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해서 체험을 한 번씩들 해보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거예요.
그러니 살기 위한 욕심으로, 가난 때문에, 병고 때문에, 잘 살아야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것 때문에 이 공부 하지 마세요. 진짜!

자유스럽게 살아가려면
질문 큰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금방 제가 부처가 될 것만 같고 하늘을 날 것 같고 그런데 실생활 속에서 저의 모습을 지켜보면 너무도 부족하기 그지없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해서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큰스님처럼, 부처님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답변 이거 보세요. 부처가 되려고 하지도 마세요. 이 세상에 부처가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답답한 마음이 또 생길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대로, 못났든 잘났든 그대로 그냥 수순히 걸어가세요. 그냥 딱 세우곤 입 딱 다물고 그냥 걸어가다가 딱 닥칠 때 ‘네가 하는 거지.’ ‘너!’ 하고선, 말 안 해도 ‘너!’ 할 때 그건 그냥 그대로 깜짝할 사이예요. 그러니 재생이 돼서 체가 나올 때는 거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있겠지만 자동적으로 불이 확 붙어서 끓는 쇠가 돼 가지고 직접 바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한 마음으로 이 도리를 어떻게 공부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살기 위한 욕심으로, 가난 때문에, 병고 때문에, 잘 살아야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것 때문에 이 공부하지 마세요, 진짜! ‘안 돼! 이거는 어떠한 억겁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하란 말입니다. ‘안 돼!’ 하면 그냥 안 되는 겁니다. 이게 이렇기 때문에 왁 소리를 지르고 그랬어요. 그러곤 그냥 손을 번쩍 쳐들어서 그냥 쳤단 말입니다. 이게 진짜 깊은 물이 되기 때문에 큰 배가 뜰 수 있고, 큰 배가 뜰 수 있기 때문에 거기 중생들을 다 태울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서 그 쓰리고 아픈 상처를 아물리고, 내 몸에 들어 있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해서 천백억화신으로 들락거리면서 나와 남을 위해서 일하고,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전 세계를 융화시킬 수 있어야겠죠. 전 세계를 융화시키고 건지려면 또 우리가 집을 잘 지켜야 합니다. 지구 집을 잘 지켜야 하는 것도 우리의 소임이다 이겁니다. 우리의 집이니까. 내 몸도 그래요. 여러분이 부모에게 뼈를 받고 살을 받았는데 인간이 돼 가지고 진짜 사람이 못 된다면 어떻게 효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잘해 드리고 잘 입혀 드리고 그래서가 아닙니다. 내 몸을 잘 간직해서 건강하고 진짜 인간이 됨으로써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거다 이겁니다.

어느 부모든지 자식이 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어디가 병들었다 그런다면 얼마나 아파하는지, 그거는 자식들 입장에선 생각조차도 못할 겁니다. 나가서 다녀도 좋은 게 없고 아무리 우스운 일이 있어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 그런 부모가 돼 버리고 맙니다. 이게 효도입니까, 어디? 그러니까 막 굴리지 말라 이거죠, 젊은이들도. 자기 몸 막 굴리면, 자기 생각대로 막 굴리면 그건 효도도 못할 뿐만 아니라 충성도 못하죠. 또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그랬잖습니까. 자기 몸에 들어 있는 자기 중생을 제도 못할 땐 자기 집이 있으나 마나죠, 그거. 제도 못하면 자기 집도 망가지지, 자기 집 속에서 사는 자기의 의식들도 다, 인연들도 다 그냥 끊어지는 겁니다.

미래의 정신세계가…, 미래라고 그러니까 미래지 여러분이 정신세계를 지금 이 자리에 가지고 있고, 과거 자리도 이 자리에 가지고 있어요. 현재의 자리가, 미래, 과거 자리가 현재로 돼 가지곤 돌아가니까, 불바퀴처럼 돌아가니까, 바로 법바퀴가 여러분이 공(空)해서 자꾸 돌아가니까, 끊임없이 돌아가니까,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에 끄달리지 않고 그런다면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요, 오늘이 바로 영원한 그날입니다.

