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다 집어서 바로 내 근본에다 하나로 뭉쳐야!

우리가 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얕다 높다, 동이다 서다, 여자다 남자다,
잘못한다 잘한다, 모른다 안다 이런 거를 몽땅 놓는 것이 바로
선맥을 이어 나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어저께처럼 서로 질문 토론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마디 할 것은, 먼저 앵커리지에 들어오게 된 동기와 뉴욕에 이렇게 선원이 서게 된 이유입니다.

첫째는 세계 평화와 둘째는 우리가 세계 평화를 이루려면 바로 마음의 핵심이 불어넣어져야 모두 각자 여러분의 마음의 주장이 뚜렷하기 때문에 어디 세워 놔도 빛이 있다고 보며, 또 내 나라에 빛을 가져오는 그런 여건이 되며 또한 한마음으로 뭉치는 그런 단결을 한다면 그것이 예전의 비참한 역사를 다시 가져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인 것입니다.

셋째는 여기 와 보니까 교민 여러분이,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한마음으로 뭉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바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가 없고, 중심을 세워서 해 나가지 못한다고 볼 수 있겠죠.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불(佛)은, 불교라는 것은 진리의, 즉 말하자면 이름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름이면서도 실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언어죠.
우리의 중심을 세워서 해 나갈 수 있는 그 여건이 주어진다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세계 평화를 할 수 있는 그런 마음과 단결되는 마음과 또는 여러분의 주장자에 의해서 참으로 이 미국 사회에서도 여러 가지로 이익을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의 마음의 넓은 지혜가 아마 충만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린 단결이 없습니다. 여기 한국 사람들이 어째 그렇게 단결이 없고 믿음이 없는지, 그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주장자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남의 선에 서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좀 넓게 마음을 갖고 여유를 가져야 할 텐데 듣는 대로 보는 대로 자기가 자청해서, 남이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아랑곳없이, 그대로 불쑥불쑥, 자기 자신의 생각만 하고 단정을 하고 오해를 하고 이러는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공부를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여건이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의 도리를 알아야 하고 알아야 하기 때문에 바로 여러분의 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마음은 바로 여러분의 법신이니까요. 그리고 생명의 근본은 바로 불성이니까요. 여러분의 몸은 바로 화신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은 꼭 하고 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발전이 되고 우주적으로도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다는 건 지수화풍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서 자력이나 광력, 전력, 통신력이 우리의 재료로 충만히 갖추어져 있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재료가 돼 있기 때문에 다섯 가지 오신통이 여러분한테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재차 또 얘기하는 것은, 심안으로 보는 눈이나 심안으로 듣는 귀나, 즉 말하자면 무전통신기나 천체망원경이나 또는 탐지기나 또는 컴퓨터나 팩시밀리나, 이 다섯 가지를 말해서 오신통이라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서 바로 누진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지금 시쳇말로 레이더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들이고 내는 데 바로 그 역점이 있는 것이고 또는 통신하는 데 역점이 있고 결정짓는 데 역점이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앉아서 세계를 보고 앉아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도 있거니와, 판단을 하면 그냥 그렇게 법이 될 수 있는 여러분의 원력을 기르시라는 뜻이죠.

옛날에도 그렇게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서 불교는 탄압하고 유교를 가져왔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만방에 눈을 뜨지 못해서 우리 역사가 그렇게 왔고 우리 국민이 비참한 길을 걸어왔다고 봅니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발전이 되었지만 경제난도 그렇고, 모든 점에서 우리 한생각이 그렇게 우리나라에도 귀중하고 세계 평화에도 귀중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하나를 귀중하게 생각한다면 세계를 한마음으로 요리를 할 줄 알아야 바로 우리나라를 구제할 수도 있고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할 수도 있는 그런 여건이 됩니다.

