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명심 사진가

육명심 사진가는… 193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1952년 대전사범대학과 1960년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전 대성고교와 서울 배재고교 영어 교사를 지낸 후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학) 사진과 대우교수로 부임했다. 1975년 신구전문대 사진과 창설 교수로 부임했고, 1981년에는 서울예술전문대학 사진과 창설 교수로 부임했다. 1999년 서울예술전문대를 정년퇴임 한 후 2년간 숙명여대 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다.
‘명심’ 이름 주고 간 선친은 스님
평생 못 보고 7세 때, 부음 들어
고독한 유년 살며 선친 그리워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종교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출가발심
어머니의 만류로 출가 못해

독특한 시선 한국현대사진 이끌어
아내의 혼수 카메라로 사진 시작
콘테스트 입상하며 사진계 입문
한 가지 주제에 오랜 세월 몰두
선과 닮아 ‘선사일여’ 깨달아
20여 년간 새벽 2시50분 기상 참선
마지막 주제는 1700년 한국불교


“선(禪)을 아는 사람이 시를 쓰면 그것이 곧 선시이고, 선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 그것이 곧 선화죠. 그리고 선을 아는 사람이 사진을 찍으면 그것이 선사진인 것이죠.” 50년 동안 사진가로 살아온 노장은 그렇게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열고 있는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 사진부문 첫 전시 육명심 전(2015. 12. 11~2016. 6. 6 과천관)’의 주인공 육명심(84) 사진가이다.
20여 년 동안 참선을 해오고 있는 그가 그동안의 작업을 통해 들은 한소식을 전한다. “선사일여(禪寫一如).” 선과 사진이 같은 세계라고 말하는 그가 그 한소식을 듣기까지의 이야기다.

사진집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실린 작품들로 티베트, 부탄, 라다크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여행자의 눈이 아닌 현지인의 눈으로 찍은 사진들이다.
그리움의 땅, 서방정토
“이 나라에서는 하늘이 곧 사원의 천장이다. 그리고 국토의 전역이 그대로 사원의 마룻바닥이다. 이렇듯 티벳은 마치 거대한 하나의 자연사원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일단 티벳에 입국하면 어디를 가나 우리는 사원의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셈이다.”

그의 사진집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하 ‘하늘과 땅이’)〉의 ‘들어가는 글’에 이어지는 흑백사진 속에는 흑백으로 치환된 티베트의 푸른 하늘이 천장처럼 드리우고, 작은 사원의 돌담 한 쪽이 광활한 대지와 이어진다. 그 대지 끝에서 카일리스산이 하늘과 이어지고, 그 능선에서 불어온 바람이 돌담 위에 걸린 오색 타쵸르의 염원들을 읽고 지나간다. 〈하늘과 땅이〉는 그가 1997년부터 작업해 온 티베트와 부탄, 라다크에서 찍은 사진들을 묶은 것으로, 그의 사진인생 50년을 정리하는 이번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은 작품들이다. 하지만 〈하늘과 땅이〉의 사진들은 그에게 있어 보다 더 특별하고 각별한 의미가 있다. 특히 티베트는 더욱 그렇다.

“내가 일곱 살 나던 해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당시 아버님은 출가한 스님이셨기에 절에서 다비식을 치렀어요. 아직 젊은 나이셨죠. 그리고 나선 어머님 손에 이끌려 저는 절에 가곤 했어요. 어느 날, 어머님께 여쭈었죠. 돌아가신 아버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어머니가 답하시기를 아버님은 아주 먼 서방정토로 가셨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 나라는 어디에 있냐고 다시 여쭈었더니, 어머니는 해가 지는 서쪽으로 가고 또 가면 그곳이라고 하셨죠. 그 후 저는 해가 지는 황혼녘이면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그 후 서방정토의 뜻을 알았고, 너무나 아득히 먼 곳으로 느껴졌어요. 좀 더 성장한 후에 불교의 세계에는 수미산이 있으며, 먼 서쪽 티베트에 수미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면 아버님이 가신 서방정토에 이르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품게 됐죠. 이때부터 티베트는 내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고픈 나라가 되었어요.” 그는 예순다섯 되던 해인 1997년에 처음으로 그리움의 땅 티베트를 밟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사진인생에서 또 하나의 시대를 만들기 시작한다. 선사일여.

