 소리 서로 하지 말고 안으로 굴려라 이겁니다. 안으로 굴려 놓으면 그 사람, 아까 그 꽃가루가 가서 충을 죽이듯이 바로 내 마음에서 그 마음속으로 밝음이 들어가서 그 나쁜 마음은 다 사라지고 녹아 떨어져 버려요.

그런데 왜 나쁜 말을 거죽으로 들이대고 해야 되느냐 이 소립니다. 그것뿐만 아니죠. 장사를 하거나 또는 어떠한 일을 하고 사는 과정에 의해서 지금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데도 말 없이 말을 하라 이겁니다. 생각으로써 모든 일들을 해 나가고 하지, 기껏 해 놓고도 말 한마디로써 그 쪽박을 깨뜨리는 수가 많습니다, 말 한마디로써. 마음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해 놓고서는 떡하니 말 한마디 잘못 불쑥 해 가지고는 그냥 홈빡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고 일을 망쳐 놓습니다. 이건 속 똑똑이가 돼야지 거죽 똑똑이가 돼서는 될 수가 없습니다. 똑똑한 것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 마음. 정직하고 건실하고 착실한 사람으로서 융통성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 이래야만이 이것이 진짜 불법이며 생활 불교며, 우리는 그 마음속에서 호국 불교도 나가고 호국 정신도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여건을, 자유권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지키고 또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조절을 해서 우리 국가를 지킬 수 있는 호국 정신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 하나가 나 하나를 이끌어 가지고 갈 줄 모르고 내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없는 그러한 좁은 마음으로 어떻게 사회를 이끌어 가겠습니까. 우리가 사회에 나가서 꼭 몸으로만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한마음 가짐가짐을 잘 갖는다면 우리 국가를 지킬 수도 있고 세계를 조절할 수도 있고 우주를 조절할 수 있어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대무변한 한 점의 마음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항상 끄달려 가면서 앞뒤를 재지 못하고 이렇게 나가야 합니까? 우리는 함이 없이 말을 하고, 들은 사이가 없이 듣고, 오고 감이 없이 가고 오는데….

놨는지 안 놨는지 의심이 갑니다

질문 큰스님 가르침대로 모든 걸 한마음에다 믿고 놓으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는데 아직 미혹해서 그런지 지금 제 자신이 놨는지 안 놨는지도 모르겠어요. 한참 믿었다고, 놨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 있게 놨는지 안 놨는지 의심이 갑니다.

답변 주인공에다 어떻게 놓느냐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말씀하신 거 내놓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지금 말씀하신 거 내놔 보시죠. 지금 말씀하신 거요. 어떠세요? 내놓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없죠? 그래서 놔진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모두 살아가면서 지금 여러분이 오신 발자취를 들고 오셨습니까? 지금 말씀하신 거를 들고 계십니까? 살아오신 거를 들고 계십니까, 모든 거요? 그게 습의 관념이지, 들고 계십니까?
그런데 뭘 또 ‘들었다, 놓쳤다, 못 놨다’ 이러십니까? 여러분이 이 물질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그 습, 관념에서 벗어나질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고정됨이 없이 놓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까 말한 것도 과거요, 그것도 벌써 놔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걸 놓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장가들어서 사는 사람들 가만히 보세요. 애가 “아버지!” 하고 덤볐을 때에 “그래.” 그러고 있는데 아내가 “여보!” 하고 들어오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라는 게 금방 없어지고 금방 남편이 돼 버렸습니다. “얘 아무개야! 아무개 있니? 나 좀 보자.” 아, 이러면 아들이 금방 됐습니다, 또. 남편이라는 게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어떤 거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공한 것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죠? 그러니 놓고 돌아가는 거지 그게 들고 돌아가는 겁니까, 예? 뭐를 놓지 못하고 뭐를 들고 다니고 뭐를 그럽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아온 그 관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그러는 것입니다. 좀 그 관념 속에서 벗어나시면 여러분이 훌륭하게, 이 진리를 탐구하고 실험자로서 체험해 가면서 연구할 겁니다, 아마. 이 종교라는 게 그대로 그냥 멋진 거예요. 아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멋진 이 종교, 불교란 얘깁니다.

분별심을 내지 않고 살아가려면

질문 근본에 항상 집중하려고 하고 오직 근본에 들이고 내는 생활을 해 나가려고 노력하지만, 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분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근기가 부족해서인지 24시간 분별하지 않고, 오직 근본으로만 들이고 내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들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분별심을 내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는지요?