여러분은 한국인으로서 타향에 와서 처음부터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조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며, 한마음의 사랑을 가지고 뭉쳐야 하며, 우리가 단결해서 선두에 나서야 하는 문제, 또 실생활의 행을 그대로 멋지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역군이 돼야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꼭 싸움터에 나가서 싸움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이 그냥 싸움터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평화롭게 사는 게 아니라 쫓고 쫓기고, 죽이지 않고도 죽이는 세상입니다. 이것이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싸움이 꼭 칼을 들고 싸워서만이 아니라 칼보다도 더 무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감안해서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한마음으로 뭉치지 않으면 안 되며, 뭉쳐야 바로 그 능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겨서 타인도, 타국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자비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모두가 생명 있는 것은 나 아님이 없고 내 모습 아님이 없고 바로 내 아픔 아님이 없고, 그 상대에게 고(苦)가 있다면 내게도 고가 아닐 수 없으니 이렇게 우리는 한 그릇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마당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도량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모두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은 한데 떨어지고 실천으로는 옮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도달해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지 막론해 놓고 한국인은 한국인이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한국인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종교가 달라도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 강당에 섰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불당에 섰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바로 이 미국의 땅에 서 있는 거고, 한국 땅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구라는 항아리 속에서 꼼딱거리면서 그렇게 지혜를 넓히지 못하고, 지구를 굴릴 수 있는 그 능력을 기를 생각은 안 하고 항상 조그마한 거 가지고 싸움이나 하고 조그마한 거 가지고 서로 뜯고 생활도 화합을 가져오지 못하는 이러한 국민이 돼서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돼서 되겠습니까? 불자라고 한다면 진짜 불자가 되십시오. 만물의 영장이 되십시오. 그리고 자유스럽게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사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것도 탓을 하고 저것도 탓을 하고, 이것도 원망하고 저것도 원망을 하시는 그런 분이라면 지옥은 항상 뒤따릅니다. 오간지옥이 뒤따르고 화산지옥이 뒤따르고, 불이 올라오면 화산지옥입니다. 그리고 병고를 가져오고 영계성이나 유전성이나 세균성, 모두를 자기가 자처해서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의식, 모습, 생명들도 바로 여러분이 마음을 나누는 까닭에 그 나라, 그 공장도 또한 파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내 안에 들어 있는 나라가 파워가 일어나고 난리가 나는데 내 몸뚱이가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러한 도리를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할 것이며, 어저께 그렇게 얘기를 했으니깐 잘 아시리라고 믿고 오늘은 또 얘기 안 할 겁니다. 나는 병을 고쳐 주는 사람이 아니고 의사가 아닙니다. 단 하나 있다면, 여러분이 여러분을 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그 핵심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어저께도 얘기했듯이 여러분이,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면서 모든 일을 커버해서 나갈 수 있는 그런 단계에 이른다면 영계에 끄달리지도 않고, 유전에 끄달리지도 않고 생사에 끄달리지도 않으며 또는 세균성이 나한테 들어서 모진 병에 휘달리지도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을 여러분의 주자가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가 이렇게 좋은 것을 모르고 국한된 미신의 종교로만 알고 기복에만 끄달려서 애를 쓰는 그러한 불자가 돼서는 아니 되십니다. 한국의 선원에서도 기독교나 가톨릭교 어떤 교라도, 원불교든 어디든지 다 모입니다. 왜 모이느냐? 나는 둘로 보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가지 말라 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왜냐? 우리가 어떠한 종교를 믿든지 우리는 한마음으로서 사랑을 주고받는 그런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내 종교 네 종교 하는 것이 어디 항아리 속에서 있을 법이나 한 일입니까? 걸상 몇 개 놓고선 내 걸상 네 걸상 하고 항아리 속에서 아무리 싸워 봤던들 그 항아리 전체는 굴릴 수 없는 까닭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다면 좀 더 여유 있게 큰마음을 가지고 또 지조가 있고 야망이 있고 그렇다면, 이 세상을 다 집어서 바로 내 이 근본에다가 하나로 뭉친다면 이 세상을 다 들이고 내고 굴릴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되실 겁니다. 어떤 사람은 단전호흡을 한다, 명상을 한다 좌선을 한다 이러지만 여러분이 앉으면 좌선이요, 서면 입선이요, 생각을 하면 참선이요, 모두가 참선 아닌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하되 안방도 도량이요, 법당도 도량이요, 기독교 믿는 사람은 강당이 바로 도량이다 이겁니다. 그거는 부정 못하겠죠.

