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찰나가 바로 저승이고 한 찰나가 이승입니다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 놓으셨어도
지금 시대의 여러분이 알아듣지 못하고 감지를 못한다면
좋은 말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용무가 자재해지려면

질문 『도덕경』에 보면 “무위이무불이(無爲而無不爲)”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뜻은 ‘무위를 실천해 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그 말씀이 큰스님 법문 중의 “내 내면에 진실하게 맡기면 안 되는 게 없다.”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성인들과 선지식들께서도 자신의 내면을 깨달아서 진리를 실천해 나가셨는데, 왜 실천해 나가는 모습에 차이가 나는 것인지요? 그리고 그런 성인들처럼 용무가 자재해지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여러분이 이렇게 한데 모여 앉았다가도 일어서면 다 뿔뿔이 헤어집니다. 헤어졌다 또 모이고 모였다 헤어지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진리가 그러합니다. 그런 거와 같이 예전에 강태공은 곧은 낚시를 넣고 앉았으면서 영계를 다스릴 때에 명령을 해서 다스렸다 합니다. 노자(老子)는 영계를 다스릴 때에 영원한 나의 친구로서 나와 둘 아니게 다스렸다 합니다. 또 제갈공명은 촛불을 켜고 영계를 다스렸다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어떤 분이 다스린 것이 정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물리를 다 파악 못하고 물리가 다 터지지 못한 사람이 그러는 겁니다. 옳다 그르다가 없이 내가 그대로 여여하게 닥치는 대로 생활을 한다면 그처럼 그대로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또 모르고서 그대로 한다면 아무리 해 봤자 걸립니다. 내면의 나와 외부의 내가 그렇게 둘이 아니게 할 수 있는 내 내면의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고서야 그 모든 것을, 외부의 모든 것을 가늠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야, 명령해서 쓰는 게 옳으냐, 영원한 친구로서 나와 둘이 아니게 쓰는 게 옳으냐, 촛불을 켜 놓고 쓰는 게 옳으냐?” 했을 때 제갈공명은 촛불을 켜 놓고 썼기 때문에, 촛불이 꺼지고 또 켜지고 이게 있기 때문에 그 몸이 조금 더 있다가 갈 것을 그렇게 자유스럽게 못했다, 이런 뜻이 있죠. 그래서 물질로써는 절대로 거기에 눈을 뜨지 말라 하는 거죠. 물론 나의 내면세계의 그 모두를 알고서야, 파악하고서야 이해가 가고 또 가늠하고 또 깨닫고 이러면서 결국은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고, 닥치는 대로 해결할 수 있는 자기의 그 뿌리 말입니다. 노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곧은 낚시를 넣고 아무리 있어 봐라. 네가 명령해서 한다면, 말하자면 군사를 모을 때에 분산되기가 쉽고 또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해이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백천만의 군사를 거느릴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했답니다. 그러니 노자는 부처님의 뜻을 그만큼 그래도 둘이 아니게 생활을 했던 모양입니다. 나도 잘 모릅니다마는 그런 말씀을 했다는 유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여기서 이런 말을 한 겁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는 걸로 표현을 한다면, 여러분이 깨 한 알갱이를 심는다면 얼마나 나옵니까? 많이 나오죠? 그런데 그거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 한계가 있느냐? 시간을 두어야 하고 또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한계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의식이란 것은 찰나찰나 바뀌어서 화할 수가 있으니 한 찰나의 한 생각이, 그 한 생각이 수천수만이 될 수도 있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닥치는 대로 자기가 중용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중용을 한다는 것은 자기 불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법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즉, 물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여러분 몸속에 적게 잡아도 십일억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숫자를 어떻게 따지리까마는, 십일억이 넘지만 십일억이라고 대충 잡는다면 만약에 그 십일억 중에 하나가, 그 의식이 깨알처럼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하는 그런 게 없이 수만 개가 됐다가 아니, 억겁의 이 세상 대천세계를 꽉 덮고도 남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하나가 말입니다. 그 십일억 중에 말입니다. 그 많은 것이 다 벌떼 일어나듯 한 생각이 그렇게 많이 일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이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병고도 하나가 일어났다 하면은 수십 개가 일어나고, 만약에 막는 놈은 적고 일어나는 놈은, 해하게 하는 놈은 많아진다면 그 집은 쓰러지는 겁니다. 좀먹는 겁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만약에 내 마음이, 지키는 마음이, 지켜보는 마음이 만약에 빨갛게 생각을 했다 하면은 이건 전체가 빨개집니다. 노랗게 생각을 했다 하면 전체가 노래지는 것이고. 악으로 나오는 걸 자기가 다스리지 못한다 할 때는 전체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내면세계의 그 살림살이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돼야만이 바깥의 외부의 살림살이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긴다 이겁니다.