출가와 재가의 차이
질문 우리가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해서 공부하는 것과 그냥 살아가면서 공부하는 것에 차이점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본인의 근기와 마음에 달려 있겠지만 무엇이 다른지 궁금합니다.

답변 무엇이 다르냐 하면은 예전에도 그 살림을 해서 애를 낳고 이럭하고선 입산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건 왜냐하면 그분의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그분들이 이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깐 이게 나고 죽고 이런 생사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고, 모든 걸 떼기 위한 방편으로서 그 자식을 낳곤 그래 가지고 그거를 떼게 되면 그냥 자식도 다 버리고 그냥 입산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분들이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그러한 인연을 가졌기 때문에 좀 그거는 갚아야 되겠다. 물질로다가 이렇게 줘서 갚는 게 아니에요. 요다음에 그것이 다 불어서 그 값어치가, 즉 말하자면 선생님 노릇을 했는데, 제 아버지의 선생님 노릇을 했는데 선생으로 가르친 값을 못 받았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나중에 그 선생님 값을 다 받게끔 하고도 넘친다 이 소리죠.

그러니깐 지금 현재만, 죽는다 산다 이것만 가지고 야단들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러다 잘못되면 유전이 되고 그럽니다.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 사는 게. 그러니깐 유전되지 않고 그냥 곱게 부모도 다시 환생하는 이치가 돼야 되겠죠. 그러나 이거 환생을 하려고 중들이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이지 에너지 주장자로서의 땅과 하늘을 그냥, 허공신으로서 그 공신이 돼서, 공용이 돼서, 공심으로서 공체로서 이 모든 사람 요만한 거 하나, 지구의 권리 있는 것들은 생명체를 위해서 다 살고 이렇게 하죠. 때로는 자기의 모습을 그냥 돌로 만들든지 때로는 물로 하든지 때로는 산으로 하든지 때로는 뭐 아무걸로나, 따뜻한 태양으로 해도 되고, 그 모두를 걸림 없이, 자기 집을 때에 따라서 찰나찰나 바꿔 가면서, 그렇게 살기 위함입니다, 자유스럽게. 그런데 그렇게들 자유스럽게 못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말입니다.

아버지의 병이 빨리 쾌유되려면
질문 저희 아버지가 한 달 전에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관을 해야 아버지의 병이 빨리 쾌유될 수 있는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우리가 나무가 있으면 뿌리가 있듯이 뿌리가 있으니까 살지 뿌리가 없으면 못 살아요. 그렇듯이 우리 사람도 뿌리와 같은 겁니다. 뿌리가 달린 거죠. 그래서 달마 대사도 그 모두 알라고 신 한 짝을 주장자에다 걸고 돌아가셨는데 신 한 짝은 거기 두고 한 짝만 걸고 나오셨지요,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와 같이 신 한 짝은 항상 이 원소가, 자기 생명력이 붙어 있어서 살듯이 그냥 항상 있어요. 죽어도 그건 있는 거고 살아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아버지가 진짜로, 죽는다 산다를 떠나서 그냥, 나를 그냥 패대기쳐서 버리고 그냥 믿으시게 하라는 겁니다. 나란 모습은 누구나가 다 공했습니다. 이 생명의 원소는 영원히 살지만 이 모습은 공해서 항상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깐 이 모습이 살게 하려면 바로 자기 주인공의 심부름꾼이 되면서 진짜로 자기가 마음을 다 놔야 돼요. 아버지께 ‘너만이 살릴 수 있어!’ 하고 지극하게 관하시라고 말씀드리세요.