지난번에도 케네디 대통령 묘지에 갔을 때도 불이 활활 일어납디다. 그것은 무슨 증거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라는 증거죠. 사대는 흩어져서 없어졌다 할지라도 그 영혼만은 영원하다는 그런 뜻에서 불은 언제나 이렇게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니 네 탓 내 탓, 네 종교 내 종교를 나누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떻게 폭넓게 자비를 베풀며 사랑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유(有)의 법으로도, 우리가 생활에서 부진한 일이 있어서 도와주더라도 이름을 내려고 하지 말고, 그 사람의 얼굴도 생각해야 하는 점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은근히 왼손이 하는 거 바른손이 모르고, 바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도록 그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면 전달되는 대로 보시를 해서 돕고, 물이 없는 데서 사는 고기는 물에 넣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물에서 잡느라고 죽이고 담아 놨다가 죽이고, 물에 던져서 그것이 저희 집 찾아가느라고 죽고 이런다면 그거는 바로 마구니가 하는 짓입니다. 스스로서 봤을 때 스스로서 행하는, 진정한 사랑, 진실한 사랑 그것이 바로 자비가 아닐까요? 무심으로서 무주상 보시를 하며 영원히 벗겨 줄 수도 있는 것이며, 그 오간지옥에서 허덕거리는 그러한 죽은 사람들, 죽은 마음들, 또 산 사람들의 허덕이는 그 마음들을 만약에 그 죄 속에서 벗게 해 준다면, 한마음이 돼서 녹여 준다면 바로 그것이 대 사랑인 것이고 무주상 보시인 것입니다. 또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살면서 남이 모르는 괴로움과 가난을 어찌할 수가 없는 그런 분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내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도왔다.’ 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그런 아량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참보시요, 그것이 바로 참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발짝 한 발짝, 어려서부터만 걸어온 게 아니라 수억겁 광년을 걸어오면서 쫓고 쫓기면서 먹히고 먹고 하면서 그 아픈…, 그 피를 삼키면서 피를 흘리면서 한 발 한 발을 디뎠습니다. 지금도 딛고 갑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고, 무엇으로도 씻을 수가 없는 것이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가 따로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죽고 살고 변하고, 무상한 이 세상이 바로, 끝없는 이 세상이 바로 불교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바로 그 핵심을 믿고, 즉 말하자면 원소를 믿고 그렇게 나갈 수 있는 분이라면 바로 자기 핵심을 찾고, 핵심을 찾음으로써 ‘이 세상이 둘이 아니로구나!’ 하는 뜻을 알고 ‘이 세상은 고정됨이 없이 둘이 아니게 나툼이 있구나. 바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면서 조화를 이루고 이 세상이 그렇게 우주와 더불어 돌아가는구나!’ 하는 거를 느끼고 알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생깁니다. 이것은 사실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부입니다.