여러분 몸속에 과거에 살던 그 자체가 쓰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묶어 놓지도 않았는데 인연에 따라서 저절로, 자연적으로 입력이 돼서 여러분이 짊어지고 나왔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때 고(苦)라는 문제가 제일 첫 번에 나왔던 겁니다. 여러분의 그 마음은 악으로 가게끔 이끌 수도 있고, 선으로 가게끔 이끌 수도 있습니다. 고정됨이 없이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그 마음이 어떤 거든지 바로 이끌어 나갈 수 있고, 지켜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실험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배인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래자성불이라고 합니다.

본래자성불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그 힘을 가하니, 마치 맷돌처럼 물건만 넣으면 저절로 갈아져 나오고 맷돌이 이탈을 안 하고 잘 돌아가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비유해서 얘기입니다. 여러분도 그 맷돌과 같으니깐요. 심봉을 꽂지 않은 맷돌은 이탈을 하게 되고 잘 물건이 갈려 나오질 않아서 사는 데 복잡하고 배고프고 춥고, 이런 문제들이 나오면서 한 가정이 파괴 직전에도 갈 수 있고, 또는 화목지도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넓게 보지도 못하며, 또 그렇게 좁아서 자기 살기도 극히 어렵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 놓으셨어도 지금 시대의 여러분이 알아듣지 못하고 감지를 못한다면 좋은 말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여러분이 먹어 보지 못하고, 맛을 모른다면 그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무의 세계를 아는 것에 대해서

질문 득도를 하여 견성성불 하신 분이 무의 세계를 아시는 것과는 다르지만 중생들 중에도 공부하는 과정에서 전생을 본다든가 조상님들이나 귀신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건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습, 또는 타인의 생각이나 습관을 보는 것을 귀신이 보인다거나 또는 조상님과 대화를 하는 걸로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제가 옳게 보았는지요?

답변 그거는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문제가 일어나는 거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때는 도의 길이라는 것은, 보는 것도 도가 아니고 말하는 것도 도가 아니고, 만나는 것도 도가 아니고 어디서 왔다는 걸 알아도 도가 아니고, 모두가 도가 아니다. 오신통도 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대로, 말이 없더라도 그대로 보고 그대로 행해 준다면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나도 목마르면 물을 먹을 수 있는 그런 격이 바로 도의 길이다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일체를 모두 둘이 아니게 거기다 놓아라. 거기에 둘 아니게 진짜로 믿고 놓을 수만 있다면 조상님네들도 다 활현한다. 정말입니다. 이거는 제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이렇게 여러분들은, 산 사람들은 고비 고비 넘는다고 그러죠. 우리가 고비 고비 넘는 것도 ‘넘는 게 없는데도 넘는다.’ 이런 뜻입니다. 고비 고비 넘는 게 없는 고비를 넘을 때마다 그거를 잘 알게 되죠. 우리가 하다 보면은 ‘아, 이 지위에 들었구나. 여기 이 지위가 이런 거구나.’ 하고 알게 되죠. 그럼으로써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여러 가지가진데 그 한 부분만 알고선 깨쳤다고 야단들 하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있죠. 그러나 이게 통틀어서 정말이지,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그 용도를 깨달았다면 ‘내가 이렇게 됐다. 내가 이런 지위다.’ 이런 말을 안 해도…, 아마 서천국에 점 하나밖엔 될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도도하고 그렇게 멋있는 공부입니다, 이게. 그러니 어디든지 걸림이 없어요. 어디든지!

참배하고 공양할 때의 마음 자세

질문 불자들이 혹 절 앞을 지날 때에는 불전에 참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에 참배하면서 우리 불자들은 어떠한 마음을 내어야 합니까? 그리고 식사를 할 적에는 합장을 하는데 이럴 때는 주인공과 더불어 감사하는 마음만 가지면 되는지요.

답변 그게 간단해요. 만 개의 사찰을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그 만 개가 단 하나도 없어요. 거기 가서 참배를 올릴 때, 내가 그랬죠? 이 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당에서 참배를 올릴 때 왜, ‘일체제불의 마음’이라는 노래 있죠? 그와 같습니다. 즉 말하자면 저 형상이 내 형상이요, 저 마음이 내 마음이요, 저 생명이 내 생명이니 둘 아니게 ‘주인공!’ 하면 전체가 모두 하나로 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저 어디를 가셔서 참배를 올리든지, ‘주인공!’ 하면 그냥 그 부처와 나, 일체가 다 하나가 돼 버리니까요. 주인공에 감사히 생각하고 하면 그대로 그 부처님 마음도 거기에 함께 하게 돼 있습니다. 그게 비밀이죠.

