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잘못했다고 하기 이전에, 그런 거 볼 사이가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뭐 때문에 부딪쳐요?
그러니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려라,
그러면 복이 오고 공덕을 받을 수 있느니라.

… 그럼으로써 또 그것을 자꾸 그렇게 굴리다 보면 스스로 지금 내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이 뜻을, 모든 일체를 다 알게끔 돼 있습니다. 내 영혼 자체의 그 근본이 바로 내 주처의 주인공이라면, 내 옛 친구가 아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끌고 다니는 ‘나’ 친구가 있습니다. 주인공 친구가 있어요. 그래서 이 속으로, 뜻으로 여러분을 이끌고 다니면서 뜻으로 여러분의 머리에, 마음에 항상 이렇게 뒷받침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들으면 아주 그냥 절실하게 여기에 감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진실히 믿고…, 저기 지금 오하이오 주 주립대학에서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이 공부를 하는 총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저께 대화를 하는데 말입니다, 칼은 내 주인공, 이 중심이지마는 내리치는 거는 바로 믿음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더군요.

왜, 돌을 가지고서 탁 치면 불이 반짝 오르죠? 우리가 믿는 그 마음의 속도가, 그와 같이 그렇게 빠른 겁니다. 아주 빠른 거죠. 그런데 믿음이라는 게, 그렇게 믿는다면 그냥 쏜살같이 불이 번떡 하고 사라지는 것 같은 그런, 불이 반짝하는 그런 빠름입니다. 그러니까 빛보다도 더 빠르고 이건 뭐, 빠른 거는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렇게 빠른 것이니까 내 이 주인공을 진실히 믿는다면, 어떠한 애고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 맡길 수 있습니다. ‘거기서밖엔 해결 못해! 거기서밖엔 낫게 할 수 없어!’ 경찰서에 가야 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밖엔 해결할 수 없어.’ 어디 물건이 안 팔린다 하면 ‘야, 거기서밖에는 이거 팔리게 할 수 없어.’ 매사 게 다 그렇습니다.

또 지금 여기 이 중에는 부모가 기독교에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에 기독교에 나가는 부모가 아프다 할지라도 ‘내 주인공과 저 주인공이 둘이 아니니까, 내 전구와 저 전구가 둘이 아니니까 스위치 올리면 이 전구도 켜지고 저 전구도 켜질 수 있다.’ 그러니까 이건 이치를 얘기하는 겁니다. ‘내 주인공밖에 우리 엄마 병을 낫게 할 수 없다.’ 이런다면 거기까지 불이 들어와서 그 병이 차차 나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불교라는 것을 믿을 때, 즉 말하자면 지금 현실의 삶의 자유스러운 그 불이 번쩍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가 죽은 불교를 믿는 게 아니라 산 불교, 산 사람이 지금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현실의 지금 불법입니다. 이 지금 생활입니다. 이걸 배우는 거지 죽어서 천당에 가려고 이렇게 믿는 게 아닙니다, 네? 지금 내가 지옥에서 살지 않고 마음이 천당에서 살 수 있는 그 마음의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또 하나는 내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거, 머뭇머뭇하지 않고 남한테 기대고 의존하고 항상 노예 생활로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당당하게, 아까도 반야심경 읽었죠? 당당하게,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삶의 보람을 그대로 갖다 주는 공부입니다.

우리 불교에는 네 가지의 승려가 있습니다. 하나는 행정승, 하나는 염불하는 부전승, 하나는 학승. 경을 보고 학술적으로 가르치는 그것을 학승이라 그럽니다. 우리가 지금 가르치는 건 선승입니다, 선승. 마음을, 마음의 도리를 가르쳐서 깨닫게 해 주는 게 선승입니다. 이게 최고입니다. 그다음에 학, 그다음에 염불, 행정 이것이 둘이 똑같이 돌아가는 그런 이치죠. 그러니까 어느 승려를 보든지 똑같이 보진 마십시오. 이것이 다 과목이 있으니까. 생물학자를 갖다가 철학자로 볼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철학자를 생물학자로 볼 수도 없고 물리학자를 갖다가 의학자로 볼 수도 없는 거고, 의학자를 갖다가 철학자로 볼 수도 없으니, 자기 주어진 소임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그 과목입니다.