우주떡의 장 수에 대해서
질문 선원에서 재를 지낼 때 우주떡을 올리는데 1장, 3장, 5장, 7장 그렇게 장 수마다의 어떤 그 뜻이 있는지. 그리고 왜 꼭 홀수로 올리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답변 이 세상만사가 변해서 돌아가긴 해도, 돌아가는 거는 천차만별로 돌아가지만 돌아가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이 때는 3개가 될 수도 있고, 이 때는 2개가 될 수도 있고, 이 때는 하나가 될 수도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집는 데도 보는 거를 크게 볼 수도 있고 작은 걸 볼 수도 있고 아주 작은 걸 볼 수도 있고, 들더라도 작은 걸 들 수도 있고 큰 걸 들 수도 있고 아주 작은 걸 들 수도 있는 거죠. 그럴 때, 어떤 때는 작은 걸 들 때 한 손으로 집고 조금 큰 걸 들 때는 두 손으로 들고 더 큰 걸 들 땐 같이 들고 이러죠? 그러니까 어떤 집은 그저 한 조각을 부쳐 놓더라도 세 조각이 될 수 있고 일곱 조각이 될 수 있다, 이런 걸 가르치기 위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보이는 거는 한 조각이지마는 보이지 않는 데선 수만 수천 조각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이는 데서 볼 때 너무 소홀하지 않습니까? 먹는 사람도 그것 한 조각 가지고는 도저히 먹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일곱 조각씩 이렇게 그냥, 일곱 조각을 한 조각으로 표현하는 거죠.

그러니깐 자유권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 산 사람이 먹기 위해서 물건들을 합니다, 반찬을 하든 떡을 하든. 또 살기 위해서 물건을 한다 하더라도, 그 물건 아니라도 될 건데도 물건을 해야만 되죠. 육체가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까 무효예요. 보이는 데서도, 저 물 자체가 이 컵만 있어도 안 되고 컵 안에 물이 담겨 있어야 이게 되죠. 시시때때로 빈 컵에다가 물을 담아 먹죠. 그래서 시시때때로 무엇을 할 때는 그것을 일곱 개든지 세 개든지 한 개든지, 모두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을 여러분한테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모두가 영령들이 전부 한마음을 통해서 일체 우주천 세계에, 도리천 세계에 모두가 한자리 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한마음으로 공식(共食)한다는 뜻을 여러분한테 알리기도 하거니와 그 영령들은 그 자리에 바로 출현하시기 때문에, 한자리를 하기 때문에 그 영령은 어느 한 상 차려 놓은 것만이 아니라 전체를 한 도량으로 삼아서 한 방석에 앉으시니 그렇게 좋은 일이다 이거죠. 벗어날 수 있다. 영령들이, 조상들이, 즉 벗어날 수 있다 이런 뜻이죠.

그리고 재를 지낼 때, 우리가 스님네들이 안 차려 놓고 지내든 차려 놓고 지내든 스님네들이 아는 것만큼 영령들이 좋아요. 왜냐하면 그 스님네들이 아, 요거를 그 사람이 얼마 내 가지고 차렸다 요런 거를 스님네들이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깐 그 조상들이, 영령들이 들어와서 그 스님네 마음을 탁 보니까 그것만 알고 있거든. 그거 아는 것만치만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벗어날 길이 없죠.

그러나 여기 스님네들은 우주떡 하나 턱 해 놓고, 이 떡은 이 우주의 삼천대천세계의 천차만별의 중생들이, 부처님과 중생이 둘 아니게 다 잡숫고도 이 우주떡 하나가 되남는다. 이렇게 마음이 크니까 영령들이, 조상들이 들어와서 이 스님네 마음속에 탁 들어와 보니까 ‘아이고, 내 것 아닌 게 하나도 없다.’ 이랬을 때에 그 안도감과 그 시원하고 좋은 마음과 천도되는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죠.

정말 깨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의와 선이 땅에 떨어진 것만 같습니다. 나라 간의 문제를 봐도 정말 힘의 논리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궁리를 하고 애를 써 봐도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제가 빨리 깨쳐서, 나라는 생각 없이 공심으로 함이 없이 실천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저는 깨치지 못해서 능력이 없고 실천이 되지 않기에 답답합니다.

