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경지’, 詩로 노래한 문장가

정주학 유학자로 노장에도 관심
대흥사 융신·지헌 등과 깊이 교류
장서 1600권 소장… 불교에 박식
송광사·도갑사 등 유람한 시 남겨


▲ 국보 제144호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구정봉의 서북쪽 암벽을 깊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높이 8.6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홍석주는 월출산 등을 유람하며 불교에 관한 시 몇 수를 남겼다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1774~1842)은 주자학에 밝았던 조선 후기의 명망 있는 권문세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홍인모(洪仁模)와 어머니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는 모두 문장에 뛰어났다. 그의 아우 홍길주(洪吉周1786~1841)는 사마천에 견줄 만한 문장가라 칭송된 인물이었고 홍현주 또한 시문에 능한 문장가로, 정조의 둘째 딸인 숙선옹주와 혼인하여 영명위(永明尉)로 봉해졌으니 그의 집안에 문벌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원래 그는 노론, 낙론 계열인 김창협과 김원행의 학문을 이었으며 연경을 다녀온 후 청초(淸初)의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의 학문에 깊이 매료된다.

정주학(程朱學)에 기초를 둔 유학자였던 그는 노장사상에도 관심을 두어 〈정노(訂老)〉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뿐 아니라 그의 천재성은 이미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대학자로서의 기틀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력과 학문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승려들과도 폭 넓게 교유한 흔적은 그의 시문을 통해 드러나는데 아우 홍현주와 교유했던 초의 스님뿐 아니라 도갑사 승려인 견유(見留)와 대둔사(현 대흥사) 승려 융신(戎身)과 지헌(指軒), 그리고 승제(勝濟) 스님 등과도 깊이 교유했다. 이뿐 아니라 그는 도갑사와 대둔사, 송광사 같은 사찰을 유람하면서 남긴 수편의 시문이 전해진다. 그러므로 그는 정주학에 매진한 선비였지만 노장학이나 공사상뿐 아니라 불교의 교리에도 깊이 천착했던 유학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박학다식하여 그가 읽었던 장서만도 1,600권이나 되었다고 하고 그가 읽은 방대한 양의 책들을 분류하여 〈홍씨독서록(洪氏讀書錄)〉이라 명명했다고 하니 이는 그의 학문적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홍씨독서록(洪氏讀書錄)〉의 서문에 “내가 일찍이 읽어 감명을 받은 것과 대개 읽고 싶었으나 읽지 못한 책을 골라 그 제목을 나열하고 이에 대한 개요를 기록했다”고 하였고, 동생 헌중(憲中)이 자신처럼 책을 읽어 요령을 얻지 못할까 염려해서 이 책을 지었다는 명분도 또렷이 하였다.

한편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월출산과 대둔사를 방문했을 때 지은 시문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그가 월출산 산정(山頂)의 상견성암(上見性庵)에 올라 희작(戱作)한 시에는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월출은 부처의 마음이고(月出爲印心)
높은 산봉우리는 곧 견성이라(峰高名見性)
어찌하여 견성인가(如何是見性)
몸이 무상등에 있어서라네(身在無上等)
일체의 모든 고해의 상이(一切諸苦相)
울타리를 잡고 다시 돌다리로 이어졌네(攀蘿復緣?)
점차 발꿈치를 가두지 않는다면(稍不牢脚?)
천 길의 함정으로 실추되리라(失墮千尋穽)
이미 만들어진 후에는(及其旣造後)
절로 차별 없는 경지를 이루네(亦自無別境)
만약 차별의 경지를 구한다면(若更求別境)
이는 대승의 경지라 말할 수가 없네(是不名上乘)
즐겁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도 없고(無喜故無怖)
동(動)을 잊었기에 정(靜) 또한 잊었네(忘動亦忘靜)
구름이 걸친 숲은 보리가 아니며(雲林非菩提)
바다에 뜬 달도 밝은 거울이 아니라(海月非明鏡)
코끼리 털에 파리를 불자로 터니(象毛蠅拂子)
유리구슬이 이마를 뚫네(琉璃珠貫頂)
나의 법안으로 보니(我以法眼觀)
모든 경계가 공하네(空諸所有景)
어찌 그릇된 생각으로 꾸미리오(何??妄身)
금벽이 서로 비치네(金碧交輝映)
함께 해탈하는 것만 못하니(不如俱解脫)
다만 맑고 고요한 물에 있을 뿐이라(?存水淸淨)

 연천이 앞에 인용한 시를 지은 것은 두륜산과 송광사를 유람할 무렵인 듯하다. 당시 그는 이곳을 유람한 후 ‘두륜산유기(頭輪遊記)’와 ‘송광유기(松廣遊記)’를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유람시기의 선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암의 월출산에 올라 지은 것이 분명하다. 월출산 산정에서 지은 시에는 “월출산 산정에는 암자가 있는데 이름이 상견성이다. 무심이 게어(偈語)를 짓는다(月出山頂有庵 名曰上見 戱作偈語)”라고 하였으니 상견성암의 승려들과 선을 주제로 담소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에 앞서 그는 ‘밤에 월출산 도갑사에서 묵으며(夜宿月出山道岬寺)’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에 “관등 하나가 항하를 비치니(夜宿月出山道岬寺)/ 산사의 차가운 종은 소리 내어 답 하네(山寺寒鍾答鼓?)”라고 하였다. 따라서 앞에 인용한 시는 그가 도갑사에 묵은 후 월출산을 올랐거나 아니면 월출산에 오른 후 도갑사에서 하루 밤을 머물렀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심인(心印)’이나 ‘견성(見性)’, ‘법안(法眼)’, ‘보리’같은 불교 용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점이다. 특히 초구(初句)에 월출(月出)은 그가 오른 산 이름으로 해인(海印), 심인(心印)에 배대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그 심연이 깊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그의 박학다식은 이미 알려진 사실로, 이미 1600여 권을 넘는 방대한 독서량을 보였던 그이기에 해박한 불교의 이해는 조선 후기 불교를 만난 유학자들의 공통된 정서이기도 하다.