그리움이 종교가 되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일곱 살 때 절에서 전해온 선친의 유품인 목탁과 표주박, 회중시계가 그가 경험한 유일한 선친의 흔적이다. 그의 선친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속리산의 한 암자에 사미로 출가했다. 세간에서의 명(命)이 짧을 것이라는 점괘 때문이었고, 그 운명을 비켜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친은 출가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의 선친은 삼형제 중 막내였는데 두 형님들이 모두 대를 잇지 못했다. 집안의 대가 끊길 판이었다. 선친은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환속하여 앞서 말한 어머니와 혼인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선친은 혼인한 지 반년이 채 안 됐을 때,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이름을 ‘명심(明心)’으로 지으라는 쪽지 한 장만을 남기고 집을 나간 뒤 소식을 끊는다. 후에 돌아온 선친의 유품이 절에 있었던 걸로 보아 선친은 출세간의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명심’이라는 그의 이름은 불가로부터 받은 불명(佛名)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로부터 불명을 받아 태어났으며, 그렇게 태어난 그의 몸과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는 불가적(佛家的) 내림이 깃들어 있었다.

우선은 아버지가 그리웠다. 분명 존재했으나 본 적이 없는 아버지. 본 적은 없으나 자신의 이름 속에 분명하게 관여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메시지가 불치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그를 불가의 마당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그의 종교는 그리운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며, ‘명심’이라는 그의 이름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절에 가는 일이 마치 학생이 학교에 가는 일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운 아버지를 보러 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을 이끌었던 그의 어머니 역시 그리운 남편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어머니의 종교 역시 그리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 여인은 남편이 그리워 절에 가야했고, 어린 소년은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종교는 그렇게 시작됐고 그렇게 완성되어 갔다.

작가는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보다 자연의 위대함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훨씬 더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루지 못한 출가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는 한 여인과 소년에게 어쩔 수 없는 ‘결핍’의 짊을 지게 했다. 그의 어머니는 행상으로 집을 나가있는 날이 많았고, 그로 인해 소년 육명심은 큰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다. 큰집이라고는 하나 친부모의 그늘과는 다른 그늘이었다. 밥은 먹었으나 사랑과 관심은 맛 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시대적 상황이 삶의 8할을 쥐고 있던 시절이었다.

친부모의 그늘에서도 꽃 같은 사랑과 바다 같은 관심은 쉽지 않은 시대였다. 소년 육명심은 외롭게 컸다. 어린 소년의 고독은 모든 것을 그립게 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져갔다. 그것은 그의 종교 또한 막연함을 벗어나 구체적인 종교로 커가고 있음이었다. 남다르게 심어진 종교의 씨앗은 이른 시간에 싹을 틔웠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출가에 대한 발심을 한다. 크레용으로 그린 부처님을 운동화 상자에 모시고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물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아들의 대답은 역시 ‘스님’이었다. 불가에 남편을 묻은 어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너져 내리는 듯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아들은 발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출가란 뼈저린 고독으로부터 온 메시지 같은 것이었다. 운명처럼 지니게 된 그의 불가적 모색은 또 다른 운명에 의해 갈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그때 이미 출세간의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깊은 고독으로부터 온 발심. 그것은 그가 이미 불가의 문자를 읽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이미 초등학교 5학년 때 출가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불가의 문자를 읽어낸 초등학교 5학년 육명심의 눈과 마음이 지금의 사진가 육명심의 눈과 마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그의 사진이 단순히 현실을 담아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지나간 시간의 여운과 다가올 시간의 짐작이 공존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그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예술의 영역이 그렇지만 특히나 그의 사진은 언어로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게 그의 사진이다. 언어가 있기 전의 자리와 언어가 지나간 자리에서의 ‘주고받음(소통)’이 그의 사진임을 볼 때 그의 사진세계를 만들어내는 그의 눈과 마음은 언제인지 모르나 불가의 문자를 읽어낸 것이 분명하다.