그리고 공양을 할 때도 ‘주인공!’ 하면 나와 더불어 주인공이지 개별적인 주인공이 없습니다. 여러분 식사를 한 그릇 먹을 때에 혼자 먹습니까? 아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생명들이 같이 먹습니다. 그렇죠? 지금 이 몸속에 내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습니까? 그러니 내가 밥 한 그릇을 먹어도 공식(共食)하고 있죠? 그런데 그 밥 한 그릇이 또 뭡니까? 농사지은 사람, 밥 지은 사람, 뭐 뭐, 전부 거기 손길이 갔으니 모두 한데 합치면 전부 공식이에요. 그러니 공식했다는 것은, 즉 말하자면 공양(供養)입니다. 공양! 그래서 공양을 올려라 이럽니다.

어느 한 부처님에게 올리는 게 아니고 우주 삼라만상 전체에 한 그릇으로 공양을 올리고도 그 한 그릇은 되남더라 하는 겁니다. 되남아서 또 올리고, 먹어도 또 남고, 또 먹어도 또 남고 이렇게 되풀이되는 끊어지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혼자 먹어도 공양입니다. 그래서 공양! “공양하셨어요?” 이러죠, 절에서. “밥 먹었소?” 이러지 않고 “공양하셨어요?” 이러죠?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것이지.’ 해 놓고 뒷마무리가 없으면 안 되죠. ‘당신이 한 거니까 당신이 해결해야지! 당신이 구정물이 나오게 했으니까 당신이 새 물이 나오게 해서 쓸 수 있게 해야지!’ 하는 그 대치가 있어야죠. 똥을 다 누고 밑을 씻어야만이 개운하고 깨끗하죠? 그와 같은 겁니다.

나라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질문 제가 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제 마음을 깨쳐 보자고 해서입니다. 스님께서도 저희가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여기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랬는데 그거는 저희가 꿈을 꾼다든가 이런 걸 봤을 때 대략 그러하리라고 짐작은 갑니다만, 그러면 나라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있는 것인지, 그걸 여쭤 보고 싶습니다.

답변 그냥 간단하게 비유하려고 하는데요, 어떤 사람이 어린애가 죽자 그 어린애를 살리기 위해서 지옥에 들어갔답니다. 지옥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다 보니까 물이 물로 보여서 건널 수가 없고, 불이 불로 보여서 건널 수가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불에 타 죽을까 봐 건널 수가 없고 물에 빠져 죽을까 봐 건널 수가 없고, 온통 귀신들이 그냥 욱시글득시글하니까 귀신들한테 말려 죽을까 봐 못 들어가고 그래서 참 애를 쓰는데, 어떤 노승이 나타나서 “불도 불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요, 귀신도 귀신이 아니니라. 따로 없느니라.” 하는 말을 듣고 그 불로 그냥 어청어청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그려 놓은 모습일 뿐, 모습은 본래 없으니까 불에 탈 리가 없죠. 그래서 지옥에 들어가서 그 어린애 영혼을 다시 데리고 나와서 애를 살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지금도 매우 많죠. 그런데 어떤 거는 그렇게 못하죠.