여러분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심각하죠. 어떻게 생각하면 여러분한테 다 못하는 말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앉아서 자기가 만 명이 돼서, 만 명을 원하니까 만 명이 돼서 중생들에게 응해 주셨다 할 때 똑같은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응해 달라는 대로 응해 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돼 주시고 ‘예수여!’ 하면 예수로 모습을 보여 주시고, ‘부처님!’ 하면 부처님으로 보여 주시고, ‘지장보살!’ 하면 지장으로 보여 주시고, 칠성으로 원하면 칠성으로 보여 주시고 ‘용신!’ 하면 용신으로 보여 주시고, ‘지신!’ 하면 지신으로 보여 주시고 ‘신중!’ 하면 신중으로 보여 주시고, 이렇게 여여하게 생사윤회에도 아무 까닭 없이 끄달리지 않으시면서 그저 여여하게 여러분한테 응해 주신 그분의 그 뜻이 바로 우리들한테도, 깨달으면 그분의 그 마음자리와 같은 자리요 같은 도량이요 같은 다자탑의 방석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질문을 듣는다고 그러면서 내가 괜히 앵무새처럼 이러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요, 앵무새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말을 잘 못하지만 제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것은 말의 음파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전력이나 광력 자력과 통신력도, 그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통신도 더불어 같이 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할 겁니다.
나는 다짐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난 다시는 머리를 안 깎겠다고요. 중노릇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물속에 들어가서 빠져야 여러분을 물속에 끌어넣을 수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내가 왜 자리를 지키며 이렇게 돌아다니는지, 여러분처럼 뭐 바람을 쐰다 어쩐다 한시반시도 이런 여유도 없이 그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 분이 오신다 하더라도 그것을 신뢰하고 그것을 참답게 내 아픔처럼 생각하고 그 자리를 지켜 주는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죠. 그 가정이 바로 내 가정이기 때문이죠.

질문하실 분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이 그러하며 어떻게 해야만이 그것을 다 커버하고 나갈 수 있나. 어저께 재미있는 얘기 했죠? 여러분 배 속, 이 몸속이 전부 팥죽 그릇이라고, 팥죽 솥이라고요. 팥죽이 끓는데 그 부글부글 끓는 그 방울방울이 나오는 대로 속아서, 그냥 거기에 매여서 그저 들으면 듣는 대로 그런 팥죽 방울 일어나듯이 일어난다고요. 그런데 어느 선승이 “요것도 고놈! 요것도 고놈!” 하면서 다 그렇게 주자로 치고 나니까 황! 그릇이 뚫렸답니다. 바로 그렇게 해서 어느 중은 앞뒤 뚫린 대피리를 불면서 코끼리를 타고 온 누리를 누볐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그렇게 안 해 보시렵니까? 허허허, 그럼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자1(남) 제 질문은요, 한편으로는 불성을 지닌 인간이라고 그러고, 또 한편으로는 무명에 휩싸이는 그런 인간이라고 그러는데요, 그 두 가지의 개념이 잘 조화가 안되는 것 같아요.

큰스님 조화가 왜 안돼요? 요런 걸로 비유해 봅시다. 나무가 큰 나무가 있고 작은 나무가 있죠? 왜 작은 나무라고 했고 왜 큰 나무라고 했을까요? 왜 고목이라고 했고. 왜? 왜 그런 단어가 나왔고 그런 말이 나왔죠? 그리고 산은 높고 낮다고, 얕은 산이 있다고 왜 그런 말이 나왔습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바로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이 없다면 얕은 산도, 얕은 산이라는 그 언어도 나오지 않았을 거고, 또 얕은 산이 없다면 높은 산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넓게 따지고 본다면 ‘얕은 산도 얕은 산이 아니요 높은 산도 높은 산이 아니니라.’ 이랬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생의 천차만별의 생명들이 생명이 있는 거는 다 불성이 있는 법인데 어째서, 어째서 그것이 어우러지지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봐도요, 저 풀도 길고 짧고 길고 짧고 그럽디다, 저게. 똑같이 잘라 놨는데도 먼저 쓱 나오는 게 있고 그래요. 그런 것도 어우러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깐 우리가 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얕다 높다, 동이다 서다, 여자다 남자다, 잘못한다 잘한다, 모른다 안다 이런 거를 몽땅 놓는 것이 바로 선맥을 이어 나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만한 거 하나 다 나한테서 나온 거니깐 바로 나한테서 해결하고 나한테서 잘된 거니까 나한테다 감사하고, 내가 갔으니까 남을 원망할 게 아니라 내 탓이고, 이렇게만 한군데로 뭉쳐 놓는다면 이 세상을 다 가질 게 없고, 또 그 한군데로 뭉쳐 놓는다면 나중에는 자기를 홀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는 ‘아이고, 알고 보니까 하나도 버릴 게 없구나. 나 아님이 없구나. 아, 어저께 오늘이 따로 없고 하나가 따로 없고 만이 따로 없구나.’ 이렇게 알게 됨으로써 부처님이 행하시는 중용처럼, 실상처럼 그냥 이걸로도 나투시고 저걸로도 나투시고 한 찰나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저 보살의 마음속에 한 찰나에 들었다 한 찰나에 그 좋은, 귀중한 설법을 하고 나시고 그러거든요.