그런데 이 선(禪)에서는 행정, 학술 또는 염불 이런 것이 전부 한데 합쳐진 게 바로 선승입니다, 선승. 합쳐서 하는 게 선승입니다. 또 누구나가 화두선을 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데 간화선이니 묵선이니 이런 모두를, 좌선이니 입선이니 이 모두를 한데 합친 것이 참선입니다. 그러니까 참선이라는 건, 진짜 참선이라면 우리가 말을 하고도, 금방 말을 하긴 했는데 온 데 간 데가 없죠. 벌써 돌아갔어. 과거야. 그러니 내놓을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게 말 자체이기도 하지만 마음 자체다 이거야.

이날까지 여러분이 생활을 해 오셨지만 그렇게 벌써 가 버렸습니다. 여기 걸어오실 때 벌써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떼어 놓은 뒷발자국은 벌써 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놓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공했다고 했습니다. 공했다. ‘물질이라는 게, 이렇게 걸어오고 살고 죽고 깨지고 변하고 이러는 게 전부 공해서 그렇느니라.’ 이런 겁니다. 그래서 물질이 공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표현해서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니라.’ 이렇게 한 겁니다. 결부시킨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것을 그래도 대충은 알고 가야 합니다. ‘아이, 저 사람은 무슨 중이 저래?’ 이럴 수도 없는 거죠, 과목이 있으니까, 자기 맡은 과목이. 배운 게 그건데 어떻게 딴 거를 합니까? 그러니까 흉보지 마시고, 선승은 몰아서 둘이 아니게 하나로서 이것을 하는 공부고, 그다음에 학승은 학술로써 잘못됐다 잘됐다 경을 보고 경을 설해 주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똑바로 아시고 우리가 승려들을 나무라기 이전에, 남을 잘못했다고 하기 이전에, 그런 거 볼 사이가 없습니다. 아무리 여기에서 춤을 추고 술을 먹고 하더라도 나는 그거 타낼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 발 한 발 걸어가면서 나를 실험하고 바로 체험하려면 지금 남의 걱정 할 여유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 공부를 해야 그렇게 술 먹고 춤추고 그러는 중이든 중이 아니든 그것도 곧 건져 줄 수 있는 그 능력이 있으니까요. 지나가는 소도 건져 줄 수 있는 거고요.

일체 만물이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일체 만물이 될 수 있으니 그 뜻을 알기 위해서, 자유스럽게 살기 위해서 우린 스스로 씽긋이, 아주 추워서 손을 동동 구르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날 수 있는 그런 여여함을 가져야 합니다. 글쎄, 저녁에 밥을 굶었는데도 걸음을 걷는데 입가에서 슬그머니 웃음이 나고, 내 마음이 맑으니까 이 천지가 다 깨끗하고 맑더라 이거야. 그런데 굶는 것도 자기가 굶는 게 아닙니다. 이 오장 육부의 중생들이 굶는 거죠. 그러니까 이끌어 주는 내 부처를 잘 둬야 중생을 먹이지 아니, 그것도 자기 지배인이 잘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중생들을 다 못 먹입니다. 부모가 벌이를 잘 못해서 만약에 망하면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고 먹이지도 잘 못하는 경우와 똑같죠.

그러니 내 중생은 지금 내 오장 육부에 있는 그 자체로서 거기서 달라는 대로 줘야 됩니다. 배고프다고 보채면 여기서 ‘어, 배고프구나!’ 그러고 주는 거야. 허겁지겁해서 냉장고 문 열고 아무거라도 먹거든. 그것은 왜냐? 중생들이 달라니까 그런 거야. 자기라고 오산하지 말라 이거야. 자기가 아니야. 자기는 집이야. 자기 중생들이 살고 있는 혹성, 집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입을 빌리고 손을 빌리고, 귀를 빌리고 눈을 빌리고 다 이렇게 해서 사는 거야. 이거 뚫어지지 않으면 이 배 속에 있는 생명들이 살 수가 없는 거지, 운행을 못하고. 그러니까 이 한 몸에 소장 공장, 간장 공장도 있고,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정말입니다. 이거 거짓으로 알아들어선 안 됩니다. 위 공장, 식도 공장 또는 아주 간단하게만 친다 하더라도 척수 공장, 척추 공장, 방광 공장, 콩팥 공장, 위 공장, 간장 공장 그 모두 이 세포 하나하나가 움죽거리는 게 지배인이 생각을 잘해 줘야 돼, 그래야 다 따라 주니까.