한편 그가 도갑사를 떠날 때에는 비가 내렸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도갑사를 떠나야만 했던 전후 사정이 알 수는 없지만 “앞길엔 기이한 볼거리가 있으니(前行有奇觀)/내 수레 더 머물 수가 없네(未可淹吾駕)”라고 말한 연천의 여유는 조선 선비의 기품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가 도갑사를 출발하며 산승 견유에게 답한(冒雨出道岬 答山僧見留者)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묵은 구름이 산으로 돌아가지 않아도(宿雲不歸山)
맑은 샘물이 끝없이 흐른다네(石泉澄餘瀉)
산승이 봄나물을 잘라다가(山僧剪春蔬)
비바람 부는 밤, 나를 위로하였네(慰我風雨夜)
아득한 진흙길, 실로 건너기 어려운데(脩塗信難涉)
후한 뜻에 거듭하여 감사하네(厚意重堪謝)
앞길엔 기이한 볼거리가 있어서(前行有奇觀)
내 수레 더 머물 수가 없네(未可淹吾駕)

 

▲ 불교에 심취했던 홍석주는 정주학을 기초한 유학자였다. 그의 저술 〈학해〉
도갑사 산승은 봄나물을 잘라다가 정갈한 공양을 준비했을 터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저녁, 따뜻한 소찬은 속객(俗客)을 위로하기에 충분한 공양물이다. 더구나 산승의 신실한 성의는 연천의 심신을 흡족하게 했으리라. 그러기에 그는 “후한 뜻에 거듭하여 감사하네(厚意重堪謝)”라고 말한 것이다. 시의 묘미는 이처럼 함축적이다. 따라서 그는 사람의 마음을 거쳐 드러나는 것이 시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런 그의 견해는 ‘답김평중논문서(金平仲論文書)’에 “대저 시란 어디에서 나오는가. 기(氣)에서 나온다. 어디에서 발하는가. 정에서 나온다. 기는 하늘에서 나오고 정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하늘과 사람의 오묘한 느낌 중에 (시) 이것보다 먼저 나오는 것은 없다(夫詩奚出乎 出于氣 奚發乎 發于情 氣出於天 情出於人 天人之妙感 莫是先焉)”라고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에서 천(天)은 이(理)나 도(道)를 말한다.

“기는 하늘에서 나오는 것”라 하였다. 결국 시란 도에서 흘러나와 사람의 마음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가 “마음 밖에 문이 없고 도 밖에 마음이 없다(心外無文 道外無心)”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시작론(詩作論)이기도 하다.

한편 불교의 공(空)에 대한 또렷한 그의 인식은 대둔사의 융신과 지헌 두 스님에게 써준 시에 나타난다. 당시 그는 대둔사의 두 스님과 선을 담론했을 터다. 그러기에 마침 도갑사에서 지은 게어(偈語)를 고쳐 두 수를 지었다고 했고, 또 이별할 때에 네 게어(偈語)를 지어 두 스님에게 주었다(留宿大芚寺 與戎身指軒兩老宿談禪 遂就道岬所作偈語 成兩首 又別作四偈以贈之)고 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공에 대한 인식은 대둔사 승려 융신과 지헌 스님과의 담론에서 그 규모를 드러낸 셈이다. 두 스님에게 지어 준 시 중에 두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밥을 다 먹고 나서(飯食旣畢已)
발우를 닦은 후 미타를 염불하네(撲鉢念彌陀)
빈산엔 사람의 자취마저 끊어졌는데(空山不見人)
물 흐르고 무심히 꽃이 피었네(流水與閒花)
겨울에도 보리수는 푸르고(冬靑菩提樹)
바다에 뜬 달, 명경대로다(海月明鏡臺)
본래 일물도 없는 것인데(本自無一物)
어찌 먼지를 닦으려 애쓰리오(何勞拭塵埃)

물을 색이라 말한다면(若道水是色)
잡아도 자취가 없고(執之不見跡)
만약 물을 공하다 말한다면(若道水是空)
보면 곧 색이라(視之卽有色)
색도 아니고 또 공도 아니라(非色亦非空)
어찌 분별이 일어날까(何更起別見)
서강의 강물을 다 마셨으리니(吸盡西江水)
 그대는 한 바퀴 돌려주시길(請君下一轉)

연천의 불교의 정곡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본래 일물도 없는 것인데(本自無一物)/어찌 먼지를 닦으려 애쓰리오(何勞拭塵埃)”라고 말한 것이다. 더구나 그의 시에는 혜능선사의 게송인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본래에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서 티끌이 일어나리오(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한 것과 상통한다.

따라서 이는 연천의 불교에 대한 박학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인 셈이다. 실로 연천은 불교의 정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유학자라 하겠다. 그의 초명은 호기이며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이다. 179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직장, 검열 등을 역임하는 등 그의 환로(宦路)는 비교적 순탄하여 이조 판서, 양관대제학, 좌의정에 오르기도 하였다. 세손(世孫)의 사부(師傅)로, 헌종과 인연을 맺은 후 세도정치에 참여했다.

1836년 남응중의 모반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削奪官職) 되었다가 1839년에 다시 복권되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연천집(淵泉集)〉, 〈학해(學海)〉,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동사세가 (東史世家)〉, 〈학강산필(鶴岡散筆)〉, 〈상서보전(尙書補傳)〉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