답변 우리가 빨리 깨쳐야겠다 해도 그것이 착이 되는 거니까 빨리 깨쳐야겠다 하는 그 말 자체가 아닌, 그대로 자기를 믿으라는 얘깁니다. 욕심이 생겼다는 얘깁니다. 욕심이 생겼는데 내가 항상 말을 하듯이 여기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자기 자신(自信)이 있다면 그것을 밀고 나가고 자신이 없다면 밀고 나가지 말아야 하겠죠. 이것이 자기 분수에 따라서 판단하고 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판단을 할 때 처음에는 요기밖엔 못 디뎠는데 나중에는 저기까지 디디게 됐다 이겁니다, 지혜가 넓어져서. 그랬을 때 차츰차츰 뛰어야 되는 거지 이걸 한꺼번에 뛰려면 안 되니까 살면서 체험을,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체험을 해 나가시라 이겁니다. 체험을 해 나가시다 보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만반의 준비를 할 수가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을 볼 때 오관을 통해서 오신통(五神通)을 지금 하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100프로 활용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의 법만 활용을 하지 무의 법은 활용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것을 욕심 없이,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해야만 된다. 즉 습이라는 게 참 무섭다는 얘깁니다. 모든 걸, 선한 일을 했어도 내가 한 일이 아니요, 악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두루 편하기 위해서, 대의를 위해서 했다면 악한 일이 아닙니다. 거짓도 남을 위해서 거짓을 했다면 잠시만 거짓으로 한 거지 그건 거짓이 아니겠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가 잘 생각한다면 남을 이익 하게 할 수 있고 또 나를, 나의 중생에게도 이익 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타인의 육체나 내 육체나 똑같은 중생이지만 말입니다. 자기 중생을 자기가 이익 하게 만들 수 있어야 남을 이익 하게 만들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잘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다 이겁니다. 잘 생각해야 할 점은 깨달아야만 한다는 거, 그거를 마음으로 규정지어 놓고선 ‘얼마쯤이나 가야 될 것인지?’ 그러지 마시고 우리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체험을 해 봐 가면서 탁탁 밀고 나가 보시라 이겁니다, 의심을 하지 말고. 그렇게 탁탁 밀고 나가다 보면 어떤 거는 자기에게 감촉이 온단 말입니다. 그 자리에 감응이 와서 느껴진단 말입니다. 점점 점점 점점 아주 굳어지는 겁니다. 굳어지는 반면에 큰일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걸 밀치고 나갈 수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도 꿈을 꾸어 보셨지요. 우리가 좋은 집에 살면서 즐거운 것도 순간 돌아가고, 친구들하고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논 것도 순간적입니다. 그렇게 즐거웠는데 그만 돌아서면 순간 허전하고 허황한 게 말할 수 없죠. 또 좋은 집에서 잘사는 것도 금방 망해서 돌아갔을 땐 그 허전함이 말할 수도 없고요. 꿈에 참 좋은 데 가서 즐겁게 놀고 즐겁게 살고 하는데도 그게 꿈을 깨고 나면 그렇게 허황될 수가 없죠. 목을 눌러서 죽이려고 하는데 꿈을 깼다. 야! 꿈이기에 망정이지 이거 생시 같으면 죽을 뻔했다고 할 겁니다. 이게 모두가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꿈도 생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꿈이 생시요, 생시가 꿈이듯이 우리가 허황되지 않은 진실을 알아서 그대로 법을 행하는 것이 부처이자 법신이자 보신(報身)이자 화신(化身)입니다. 용왕도 거기 들어 있고 모두가 다 거기 들어 있는데 왜 그 능력을 내지 못합니까? 그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공한 것입니다. 공했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지 공하지 못했다면 능력을 그렇게 발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 된다고 할 수가 없는 거죠. 부처 될 가능성도 없고요. 그래서 ‘짐승들이 사람을 거치지 않는다면 부처가 될 수 없다’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참 실질적으로, 내가 이렇게 말하면서도 말입니다, 역시 부처는 말이 없는 것이 부처입니다. 우리가 또 설법을 하는 거는 ‘말씀’입니다. 말씀!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고 듣는다고 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즉 교법이죠. 그건 유의 법이죠. 그리고 말없이 걸레를 빨아서 탁 닦는 것도, 말없이 걸어가는 것도, 말없이 행하는 것도 모두가 부처가 하는 일이죠. 그런데 말을 하는 것도, 말을 안 하고 하는 것도 그것이 둘입니까? 누가 했습니까?