그래서 몸에 어떠한 병이 들었을 때, 한 공장에서 파워가 일어났을 때 생각을 한번 ‘주인공! 거기서 나온 건데 너밖에 해결할 수 없잖아.’ 하고선 주인공에 맡기면 그것이 바로 이 마음에서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 누진 즉, 정신으로 올라가. 머리로 올라가서 사대에 그냥 전부 통신이 돼 버려요. 그러면 어느 공장에서 고장난 것을 통신으로 알아. 간장 공장이나 위 공장이 나빠졌다, 파워를 일으켰다 그러면 거기서 통신해서 전체 지배인이, 공장장들이 전부 거기를 지배하거든. 그래서 파워를 막아 줄 수 있는 까닭에 여러분의 병이 나을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우리가 지금 모두 포함해서 배우는 공부입니다. 이 선 공부는 의학도 들어가고 천체물리학도 들어가고 지리학도 들어가고, 천문학도 들어가고 또는 생물학도 들어가고 과학도 들어가고 천체물리학 철학 심리학, 모두 전체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여러분, 공부하는 분들은 이 공부를 해 보면, 거기다 놓으면 쓸 수 있는 게 거기서, 그 안에서 다 나와. 그건 왜냐? 그건 일일이 또 가르쳐 드려야지? 어저께 내가 그랬죠. 내가 아파서 주인공에 맡기면 의사가 되고, 즉 말하자면 불가에서 말하면 약사가 된다 이 소립니다, 약사보살. 내가 또 가난하다면 주인공에 ‘야, 내가 이렇게 지금 살 수가 없는데 이대로 놔둘 순 없잖아. 네가 이끌어 줄 수밖엔 없어.’ 이럴 때 관세음보살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게 내가 다 될 수 있는데 내가 즉, 어떠한 과목을 가지고 논문을 쓰는데 논문이 안된다 할 때 ‘이대로 둘 거냐, 너?’ 허허허. ‘야, 너 이대로 둘 거야? 이 논문 지금 써야만 네 집, 즉 말하자면 내가 너희들 심부름을 해 주는데 아니, 이렇게 해야 될 거 아니야?’ 하면 거기에서는 앞장서서 자기 손이 되고, 이 손이 바로 자기 주인공의 손이 돼. 나는 실험해 봤어. 나는 한문 글을 배우지 못했거든. 얼른 쉽게 말해서 무식하지. 그래서 그림을 그려도 그렇고, 산 그림을 그리고 산 글을 쓰고 산 말을 해라 이거야. 죽은 말 하고 죽은 글 쓰고 죽은 그림 그리지 말라 이거지. 거기에 놓고 하니까 이 손을 내가 놀려서 쓰려고 해서 쓰는 게 아니고 이 손이 저절로 가, 저절로. 아주 글씨도 못 쓰는데 흘려서 잘 쓰더라고. 이것이 아니라고 보지도 못해. 그림도 그래. 모든 게 그래. 일체가 다 그래.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가 그 공부를 해서 맛을 본 놈이나 알지 그건 모를 거야, 모두.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도 중요한 논문을 써서 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런 소리 하는데, 반드시 내가 이 과목에 대해서 논문을 쓰는 데는 ‘너는 바로 이것을 해 줘야 되잖아, 이 친구야.’ 깊은 뜻으로다 그럴 때 머리에는 이 리더가 가고 손에도 거기에 전기가, 이 에너지가 보풀려서 다 나가. 열 사람의 머리를 한데 모아 놓은 거보다도 나아. 으뜸가는 사람을, 열 사람의 머리를 한데 모아 놓은 거보다 낫다 이 소리야.
나 빼놓고 더 높은 데가 어디 있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그런 게 뭔 줄 알아? 위를 보고 아래를 딛고 나는 이렇게 찰나찰나 굴려 돌아가느니라. 모두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다 그렇지마는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석존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불심이 돈독했어. 그래서 부처님이, 그때 깨달으신 분이 발을 벗고 가시는데 이 흙이 질척질척했어. 그러니까 발에 흙이 묻을까 봐 자기 머리를 썽둥썽둥 잘라서 거기에 폈어. 그랬는데도 그 진 땅을 또 딛고 가게 되니까 자기 웃통을 벗어서 거기다 마저 깔았다 이거야. 그 공덕으로 깨달은 그 분이 “너는 이다음에 다시 몸을 받아서 태자로 태어나되 석가가 되리라.” 이랬단 말이야. 그래서 석가모니로 태어나는 거야.

