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파수꾼 최선일 박사

최선일 박사는 …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선일 박사는 1990년 홍익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2006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원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 2003년까지 강진청자자료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있었으며 2003년부터 현재까지 문화재청 인천공항 문화재감정실관 감정위원으로 있다. 경기도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2009년부터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을 맡고 있다. 1996년 강진 고성사 현주 스님으로부터 ‘견철(見哲)’ 법명을 받았으며 2013년 현 불교중앙박물관장 화범 스님으로부터 ‘고불(古佛)’이란 호도 받았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조각승과 불상연구〉와 〈조선후기승장인명사전-불교조소〉가 있으며 논문은 〈조선후기 전라도 조각승 색난과 그 계보〉, 〈순천 동화사 목조삼세불좌상과 조각승 계찬〉 등 40여 편을 썼다.
10년 넘게 전국사찰 300여 곳 답사
匠人 스님 ‘승장’ 6000명 실체 밝혀
문화재 근간 밝히고 환수에도 기여
재일교포 정조문 회장, 다큐영화 제작
불교문화재센터 건립 서원 세워

성보문화재를 접하다 보면 문득 생기는 의문이 있다. ‘과연 이런 작품은 당시에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이다. 우리는 사찰에서 불상과 불화 등 수많은 성보들을 접하지만 정작 이런 성보를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 대부분이 스님들이 만들었음에도 이런 스님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이런 스님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이가 있다. 바로 미술사학자 최선일 박사다. 최 박사는 20여 년 동안 전국 사찰의 성보를 만든 옛 스님들의 발자취를 조사해 그들이 빛을 보도록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17~19세기 조선시대 곳곳의 사찰에는 불상과 불화를 만든 조각승과 불화승들을 비롯한 수많은 승려장인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잊혀진 ‘승장’이죠. 수행과 함께 장인으로도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들이었습니다.”

11월 24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에서 만난 최 박사는 먼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최 박사는 “예로부터 사찰에서 불사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으며, 승장(僧匠)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설명했다.

불상을 좋아한 불심이 승장 연구로
최 박사가 ‘승장’에 대해 주목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1997년 전남 강진청자박물관에 학예연구사로 일하게 된 최 박사는 여가시간을 활용해 인근 사찰을 답사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처님 모습이 나온 사진을 스크랩할 정도로 부처님 상호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사찰을 돌아본 최 박사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인근 사찰의 불상이 비슷했던 것이었다. 한층 강해진 궁금증에 불상을 꼼꼼히 살펴본 최 박사는 동일한 조각승이나 같은 계보에 속한 스님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됐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있나 찾아보았어요. 승장에 대해 조사한 것은 산별적으로만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최 박사는 2001년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일하게 되며 승장에 대한 기록물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

“성보를 문화재로 지정할 때 근거자료가 절실함에도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조선후기 작품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은 연원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문이나 화기에 작가의 이름이 있더라도 자료가 아예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근거자료만 있으면 충분히 문화재로 지정이 가능할 만큼 훌륭한 성보인데도, 자료가 없어 지정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최 박사는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이미 수백 년 전 활동한 승려 작가들의 기초자료 조사가 끝나 이에 기반해 개별 승장들에 대한 평전, 논문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2000년 12월 17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조각승 색난 스님의 활동과 불상 양식을 학계에 처음으로 알리는 논문 ‘조선후기 전라도 조각승 색난과 그 계보’를 쓴 이후 최 박사는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짬짬이 전국 사찰 300여 곳을 돌았다.

각 사찰에 전하는 사적기(寺蹟記)라든가 사적비(寺蹟碑), 상량문과 탑비 등의 자료를 모조리 훑었다. 또 불상 발원문, 불화의 화기, 사찰의 사적기, 비문 금석문 등이 있다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사진을 찍고 글로 옮겼다.

“한번 기록을 남기기 위해 평균 세 번 정도 사찰을 방문했습니다. 처음 방문 시 사찰 스님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사정을 설명 드리죠. 그 과정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사찰 입장에서도 생판 모르는 학자가 문득 찾아와 문화재를 보자고 하면 허락하기 어렵죠. 수차례 방문해 사정을 해가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갔지요.”

2008년 3월 화성 용주사 지장전 불상 조사 모습.
조각·공예·회화 등 망라한 사전 펴내
홍익대 미술사학과 선배인 안귀숙 박사가 최 박사에게 큰 도움이 됐다. 함께 승장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해 나갔으며 조선 후기 6,000명에 달하는 스님 장인들의 실체를 밝혀냈다. 최 박사는 안 박사와 함께 이런 내용을 정리해 학계 최초로 〈조선후기 승장 인명사전〉을 펴냈다. 2007년 ‘불교조각’ 편을 시작으로 2008년 ‘불교회화’, 2009년 ‘공예와 전적’, 2010년 ‘건축과 석조미술’ 편이 나왔다.

