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산 김매순
11. 대산 김매순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6.01.1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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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유람하며 만년 보낸 문장가

주자학 기반, 실학에 관심 많아
다산·초의와 교류… 親불교 성향
말년 설사병 심해 산사서 머물러
화장사 머문 기록 ‘유화장사기’
당시 사찰 문화·음식 아는 사료

▲ 화장사의 극락보전. 현재 동작구 국립현충원 내에 있다. 이곳에서 김매순은 말년을 보내며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조선 후기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은 초계문신(抄啓文臣)이었으며 홍석주와 함께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로 칭송되는 문장가이다. 김창흡(金昌翕)의 후손으로, 179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그는 검열(檢閱), 사인(舍人)을 거쳐 예조 참판, 강화유수에 오르는 등,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지만 변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사후에 판서로 추증되었다. 그의 자는 덕수(德?)이며 대산(臺山), 석릉자(石陵子), 풍서주인(風棲主人)이라는 호를 썼으며 〈대산집〉과 〈주자대전차문표보(朱子大全箚問標補)〉를 남겼다.

학문뿐 아니라 덕행에도 괄목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권상하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가 ‘승지 정약용에게 답하는 글’에서는 주자(朱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아울러 자신의 학문의 치밀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기도 하였고, 그의 의리 판단이 깊고 단단함은 ‘한음(漢陰)과 백사(白沙) 두 공의 일을 논함’에서 드러냈다. 그는 문도합일(文道合一)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한편 학문의 목적을 위선(爲善)에 두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입본궁행(立本躬行)을 중시하였으며, 호락논쟁(湖洛論爭) 양설을 비판, 절충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문(古文)에 밝았던 그는 문장을 짓는 재주뿐 아니라 비평에도 능했고 제문(祭文)을 잘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는 다산 정약용과 인간적인 만남뿐 아니라 학문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는 그의 이용후생이나 경세(經世)에 관심을 보였던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그가 대흥사 승려 초의와 교유했던 것은 다산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은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초의가 두 번 째 상경 길에 오른 이듬해(1831년)에 용호(蓉湖)의 김매순 집을 찾아 시회를 열었던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초의는 김매순과 친분이 있었던 능산 구행원(綾山 具行遠)과 문산 이재의(文山 李載毅, 1772~1839) 등을 만나 서로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실제 김매순은 주자학에 밝았던 인물이지만 적석사(積石寺)나 백운사, 분황사, 화장사(華藏寺)를 유람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또한 불교를 이해하려 했던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적석사를 찾아가던 길에 지은 ‘심적석사도중호운(尋積石寺道中呼韻)’은 다음과 같다.

추풍 속에 작은 무리(小隊秋風裏)
긴 언덕의 좁은 길에 늘어졌네(厓蹊十里懸)
들쭉날쭉 떨어질 듯한 풍경에 의지하여(參差攀落景)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네(??望諸天)
길을 따라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訟許沿途聽)
절에 이르자 시기(詩期)가 원만해지네(詩期到寺圓)
서리 맞은 벼, 반쯤 거두었고(霜?垂半穫)
굽이 굽은 평원을 보네(曲曲見平川)
- 〈대산집〉권3

실제 적석사는 어디에 위치한 절이었을까. 불교와 관련된 사이트를 찾아보니 적석사는 서울 삼각산에 위치한 절과 고찰인 강화 소재 적석사가 있다. 하지만 굽이 굽은 평원이 보인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찾았던 적석사는 강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때는 가을이었던지 “서리 맞은 벼, 반쯤 거두었다(霜?垂半穫)”고 하였다.

지금의 흑석동에 위치했던 화장사를 찾아 유람하던 때를 그린 ‘유화장사기(遊華藏寺記)’는 장문(長文)의 글이지만 말년에 그의 일상이 소상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그가 〈금강경〉을 읽었다는 사실과 화장사에서 차를 다려 마셨던 정황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그와 함께 유람했던 유신환(1801~1859)은 그의 제자로 성리학에 밝았던 인물이었고, 김상현(1811~1890)도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 이름을 드날린 인물이다.