어저께 없는 오늘이 없을 뿐 아니라 오늘 없는 내일이 어디 있어? 여러분이 과거에 빚진 것이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겁니다. 유전성이다, 세균성이다, 영계성이다, 인과응보다, 업보다, 이 두루마리로 자꾸자꾸 나오는 게 뭔 줄 아십니까? 시줏돈도 함부로 내가 감추고 감추고 그래서 모으고 이런다면 뭐가 되는 줄 아십니까? 구렁이가 돼서 비늘마다 신도들이 끼어 있어. 허허허. 그래서 내 돈 달라고, 내 거, “너, 내 돈 먹고선 그렇게 해 주지 않았으니까….” 이러는 법이야.

그러게 양심이 부처라 그랬잖아. 잠시 잠깐 오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헛된 생각과 헛된 행을 그렇게 한만히 저지른다는 건 말도 안 돼. 속세의 여러분은 모르니까 그럴지 모르지마는 중이라면 벌써 동기를 버리고 부모 형제를 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각오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승려로, 비구니 비구로 탁 나설 때는 그런 각오가 없이는 못 나서는 거야. 또 비구 비구니들만 공부하는 게 아니야. 예전에 부설 거사와 유마힐 거사 봤지? 부처님하고도 동등하게 한마음으로 그냥 뭉쳐서 모든 밭에 씨를 뿌렸다는 그 사실을 말이야.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앉아 계시지만 그저 불가항력이라. 잠시 잠깐 살다가 잠시 잠깐 보이지 않았다가, 요다음 생에 또다시 내가 자식 속에서 나와서 또 자식이 될지 몰라. 허허허. 그 대에 손자가 될지도 모르고요, 부모인데. 이거 아주 명심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요거 잠깐 얘기하겠습니다. 뭐 질문하래 놓고선 그냥 자기가 다 말하네. 글쎄 할아버지가요, 돌아가셨는데 요만한 상자를 딱 봉해서 유물로다가 놓고 말입니다, “얘들아, 너희가 며느리를 볼 때 대대손손으로 이거를 내려라. 9대까지 내려라. 9대까지 내리면 9대 손자에서 죽게 됐을 때 이거를 펴 보면 알 수 있느니라. 9대 손자까지 물려서 만약에 죽을 때가 되면 그 보물 상자를 원님에게 갖다 드리면 살 수 있는 방도가 생길 수 있느니라.” 이렇게 가르쳐 놓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랬는데 9대조 손자가 그 할아버지야. 아시겠습니까?

그 9대조 손자가 죽게 됐어. 9대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전에 뭘 잘못했느냐 하면, 이렇게 노인네들이 계시면 발 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더운데 좀 시원하게 하려고 발을 쳤는데 아, 이놈의 애들이 나무에 올라가서 과실을 따 먹고 있거든, 그 마당에서. 그러니까 “이거 누가 올라가서 그러느냐?” 그러고선 발을 이렇게 쳐드는데 놀래 가지고 그 애가 떨어져서 죽었거든. 그것이 업이 된 겁니다, 죄업이. 그래 그 할아버지가 9대조에 가서 태어날 때에 자기가 그 죄로 인해서 목숨이 달아나가게 생길 그런 위협이 닥칠 때를 생각하고선 자기가 써 놓은 겁니다, 자기가 알고. 이 공부를 했거든. 그러니까 그게 자기가 죽이려고 그래서 죽인 게 아닌데 그렇게 됐거든.

그래서 9대 손자가 그 상자를 받았는데 그만 죽게 되니까 그 상자를 가지고 원님한테 갔단 말이야. 원님한테 가서 이렇게 마당에 서 있는데, 누가 왔느냐고 그래서 그 할아버지 9대조의 손자라고 그러니까 “아, 그 할아버지!” 하고 그냥 맨발로 이렇게 뛰어 내려왔단 말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유명했으니까. 그런데 맨발로 뛰어 내려오자 대들보가 내려앉아서 원님 앉은 자리를 그냥 덮친 겁니다. 그러니 이 손자가 원님을 살려 준 거 아닙니까?