이 인명사전은 1600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 성보를 만든 승장들의 주요 창작물과 활동 내역을 처음 밝힌 귀중한 자료다. 최 박사는 “기초자료 2,000여 건을 바탕으로 10년 넘게 자료를 갈무리했다”고 했다. 건축가로 활동한 스님만 1925명에 달하고 직접 석비 등을 세운 도편수 스님만 632명이 넘었다.
최 박사는 ‘승장’의 위상이 당시에 높았다고 설명했다. 최 박사는 대강백 등의 표기가 있는 화기 등에서 당시 스님들이 여러 분야에 통달했으며, 그 역할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사찰 불상의 발원문과 사적기 등을 보면 대부분이 스님들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이들 스님들의 작품 경향과 사제간의 계보 등을 밝히는 일은 불교미술사의 저변을 넓힐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근간을 밝히는 작업입니다.”

최 박사는 불교의 흥기였던 신라와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억불숭유의 시기였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맥을 이어왔다고 설명한다. 당시 유학자들이 공예를 천시했기에 스님들이 있어 그 명맥이 이어져 올 수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런 승장들의 맥은 왜 잊히게 됐을까. 최 박사는 조선 후기 가람정비가 완료되며 신규불사가 줄어든 것을 주요원인으로 짚었다.

“임진왜란 전후 사찰 중창과 중건은 승장(僧匠)들이 주도했습니다. 그 이후 후기로 가며 점차 민간이 이를 맡게 됩니다. 이판과 사판의 구분이 강해지고, 승단 내에서도 승장에 대한 인식이 약해지는 것도 한 요인입니다. 또 불상과 공예품이 사찰마다 이미 구비돼 있어, 승장으로 대변되는 전문장인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지요. 이후 불사에서는 일반 민간의 장인들이 본격 참여하게 됩니다.”

최 박사는 승장들의 존재를 알리는 일은 이들이 지닌 원력을 현재의 불자들이 이어가게 하는 밑바탕이라고 강조했다.

“불사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주한 이의 원력과, 평생을 불모로서 바친 장인의 원력이 함께 녹아든 결과입니다. 이런 원력 하에는 스님과 대중들의 구분이 없었어요. 이런 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최선일 박사가 펴낸 저서들. 상단의 책들이 〈조선후기 승장인명사전〉이다.
문화재 가치 재조명하는 근간
최 박사는 현재의 법맥, 강맥과 같이 불화와 조각 등에도 계보가 있다고 설명했다. 도제식으로 어른 스님이 젊은 스님에게 이를 전하고 이것이 유파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화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계에서 아직까지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바가 없어요. 제 남은 과제가 이런 맥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최 박사는 이런 장인과 맥을 중심으로 연구하면 자연스럽게 문화재를 재조명하게 되는 효과를 지닌다고 덧붙였다.

“예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소장한 청허당대사 진영을 들어보겠습니다. 이 진영은 화기가 없어 그 가치를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승장을 중심으로 조사하면 다릅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1703년에 행규 스님이 쓴 〈용천지〉에 당시 의상, 보각, 청허, 송운, 동운 등의 진영을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진영이 양식적으로 시기가 앞선 작품일 것으로 추정되고 문헌이 남아있어 같은 작품으로 보아도 충분합니다. 이를 토대로 1700년대 전반에 그려진 다른 진영과 청허당대사 진영을 비교하면 18세기 초반 진영의 양식적인 특징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미국 LA카운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범어사 칠성도와 미국 포클랜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도 운문사 신중도의 제작 시기와 사찰 등도 최 박사가 이러한 방식으로 밝혀냈다.

“당시에 사찰에서 불화를 조성할 때 유명한 스님들을 초빙하면서 여러 점을 함께 만들었죠. 포클랜드박물관에 소장된 청도 운문사 신중도의 경우 화기가 잘려진 상태로 일부 글자만이 남아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운문사, 운흥사 신중도의 화기와 대조하면 화기가 동일했죠. 동일 시기에 한 스님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승장 조명은 문화재 환수에도 활용
이런 최 박사의 노력은 지난 2014년 5월 불교계를 떠들썩하게 한 도난 불교문화재 환수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인사동 마이아트옥션에 출품된 불교문화재를 조계종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등 자료와의 대조를 통해 근거를 밝혀냈고, 조계종 표창까지 받았다.