그러니 그게 삼천 년 전도 지금도 꾸준히 이렇게 평등하게 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안된다고요? 하하, 그렇게는 생각지 마세요. 하다못해 기어가는 버러지도 생명이 있는 거는 다 불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도요, 만약에 옛날의 선조들, 선사들 같으면요, 나라에 싸움이 일어난다거나 그런다면 이 꽃 이파리 한 이파리 한 이파리를 군사로 만들어서 보낼 수도 있다고 그랬어요. 그것이 바로 이보경계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급하니까 마음을 내는 게 이보예요. 한 발 내려딛는 거를 말해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나라의 국민을 다 죽게 만드는 그런 이치가 있다면 땅속에 있는 무기들도 전부 녹이 슬게 딱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법이고요, 중단시키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 다 내 부처님의 마음이 돼서 보살이 돼 가지고 다 그 마음으로 다듬어서, 그런 마음이 생기게 해서 일을 만들어 놓고 행하게 만드는 겁니다. 또 너무 국민들한테 나쁘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르고 자기가 손발 들고 나가게 만들고 그러는 거지, 누가 말을 하고 때리고 갖다 가두고 이런 게 없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법을, 이렇게 광대무변한 법을 어째서 우리는 외면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왜 외면을 합니까? 제일 중한, 자기 아픔을 거두어 주는 그 자기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저기 나가시다 엎드러져 보세요. 무르팍이 깨져 보세요. 벌써 거기 손 가는 건 남의 손이 가는 게 아니라 ‘어이쿠!’ 그러고선 ‘아파!’ 하곤 그 손이, 바로 십대 제자가 거기 갑니다. 허허허,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이 십대 제자뿐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무슨 질문을 나중에 했죠?

질문자1(남) 무명의 근원지가 어딘지요? 무명이 과연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건지 그 질문이었습니다.

큰스님 한마디를 하면 봇장이 울려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니깐 또 그런 질문도 나옵니다만, 우리가 지수화풍이라는 그 소리를 부처님께서 왜 자꾸 하셨고 우리도 자꾸 하는지, 이게 지금 전체가 지수화풍 아닌 게 없습니다. 근데 그 지수화풍이, 즉 말하자면 바람과 흙과 물이 한데 합쳐서 혼합이 되니까 온기가 생겼어, 불이. 온기가 생겨서 그것이 바로 생명의 근원지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 딴 데 가서 찾지 말고, 그 근원지가 됐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몸으로 낳게 만들었거든. 그리고 ‘몸속에 너희가 역대에 거쳐서 진화돼서 올라온 그 자체의 근원지를 봐라.’ 하고 인연에 따라서 그 근원지에 미생물이나 모든 모습도 갖가지로 그 몸속에 다 두고 있어요. 그리고 나올 때 물주머니로 나오게 만들었죠? 어떻습니까? 지수화풍의 근원지라 이겁니다.

또 지수화풍의 근원지면 우리는 지수화풍의 근원지를 가졌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살아요.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이 세계가 발달할 수도 없고 연구할 수도 없거니와 과학이라는 그 소리가 안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끝 간 데 없는 진리가 될 수도 없거니와 풀 한 포기만 살아도 불교가 그대로 있다는 그 사실을 아마 모를 겁니다. 그럼 또 질문 없으십니까? 잘못됐으면 항의하세요, 나도 배워야죠. 허허허….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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