그러니 여러분이 직접적인 실험을 자꾸자꾸 해 보십시오. 내 말이 거짓말인가, 아닌가? 한 찰나가 바로 저승이고 한 찰나가 이승입니다. 한 생각이 빛보다 더 빨라서 한 찰나에 천당에 가고 한 찰나에 지옥에 가고, 한 찰나가 바로 이승이며, 이승의 천국이며, 이승의 지옥이죠.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해 드려도 말로는 100% 꼬집어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진짜 나를 발견하고, 발견하면서도 습을 떼고, 또 습을 떼면서도 둘이 아닌 도리를 배우기 위해 또 습을 떼고, 또 뭉쳐 놓고 뭉쳐 놓고 가다 보면은…. 그 보적 장자 아들이 왜 일산을 바쳤느냐? 칠보로 장엄을 했지만 둘이 아니게끔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고 맘대로 자유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열반, 그 계단을 밟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 그렇게 일산을 바치고 열반계의 구정토를 다 증득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참으로 이 공부를 하려면, 손을 꼽고 기도를 해서 내가 잘되게 빌지 말고 내 한생각으로 그냥, 그냥 돌아가게 하세요. 밖에다 기도를 하면서 맹종해야 되겠습니까? 죽으나 사나 자기를 이끌고 다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자신이라고 하면은 똑 참하겠는데 왜 주인공이라고 그러느냐? 자기 몸뚱이가 공했고,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도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죠, 먹는 것도 그렇죠, 바로 가고 오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고, 만남도 그렇고 전부 그렇게 돌아가니 어떻게 주인공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다 주인공으로 인해서 그렇게 돌아가니 그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의 올바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라고 똑같이 부르면 안 되겠으니까 여러분 부모님들께서 이름을 지어 놓고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이래야 뭐를 시킬 때도 그렇고 부를 때도 그렇고, 알아듣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편하게 그렇게 이름을 지어 놓은 거지 그 이름이 말해 주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름 있기 이전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이라는 이름 있기 이전이 바로 자기, 참불성 자기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주인공이라는 이름과 참자기와 또 둘로 보지 마세요.

엊그저께 일입니다마는, 어떤 사람이 아주 죽게 됐대요. 죽게 된 것도 그렇지만 인체의 건은, 한마음 그 의식에 모두 달려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의식들을 한마음으로, 정말 주인공 자성부처로 인정을 해 준다면, 그 의식들이 그렇게 작용해서 건강하게 할 것이 아닙니까? 아니, 머슴도 존대를 해 주면서 인정을 해 준다면 자기 목숨 걸고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 집 속에 있는 생명들한테 중생이라고 그러면서 ‘아이고, 그것들 그냥 모두 세균 잡속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자기 몸뚱이를 이끌어 가는 그런 생명체들을 우습게 보니까 ‘네가 우습게 보는데, 뭐.’ 하고 거기에 따라서 그대로 그냥 움죽거리는 거죠. 어린애를 자장자장 하니까 곰이 그것을 흉내 내서 자장자장 하다가 어린애를 죽이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미련스럽거든요. 그러니까 내 마음을 잘 내서 오직 나로 인정을 해 줄 수 있다면, 바로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이치가. 자기를 자기가 죽일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몸은 스스로 건강해지는 거죠.

또 내 주인공과 자식의 주인공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고, 내 자식이 저렇더라도 주인공은 둘이 아닌데, 뭐.’ 그러고선 주인공에다 맡겨 놓으면 그 주인공까지 또 밝아지거든요. 이 얼마나 좋은 행입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좋은 법을 가르치셨는데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은, 요 물 컵 하나에 물이 이렇게 담겨야 그릇에 물 담긴 걸 볼 텐데, 요렇게 쓰러뜨려서 반쪽으로 해 놓고서는 요 물, 요것만 보게 만들어 놨으니 그 가르침이 이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 당장 지금 부모만 우리 부모인 줄 알게 돼 있죠. 그러나 부처님께서 해골 무더기에다 절을 하실 때에는 ‘야, 미생물에서부터 거듭거듭 수없는 광년을 거쳐 진화돼 오면서 내가 어느 생에 벌레의 부모가 안 돼 본 예도 없고, 사람의 부모가 안 돼 본 예도 없고, 사람의 자식이 안 돼 본 예도 없고 또 벌레들의 자식이 안 돼 본 예가 없느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그러니 모두가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없으니 지금 당대의 이 부모만 부모로 알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더 지혜를 넓혀서 크게 본다면 그냥 아주 바다로 나가서 용이 돼서 올라왔다 내려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춤을 출 겁니다, 아마.

재차 한마디 하겠는데요, 그대로 우리가 공부하면서 실천으로 옮겨 가려면, 병고든지 가난이든지 안되는 일이든지 뭐든지, 그 용도에 따라 닥쳐오는 대로 일체 만법을 공부하는 재료로 삼으세요. 그런다면은 앞으로…. 여러분이 ‘야! 이런 거구나! 이런 거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고 한 번 쳐다보고 웃고 한 번 내려다보고 울어 보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를 겁니다. 학설로만 알아서 ‘큰스님이다. 내가 다 알고 있다. 또 내가 다 알고 이렇게 행하니깐 뭐 물을 것도 없고 자실 것도 없고 뭐 그렇지.’ 이렇게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내가 빨리 하겠다고 생각도 마시고요. 이것은 빨리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빨리 안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목마르면 이렇게 그냥, 시간도 공간도 없이 내가 목마르면 그냥 마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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