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스님

초의 스님, 차문화 중흥조 평가
스님의 자태, 단아·온화한 선승
존상외에는 일체장식 제거해 표현

▲ 초의선사 진영 草, 143×74cm, 종이에 수묵. 2015
초의 스님(1786-1866)은 조선시대 후기 쇠퇴했던 한국 차 문화를 복원·정립시킴으로써 근현대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런 점에서 초의 스님은 한국 차 문화의 중흥조로 평가 받았다.

10여 년 전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초의선사 초상화를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다. 초상화는 액자와 유리가 벗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비단과 안료, 선묘의 탄력 등은 물론이고 배첩의 상태까지 확인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이었다. 당시의 감상과 분석 기록물을 바탕으로 그 초의 스님 진영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진영의 첫 인상은 일본화 같다는 생각이었다. 일본화가가 그린 것이 아니라면 일제 강점기 시절 어느 화가가 모사한 걸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선에 있었다. 의습에 적용된 선을 보면 긴장감이 약하다. 필세의 운용에서 살펴보면 화가가 붓대의 아랫부분을 잡고 손바닥을 화면에 붙이며 필선을 그은 특징적 요소가 나타난다. 이런 이유에 의해 필세가 유연치 못하고 딱딱하며 자유로움이 약하다. 화가가 자신이 그린 밑그림을 기초로 윤곽선을 그을 경우 그 선은 매우 활달하다. 특히 문인화가가 대상을 묘사 할 때 사용되는 선묘와 채색화가가 사용하는 선묘는 확연히 다르다. 대상의 특징을 드러내는데 선이 차지하는 비중과 용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진영에 사용된 선은 원본을 충실하게 이모하려는 의도가 농후한 것으로 보였다.

다음으로 좌대에 적용된 선이다. 좌대는 자를 대고 그은 계선 기법을 사용했고 윤곽선 주위에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주려는 시도가 읽혔다. 좌대 구조도 독특하다. 판자 연결 부위가 없고 평평한 것으로 보아 합판으로 제작한 근대시기 산물로 보였다. 이런 점은 좌대 좌측 목 가구에 표현된 나뭇결 문양과 대비된다.

스님이 앉아 있는 방석은 일본식 문양이 장식된 천으로 만들어졌다. 방석 부피도 소략하다. 차 주전자와 다구 역시 조선의 미감과 다르다. 표면에 아무런 장식 문양이 없고, 포갑은 너무 길게 표현되어 있다. 형태만 보면 족자함 형식에 서책이 들어있는 격이다. 이렇게 세로로 긴 책은 절 첩일 경우 가능하지만 한국 고유 문집 비례를 벗어나 있다. 책 모서리를 덧댄 천이 붉은색으로 마감 처리된 것을 보아 포갑에 있는 책은 불경이다. 이처럼 원래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전달돼 달리 해석되는 경우는 이모본의 특징들이다.

박락된 비단 사이로 내부 구조를 봤다. 붉은 가사와 잿빛 장삼에는 밑그림으로 연필 자국이 잔존해 있다. 그림이 그려진 비단 원본 아래 속지에는 밑그림이 붙여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제작 방식은 일반적인 한국식 초상화 제작 방식과 다르다. 그러면서 최종 배접지는 신문지로 마감돼 있어 보관과 후처리에 날림과 비전문성이 분명했다.

또 화견으로 사용된 비단을 관찰한 결과 비단의 직조 방식도 두개 하나, 두개 하나 식으로 조선시대 결구와 그 구조가 크게 달랐다. 일본 근대 비단에서나 보이는 전형적인 화견의 짜임새였다.

화제를 살펴보니 원본에 있는 글자가 누락되거나 첨가되어 있는 등 차이가 분명했다. 이런 이유로 일제 강점기 때 그린 이모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나는 초의선사 진영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았다.

▲ 구름을 바느질하다. 98×95cm, 종이에 수묵, 2015

신헌이 저술한 위당집 권13에 초의선사화상찬(草衣禪師畵像贊)이 있다. 그리고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 초의선사 진영에 있는 초의대선사영찬이 있다. 위당집에 있는 찬과 진영에 병기된 글은 조금 달랐다. 특히 진영에는 을축725일유경 도인훈 찬이라 하여 찬문을 쓴 일시와 쓴 사람 이름이 적시됐다.

또 응송 스님은 동다정통고에서 초의 진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한편 소치는 초의선사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는 그가 그린 추사의 초상화와 함께 가작에 속한다. 초의선사의 초상화는 무채 백묘법으로 그렸고 추사가 찬 하기를 초의의 실제 얼굴은 본래 원형인데 길쭉하기가 당나귀 얼굴과 흡사하다. 그러나 둥글고 긴 것은 본래 둘이 아니니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이 초의 초상화는 일제 압정기에 해남 서장 이었던 일본인 心石이란 사람이 초의선사의 曾法孫 金千?에게서 탈취해 갔다.”

, 초의선사 진영이 원래 소치가 그렸다는 사실과 무채 백묘법으로 그린 그림이란 점을 밝히면서 원본은 일본인에게 빼앗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면 현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소장된 초의선사 진영은 일본인에게 빼앗긴 후 다시 그린 후대본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을축년을 해석하는데 1865년이 아닌 1925년에 일본화가나 아니면 일본식 채색화법을 익힌 화가에 의해 새로 제작한 것으로 보았다.

분석 자료를 기초로 초의선사 진영 재현 작업을 1차 시도했다. 재현에 앞서 초의선사의 그림이라 전해지는 것들을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소치가 그린 초상작품도 분석했다. 이런 작품들이 지니는 禪味(선미)등을 고려했을 때 초의선사 진영도 단순하면서 함축적인 묘법을 사용해 전신사조를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스님 자태는 스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곱고 단아하며 온화한 선승으로 생각됐다. 그래서 백묘로 묘사하되 謹筆(근필)로 그리는 선묘 방식을 채택했다. 필세는 느리게 운용했고 선의 굵고 가는 변화는 호흡에 맡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풀어 놓았다.

스님 모습은 현전하는 초상화를 기초로 했으나 존상 외에는 일체 장식들을 제거해 표현 대상에만 집중토록 했다. 특히 스님 눈빛은 맑고 투명한 선정의 경지를 지향하도록 의도했다.

먹색은 농묵보다 담묵을 사용했다. 선은 단박에 긋는 일획을 준수하려 노력했다. 스님의 제다법에서 중요한 차 잎을 덖는 방식과 선묘 표현 방식을 일체화했다. 스님의 제다 방식은 동양화의 일획론과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내 능력과 지식의 한계가 명확하지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초의선사 그림을 추증하며 재현한 것은 일본 방식을 배제하고 조선식대로 회복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는 음료이다. 또한 내면을 충일하게 하는 정신적 영역을 지닌다. 차는 사람을 위로하고 소통하기 위한 매개물임은 물론,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며 시대를 뛰어 넘는다. 차의 덕목이다. 또한 이는 차를 통해 인격을 함양하고 시대 아픔을 함께 했던 초의 스님의 모습과 닮아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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