그랬는데 그걸 받아서 원님이 턱 보니까 “자네를 살렸으니 나도 살려 주게.” 이렇게 돼 있어. 우리 9대 손자를 살려 달라 이거야. 인제 얼른 쉽게 말해서 살려 줘라 이거지. 지금 9대 손자가 바로 나니라 이거야. 너를 살려 줬으니까 나도 살려라 이거지. 그것도 똑같은 누명을 썼거든. 그러니까 그것도 누명을 쓴 거지만 그 할아버지는 죽이려고 죽인 게 아닌데 자기가 그렇게 그걸 받은 거고, 이 사람도 그렇게 죽이려고 죽인 게 아닌데 누명을 쓴 거라고. 그래서 그 원님이 죄목을 다 생생히 밝혀서 바로 무죄로 석방을 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어디 잘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을 비방하고, 남을 원망하고, 남한테다 뒤집어씌우고 그렇게 해 가지고 남을 그냥 못살게 만들어서 노이로제에 걸리게 만들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되죠. 또 우리가 생활하면서도 그저 모든 것에 남의 탓을 하지 마세요. 내가 이 세상에 난 탓입니다. 만약에 소가 말입니다, 언덕이 있음으로써 가다가 언덕에다 비비지, 언덕이 없었더라면 뭣 때문에 소가 가다가 비비겠소? 그와 같은 거죠. 우리가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부딪치는 거지 아, 내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뭐 때문에 부딪쳐요? 그러니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려라 이런 거죠. 그러면 복이 오고 공덕을 받을 수 있느니라.

기껏 그냥 말씀하라고 해 놓고 내가 이렇게 말을 했으니 어떡합니까? 그 질문하실 거 있으면, 서로 궁금한 게 있으면 얘기들 하세요.

질문자1(남) 그러니까 인제 다시 태어나잖아요, 이 영혼이? 그러면 그 의식을 가지고 또 태어난다 그 말씀이죠?

큰스님 예. 죽어서도 그 의식이 그냥 있어서 자기가 갈 자리를 못 가요.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는데도 의식이 그래서 자기가 뱃지를 못 달고 그냥 못 들어가죠, 백이 없으니까. 그 의식만 가졌으니까.
그런데 주인공이다 하는 건 과거에 살던 것이 다 입력된 컴퓨터와 마찬가지예요, 이게. 여러분 마음이, 수없는 마음이 입력이 돼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게 지금 숙명통에 수많은 입력이, 과거에 살던 하나하나가 자동적으로 다 입력이 된 겁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사는 게 전부 입력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모든 수십억 마리의 의식 자체가 벌써 입력이 돼서 거기에서 다 나오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입력이 돼서 나오는 거를 갖다 컴퓨터에다 다시 입력을 해라 이 소리죠. 그럼으로써 물질화된 의식이 다 그냥, 과거의 어리석은 생각, 습으로 인해서 관념으로 인해서 빠져나가지 못한 그 의식이 다 그냥 무너지는 거죠. 선명하게, 자기가 당당하게 알 수 있는 그런 참자기의 그것이 탁 나와서 이 모든 거를 자기가 한 생각이면 지배하게끔 돼 있거든요.

그러니 참 얼마나 묘한 도린지 모릅니다. 이 부처님 도리? 부처님 도리라는 뜻은 깨달은 사람의 도리라 이 소립니다. 그러니 여기 스님이, 즉 입산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마는 입산하기 전에 이 도리를 수년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처럼 이렇게 있을 당시에 참…. (녹음 안됨) 이 스님한테 말씀하시고 난 뒤에 주인공한테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모든 게 말갛게 씻어질 수 있는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거기에서도 느끼는 바가 있고 자꾸자꾸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셔야죠. 그리고 또 여기 스님이 그것을 들으면 바로 쏜살같이 나한테도 알려집니다. 그걸 아셔야 됩니다. 한 줄에 꿴 염주가, 한 염주 알이 어찌 딱딱딱딱 신호가 안 오겠습니까. 하하하. 이걸 돌리는데, 허허.

또 질문하실 분 없습니까? 앞으로는 공부들 잘하시게 될 것 같은데요? 정말, 정말입니다. 어저께, 오늘 이렇게 해 나가는데 어저께보다도 상당히 잘 받아들이네요. 저한테 음파가, 제가 말을 하면 음파가 내 앞으로 그냥 튀어오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음파를 집어먹지 못하면 나한테로 다시 튀어오거든요. 참, 그 도리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묘한 도립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0년 12월 23일 알래스카 지원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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