답변 우리가 이 인간으로 살면서도 마음을 잘 쓰면, 잘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포함해서입니다. 여러분을 이렇게 겪어 보니까 그걸 너무도 잘 알겠어요. 이거는, 이렇게 보고 들이는 것도 자기가 하는 거고, 이 속에서 나오는 것도 자기한테서 나오는 건데 그거를 분리해서 자꾸 생각들을 한단 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주인공 속에서 나오는 것은 맞고 내가 생각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요. 그런데 내가 지금 현실에 생각하고 가는 것도 그놈에서 나오는 거요, 이 속에서 나오는 것도 그놈이 하는 겁니다. 들이고 내는 게 그놈이 하는 건데….

그것은 인제 왜 그러냐. 이 속에서 스스로 나오는 참자기의 뜻이 아니라면 겉으로 보고 사량으로 돌리는 게 어두워. 요렇게 요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요거는 이렇게 이렇게 할 생각이 돌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돌질 않으니 어떡합니까, 글쎄? 하나하나 이건 말로 이루장창 할 수가 없는데, “아이, 스님!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할 텐데 이렇게 이렇게 됐으니 어떡합니까?” 이러면 야, 내가 생각할 때는 자기가 분명코 생각을 해서 그렇게 한 건데 생각이 엉뚱나가게 돌아가고 있어요, 생각 자체가. 어떻게 사람으로 돼 가지고 생각이 그렇게 엉뚱나가게 안 나느냔 말입니다. 간단하게 해치울 것도, 간단하게 해치우면서도, 그것이 바로 거기서, 두 놈이 아니고 그 한 놈도 없다고 만날 말을 하는데도 아이, 그걸 두 놈으로 갈라놓고선 이건 사량이고 이거는 내 주인공이 하는 거라고 이렇게 생각을 한다 이겁니다. 주인공이 하는 것도 없고 내가 사량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 도리를 알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래야만이 사방이, 사방천이 밝아서, 참 스스로 오온이 밝아서, 칠보가 정말 가득 차 있어서 내가 그대로 자유권을 얻고 해야, 이것이 바로 시민권이거든요, 이게. 그래서 바로 용을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는 항상 이게 끄달린단 말입니다. 그리고 끄달리는 중에도 또 이런 문제가…. 예를 들어서 누가 남편이 일을 갔는데, 석 달 기한을 하고 일을 갔다 이겁니다. 그런데 “스님, 거길 가니까요, 애 아빠가 그냥 먹질 못하고 일은 고되고 그래서 아주 그냥 뭐 다 죽게 생겼어요.”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 그래서 그냥 갔던가?” 그러니까 “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어요? 여자로서, 아내로서 남편에게, 자식이든지 남편이든지 그걸 불문에 붙이고 그래, 가는데 먹지 못하는 거 번연히 알면서, 일 고되다는 거 번연히 알면서, 여기에서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벌어다가 그래도 예금통장에 조금이라도 넣고 사는 사람이, 그래 맨손으로 그냥 가? 아, 생각해 보세요, 글쎄. 아니,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갑니까? 그런 일에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간다면 다른 일은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도대체.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뚜껑과 이 통이, 똥그랗게 된 통은 똥그란 뚜껑이라야 맞고, 네모가 난 통이면 네모 뚜껑이 맞는다. 그것이 맞지 않는 거라면 세세생생에 이것이, 즉 말하자면 지옥이니라.” 이상이 맞지 않는 부부라면 이건 지옥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업을 짓는 거는 더 말할 수도 없거니와 돌부처도 돌아앉게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이 업 짓는 거는 자기네들이 맞지 않게 해 놓고 그렇게 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경험을 못하고, 경험을 쌓지 못하고, 물에도 들어가 보고 구덩이에도 들어가 봐야 그 깊이를 아는데, 여기저기 다 다니면서 자기가 체험을 해 보지 않은 데에서 나오는 어두운 마음이에요. 밝은 마음이라는 것은 자기가 체험해 보는 데서 무지한 밝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연구한다’ 이런 소리도 연구를 거듭거듭 하면서 얼마만큼 그걸 실패를 해 가면서 연구를 하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하면서도 자기가 자기의 뜻을 보려고 테스트하는 건 모르고, 어떠한 게 나타나면 그거 또 둘로 보는 겁니다. 아, 어디서 나올 틈이 없어요. 붙을 것도 없고 뭐 붙일 것도 없는데 어디에서 붙어 들어오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 자리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 자리에 다시 놓으면 될 것을, 이걸 둘로 보니까 집안이 형편없이, 자기 마음의 분신이 이것저것 생겨 가지고는 온통 집안에 우환이 끓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걸 태워 버리고, 우환을, 가난 또는 병고 이런 것을, 인연 업보 유전, 이런 거를 모두 떼 버리려면 나한테 나 자체가 없어야 됩니다. 붙을 게 없어야 돼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 자체도 없고 너 자체도 없고, 너다 나다도 없고 중생 부처도 없고, 이것은 이름이 부처요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그러셨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 내면의 진의를 몰라서 그냥 바깥으로 끄달리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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