이 글에 의하면 그는 1839년 가을부터 설사병에 걸려 다음해(1840) 봄까지도 거동이 어려웠다고 하였다. 유신환(1801~1859)과 김상현(1811~1890)의 유람 소식을 듣게 된 그는 자신의 병을 의술로 치료할 수 없다고 여겨 과감하게 화장사 유람을 떠난다. 그 전후 사정은 ‘유화장사기(遊華藏寺記)’에 자세한데 중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겸재 정선박물관에 소장된 동작진도. 화장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울창한 산택(山澤)에서 답답함을 푸는 것이 인삼이나 복령보다 나을 듯하지만 병든 몸을 생각하면 멀리 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노량 나루를 건너 남쪽으로 화장사가 있는데 유경형(兪景衡:유신환(兪莘煥))과 김위사(金渭師:김상현(金尙鉉))가 함께 행장을 꾸려 하룻밤을 자고 오기로 약속했지만 비바람 때문에 두 번이나 약속이 어그러졌다.(山澤宣? 蔘笭不如 顧病軀不堪遠適 聞鷺渡南 有華藏寺可遊 約兪景衡 金渭師被一宿 風雨再愆期) 4월 초 삼 일에 안개가 사라지고 햇살이 퍼져 청명하고 따뜻해져 사람에게 알맞았다. 두 벗이 소매를 펄럭이며 나란히 우리 집에 이르니 이미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날아오를 듯한 마음이 들게 하였다.(孟夏初三 ?開旭舒 ?可人 二友聯翩踵門 已令人僊僊有飛?想) 〈중략〉 내가 분연히 말하기를 ‘나는 갈 것이다’고 하였다. ‘그대들은 젊고 씩씩하여 병이 없으니 이에 늙은이 때문에 움직이기를 꺼리는가’라고 하였더니 모두 껄껄 웃었다.(余奮曰吾則往矣 君輩少壯無病 乃憚爲老夫一動耶 皆粲然而笑)

나는 가마를 타고 위사는 말을 탔으며 경형과 인아는 걸었다. 두 노복은 무거운 짐수레를 맡았는데 간장 한 항아리와 쌀 한 자루, 붓 한 자루와 먹 하나, 당전(중국 종이)수 십 번, 동파시집 두 질이다.(余轎渭師騎 景衡及寅兒徒 二僕領輜重 醬?米 一管一墨 唐箋數十番 東坡詩二) 나와 김상현은 먼저 어귀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곧바로 건넜다. 물은 거울처럼 고요했다. 용양정 아래에서 섶을 깔고 앉아 일행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余與渭師先至津頭 刺船徑度 水面如鏡 班荊龍?亭下 候一行齊到)

김상현이 하인과 노새를 도성으로 돌려보냈는데 산길은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을 따라 왼쪽으로 가서 흑석촌을 지나 험준한 산길을 올라 몇 리 쯤 가니 처마와 기와가 나타나고 절 문의 액자를 분별할 만하였다. 몇 승려들이 나와 길을 안내하여 불이정(不二亭)에 올라 자리를 깔고 앉기를 청했다.(渭師遣奚驢入城 以山路不容騎也 循山而左 歷黑石村 登頓崎嶇數里許 ?瓦出而寺門額字可辨 衲子數輩迎導 登不二亭 布席請坐)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니 고운 봉우리가 오른 편을 감싸고 맑은 강이 왼 편에 갈라져 흘러서 비록 굉장한 장관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하더라도 참으로 보배로운 절이라고 일컬을 만하였다. 조금 있자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였는데 그 형색을 보니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숨을 할딱거리며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하였다. (憑軒四眺 嫩崗右? 澄湖左坼 雖乏鉅觀 洵稱寶坊 有頃諸人至 視其色 視汗帶喘 手紛紛?也)

두 벗이 별도로 국수와 막걸리를 가져와 아랫사람들도 넉넉하게 줄 만하였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사나워져서 불이정에서 내려와 천천히 돌아서 작은 두 개의 사립문을 지나니 주지 실이 나왔다. 방의 창살은 단정하고 그윽했으며 대자리는 깨끗하였다. 감실에 금부처 하나를 모셔져 있고 아래에는 향을 피우는 오래된 동 향로가 놓여 있는데 모양은 작으나 주루(雕鏤)가 매우 정밀하다. 패엽(불경) 수질이 오른쪽에 서가에 놓여있었다.(二友別齎?麵 有?逮下 向夕風? 下亭折旋穿過兩小扉 丈室在焉 房??深 ?淸楚 龕供金身一尊 下安焚香古銅? 體小而雕鏤甚精 貝葉數帙架其右)