그렇게 여러 가지를 하고 돌아가는데, 이걸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은 지금 잘 생각해 보시란 뜻입니다. 여러 가지로 자꾸 변해서 돌아가면서 행하는 이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해 가면서, 일부러 지어서보다도 생활 속에서 그냥 문득문득 다가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이건 장난으로 하면 안 됩니다. 실생활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내가 이런 거는 이렇게 해야 되지 않나 할 때 한번 해 보는 거, 하나하나 해 보다 보면 거기에서 완벽하게 자기에게 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자신이 생겨요. 그랬을 때 모든 것을 자신 있게 해 나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지금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문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나 모든 것을 볼 때 과학이 철학이고 철학이 과학이고 과학이 문학이고, 이것이 둘이 아니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물질과학으로서 우리의 다섯 가지 능력만 해도 이 도리를 체험해서 아신다면 우리나라에 급작스럽게 미사일이 건너와서 폭파될 처지라 하더라도 ‘여기는 안 돼! 못 와!’ 하고 못 박으면 못 오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게 자꾸 체험을 하다 보면 느낌이 옵니다. 느낌이 오게 되고 안으로 굴리게 됩니다. 이게 참선입니다. 안으로 굴리게 되고 자꾸 돌아가다 보면 느낌으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아, 이건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알게 됐을 때에는 ‘여기는 안 돼! 못 와!’ 하면 미사일이라도 그건 못 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5년 후에 이렇게 된다 하고 예언을 해 놓은 것을 들었는데 ‘그렇게 해선 안 돼! 5년 있다가 하면 이게 될 법한 일인가?’ 이렇게 해놓으면 5년 있다가 그 말이 한데로 떨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언자는 소인이라고 한 게 그런 데서 오는 거다 이겁니다. 이건 자신이 자신을 발견해서 자유스럽게 그냥 자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을 한 걸 지워 버릴 수도 있는 그런 능력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어저께도 없고 내일도 없이 하루살이로 사느니라.’ 왜? 없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연결됐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연결이 돼 있기 때문이죠. 내가 콩씨 얘기도 많이 했고, 바닷물이 흘러 들어오는가 하면은 흘러 나가고, 흘러 나가서 다시 돌아서 또 흘러 들어오고 이러는데 두드러지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고 그랬죠.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리고 사람 사는 마음으로서 전달되는 한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한마음으로서 우리가 일을 행해 나갈 때 미사일이든 폭탄이든 그게 마음대로 못하죠. 절대로 마음대로 못합니다. 무전도 그렇습니다. 우주간 법계에 그 무전줄이 있어서 ‘이거는 안 돼!’ 하고 차단을 시켜 놓으면 그건 안 되는 법입니다. 급할 때 쓰는 겁니다. 이것을 신통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오신통이라 하는 건 신통입니다. 신통은 급할 때 쓰는 겁니다. 무전기도 급할 때 쓰는 거고, 미사일이라는 것도 급할 때, 한생각이면 다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급하면 급한 대로 다 탐지기도 쓸 수 있고, 컴퓨터도 쓸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렇게 쓸 수 있게끔 만든 장본인이 누구냐 이겁니다. 그런 생각이 이 오신통으로 들어오고, 눈으로 귀로 상응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이러는 그 자체를 누가 만들었느냐는 얘깁니다. 그거 생각나기 이전 영원한 자기 생명이, 그 근원이 바로 그렇게 융합하고 또 돌아가게 만드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일을 보고 듣고 받아들이고 내주고 하게끔 만드는 거죠. 그러니까 그 근본이 아니라면 오신통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오신통이라는 것은 말로 오신통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한번 생각을 해서 체험을 한 번씩들 해 보시면서 공부를 하셔야 돼요. 그래야 위급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피난처가 따로 있습니까? 내 앉은 자리가 피난처지. 육신이 아무리 돌아다니면서 피하려고 애를 써 봐도 되지 않습니다.

생활면에 있어서 체험을 해 본 분들은 거기에서 또 능력을 얻는 수도 많습니다. 또 남을 위해서도 조그마한 체험이라도 해 보시고 자꾸자꾸 들어간다면 처음에는 조금 조금 먹다가 나중에는 큰 바다의 물을 다 삼켰다고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럼 삼키기만 하면 되느냐. 아닙니다. 삼켰다 내주고 내줬다 삼키기도 하는, 아주 다양하게 자활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이 그걸 진짜 사람이라고 했고 부처라고 했고 선각자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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