“사진은 표면의 기록이 아닌 대상과의 소통”
사진가 육명심은 한국 사진사(寫眞史)에서 예술사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던 1960년대에 사진을 시작했다. 서른셋에 결혼한 그는 아내가 혼수로 가져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는 카메라를 잡은 지 2년 만인 1966년에 제1회 동아국제사진살롱에서 입선하며 사진계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된다. 그 후로도 각종 콘테스트에서 여러 차례 입상한 그는 당시 국내 사진계의 주류를 이루던 리얼리즘 경향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 한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다루는 작업을 선보인다. 그런 그의 시선은 1980년대 한국현대사진의 본격적인 시작과 이어진다.

“사진은 표면의 기록이 아닌 사진에 찍히는 대상과의 소통이다”고 말하는 그는 국내 사진계에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이론가이자 독특한 교수법으로 걸출한 제자들을 길러낸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은 모두 흑백이다. 표면의 기록이 아닌, 대상의 궁극과의 소통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통과 교감을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낸다. 그가 색깔을 덜어낸 흑백을 고집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테마를 잡으면 몇 년에 걸쳐 그 한 가지 테마만을 찍는다. 아무리 좋은 그림을 만나도 정해놓은 테마에서 벗어난 것은 찍지 않는다. 〈백민(白民)〉, 〈검은 모살뜸〉, 〈장승〉, 〈예술가의 초상〉,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등 그의 시리즈는 그렇게 이어진 것이다. 그것 역시 제대로 된 소통과 교감을 위해서다. 오랜 시간을 두고 한 가지에만 전념할 때 그 대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서두에 말한 선사진에 대한 신념과 그가 불가의 문자를 읽어낸 증거를 볼 수 있다. 한 가지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 그것은 선으로 가는 길과 닮았으며, 불가의 문자와 닮았다. 그는 그렇게 사진을 하며 사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선사일여’라는 한소식은 결국 그가 50년 동안 걸어왔던 길이었다. 길이 다시 길을 내고 그 길이 또 다른 길을 내어 한소식에 다가간 것이다.

참선하는 육명심 사진가.
그는 1999년 서울예술전문대학에서 정년퇴임한 후 본격적으로 티베트와 부탄, 라다크 등 불교를 땅으로 삼고 있는 나라들을 찾았다. 그는 ‘선사일여’의 본격적인 시작을 〈하늘과 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테마는 ‘1700년 한국불교’라고 말했다. 〈하늘과 땅이〉는 한국불교를 찍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십여 년 간 티베트와 그 주변 지역들을 참 많이도 찾아다녔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제는 이 긴 여행의 자락을 접으려 한다. 중국 본토와 티베트를 잇는 철도와 도로가 잇따라 개통되면서 티베트 고유의 문화와 종교가 속절없이 파괴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경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도입된 물질문명이 이 신성한 땅을 무서운 속도로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중략〉 그리하여 그동안 이곳과 맺었던 인연과 추억을 한 권의 사진집으로 봉인한다. 아무쪼록 불국토의 나머지 나라들이 티베트의 비극을 되풀이함이 없이 그들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고스란히 지켜나가기를, 그래서 여기 실린 사진들이 지나가버린 날들의 한낱 전설로 남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가 1700년 한국불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이유도 위와 맥을 같이 한다. 이 땅의 밑그림이며 기둥이며 지붕 같은 1700년을 이 땅에 머물렀던 인연으로 회향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오늘도 새벽 2시 50분에 어김없이 눈을 떴다.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우주와 만난다고 했다. 매일 먼 우주에서 돌아와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또 다른 우주를 향해 나가는 그의 눈 속에 잔잔하게 한소식이 들려온다. “선사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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