동쪽 담장 아래에 복숭아나무 5~6주가 바야흐로 만개하여 울긋불긋하게 어리비치고 있었다. 뜰은 넓지 않은데 포도나무 덩굴과 석류를 심은 화분, 아름다운 꽃나무와 괴석들이 치밀하게 늘어놓았는데 종류마다 극품이다. (이)모두가 장로 정심이 조금씩 장만한 것이다.(東墻下 桃花五六株方盛開 緋碧交暎 庭不彌畝 葡棧榴盆 嘉卉怪石 布排纖密 種種有致 皆長老淨心積累?)

(장로와) 더불어 말하니 순진하고 근실함을 취할 만하였다. 조금 있으니 밥이 들어왔는데 밥은 완두콩을 넣어 지었고 반찬은 다시마인데 삶고 데친 것이 법식에 맞아 향기롭고 기름져서 좋아 고기처럼 느껴졌다. 반 그릇을 먹었는데도 배가 부르니 예전에는 경험하지 않았던 일이다. 샘물을 떠서 입을 헹구니 달기가 제호와 같았다.(與之語 醇謹可取 少焉飯入 厥羞淮豆 佐用海組 煮中式 芳?當肉 半鉢膨 得未曾有 酌泉嗽齒 甘比醍?)

빨리 차를 다리게 하여 즐겁게 (차)한 잔을 마시고 다시 나가 불이정에 올라 소요하니 홀연히 엷은 흰 빛이 옷에 어렸다. 위를 쳐다보니 숲 끝에서 솟는 달이 밝고 맑은 달빛을 뽐냈다.(?令茗 痛?一? 復出亭上逍遙 忽有微白生衣 仰視新月出林 娟娟弄輝)

〈중략〉 밤이 얼마나 깊은지를 묻자 정심 스님이 밖에 나가 별을 보고 돌아와 말하길 산중엔 종루가 없어 사실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우나 대략 오경(새벽4시경)무렵인 듯합니다. 내가 말하길 내가 피곤하지 않지만 기운을 거칠게 하지 말라는 것이 옛 사람의 교훈이다.

〈중략〉 마침내 각각 베개를 가지고 돌아누워 깊이 잠들었다. 아침 해가 창문이 환하게 비치자(問夜何其 心師出戶看星還報曰山中無鍾漏 難質言 約莫五更天氣 余曰我不爲疲而無暴其氣古訓也 遂各就枕 熟寐一輾 ?炯炯暾矣) 일어나 세수를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서쪽 작은 요사채에 앉아서 밤사이 지은 시를 읊조리는 소리가 귀에 가득한데 소란하여 불편하였다. 시렁의 〈금강경〉 한 질을 꺼내다가 잠잠히 앉아 이리저리 뒤적이니 심오하여 아는 것이 적어서 이해되지 않는 곳이 많았지만 아는 것은 종종 분명하게 깨우침이 있었다.(起而?洗 諸人方在西小寮 賦夜間所拈韻 吟?盈耳 攪之不便 取架上金剛經一卷 默坐披? 奧晦多難通而其可通者往往?然發省)

이미 그가 병환이 깊었던 사실은 ‘유화장사기(遊華藏寺記)’에서 확인된다. 그의 졸년(卒年)이 1840년이다. 따라서 그는 화장사를 다녀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듯하다. 아무튼 그는 화장사의 장로 정심 스님과 하루 밤의 인연을 맺었고 〈금강경〉을 읽으며 “심오하여 아는 것이 적어서 이해되지 않는 곳이 많았지만 아는 것은 종종 분명하게 깨우침이 있었다”고 한 사실에서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승려 정심의 수행 일면이나 사찰의 규모 이외에도 음식의 면면을 살펴 볼 수 있고, 당시 유자(儒者)들이 산천을 유람할 때 차를 휴대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 셈이라 하겠다.

화장사의 극락보전. 현재 동작구 국립현충원 내에 있다. 이곳에서 김매순은 말년을 보내며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겸재 정선박물관에 소장된 동작진도. 화장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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