“예를 들어 당시 고성 옥천사 나한상 2점의 경우 옥천사에서 도난당한 7점 중 일부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이 나한상은 색난 스님의 작품인데 사진 상의 유사점과 함께 현재 이 도난품의 양식 등이 색난 스님 작품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등의 근거를 대야했지요.”

최 박사는 승장에 대한 불교계의 관심이 결국 해외에 유출된 불교문화재를 환수하는 데도 이어진다고 했다.

“여러 사정이 있지만 결국 불교문화재가 해외에 떠도는 것은 우리가 이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 결국에는 다시 돌아오는 기회가 만들어 집니다. 우리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불자들이 찾게 됩니다. 또 소장하는 이들도 중요성을 더욱 느끼게 돼 더욱 잘 보존하게 되고, 인연이 된다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이런 취지에서 인간문화재 20여 명으로 구성된 나우회 모임도 후원하고 있다. 나우회는 해외반출문화재를 재현해 전시활동을 진행하고, 이 수익금으로 해당 문화재 환수를 추진하고 있다.

“보통 20~30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신 분들이에요. 전통기법을 이어 이 시대에 재현하는 것도 무형의 재산입니다.”

2015년 5월 전국국제영화제서 영하 ‘정조문의 항아리’를 선보이는 최선일 박사
문화재는 모두가 향유해야 할 자산
최 박사는 문화재는 모두가 함께 향유해야 하는 자산이며 그런 의미에서 일본 내 한국문화재를 수집하고 가치를 재조명해온 정조문 선생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최 박사는 정조문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 ‘정조문의 항아리’ 제작에 PD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조문 선생은 한국의 간송 전형필 선생과 같은 분입니다. 재일교포로 일본인이 수탈해간 한국문화재를 일본에서 보며, 민족의 정신이 강탈당했다고 느끼셨어요. 1924년 6세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파칭코 사업으로 번 돈을 스스로에게는 쓰지 않고 그 돈으로 한국문화재 1700여 점을 수집합니다. 이어 일본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인 쿄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워 한국문화를 알렸죠.”

여기에 최 박사는 2001년 고려미술관이 소장한 색난 스님이 만든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을 조사하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전했다.

“개인이 소장한 문화재를 그렇게 흔쾌히 내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의 문화재를 보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 고려미술관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정조문 선생님의 큰 딸이 운영하는 교토의 찻집에 가면 우리 선조들이 쓰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지요. 생전에 만나지도 못했지만 이를 통해 정조문 선생님의 사상과 사고를 흠모하게 됐습니다.”

최 박사가 제작한 ‘정조문의 항아리’는 3년 동안 340명의 후원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전주 국제영화제와 DMZ다큐영화제에 초대작으로 상영됐다.

최 박사는 승장에 대한 연구도 결국 우리 문화재를 함께 공유하자는 취지에서라고 덧붙였다.

“사실 그동안 개별 스님에 대한 자료는 학자들이 가지고 있었어요. 학자들 사이에는 자료를 독점해 갖고 있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는 어떤 발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되도록 자료를 공유하고, 후학들을 위해 제공해야 학문도 발전하는 것이지요. 승장에 관련된 사전을 내고, 또 관련 자료를 책으로 계속 내는 것도 다른 학자들이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해서입니다.”

최 박사는 “불화승, 주종장, 목수, 와장, 각수 등 승장 활동에 대한 전체 조사 후 개별 작가론, 평전 연구로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을 맺었다.

2015년 6월 나우회 전시회를 진행하는 최선일 박사
불교문화재 공유하는 센터 건립이 꿈

현재 인천공항 문화재감정관실에서 일하고 있는 최 박사는 2009년 6월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도 세워 학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 인연을 맺은 대원사 석문 스님이 소장으로 최 박사는 현재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17평 남짓한 이곳은 함께 공부하는 이들의 공동체 공간입니다. 누구나 와서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곳이지요.”

학자로서는 북한의 문화유산 연구도 진행할 예정이다. 최 박사는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전문위원으로 북한 불교문화재를 총 망라한 〈북한의 문화재〉 간행에 참여했다.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차원에서 2016년 개성의 문화재를 주제로 학술대회도 연다.

최 박사는 우리 전통문화와 관련된 서적을 모은 문화센터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현재도 연구소에 중복된 서적 등을 속초 보광사에 보내 불교도서관을 만드는데 돕고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사찰은 문화재를 홈페이지 등에 올리고, 사람들이 찾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찰 역사를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또 재정이 열악한 사찰에서는 문화재를 조사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부분도 역량이 되는 한 돕고 싶습니다. 우리의 불교문화재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을때 더 가치가 높아지지 않을까요.”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