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보 前 제주청소년교화연합회장

김영보 前 제주청소년교화연합회 회장은 … 1960년 고등학교 시절 관음사서 요양하며 불교에 귀의했고, 1980년 관음사 사무장 소임 당시 ‘10·27’ 법난을 경험 했다. 1983년에는 제주불교법우회 회장을 통해 제주불교 신행단체 발전에 노력하다가 청소년 단체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 1996년 제주청교련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제주특별자치도내 청소년 단체의 활성화를 꾀하는데 기여했다. 김 前 회장은 청교련제주지부 설립부터 현재까지 20여년 동안 도내 유관기관 및 사업장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청소년들의 교과외 활동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할 수 있도록 홍보했다. 또한 2010~2014년까지 4년 동안 제주청교련 회장직을 수행하며 다양한 청소년참여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는데 노력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국 청소년지도자 대회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청소년이 잘사는게 불교
1996년 제주에 청교련 창립 산파 역할
아시아 축제 개최, 유해환경 감시단 조직
‘끼 Zone’ 동아리 사업 등 인성교육 강화
〈불교가 청소년을 위해 할 일〉 석사 논문
올 9월 전국 청소년지도자대회서 표창


제주불교계는 60만 제주도민 가운데 30만이 불자이고, 경남과 부산에 이어 전국서 3번째로 불심이 높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제주불교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 포교는 정체가 아닌 침체에 빠진 현실서 이는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릴 뿐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1996년부터 청소년 포교에 원력을 펼치고 있는 김영보 前 (사)제주특별자치도청소년교화연합회 회장(67)의 신행생활은 귀감이 되고 있다. 김 회장의 삶 자체가 불교고, 수행이기 때문이다. 김 前 회장은 ‘청소년이 잘 사는 게 불교’라는 일념으로 청소년 포교 원력을 세워 일선에서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원력은 불교 집안인 내력에서 비롯됐다. 불심이 돈독한 집안서 태어난 김 前 회장이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던 지난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폐결핵을 앓게 된 김 前 회장은 3년 동안 요양차 집 인근에 있던 조계종 제 23교구 본사인 관음사로 들어간다. 산사생활을 하면서 그는 매일 예불을 올리고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아!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하고 불교의 참 맛에 빠져 들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김 前 회장은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도 괜찮겠다’라는 발심을 하게 된다.

이후 폐결핵이 호전돼 군 복무를 마친 뒤 출가를 하려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꿈을 접었다. 출가는 무산됐지만, 이 시기가 김 前 회장에겐 불교적 삶의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1976년 도내 최초의 신행단체인 제주불교법우회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1980년 관음사 종무소 사무장 소임을 맡으며 불교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도 바로 이런 인연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 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뜻하지 않게 김 前 회장은 ‘10·27 법난’에 휘말리며 당시 군경에 의해 고문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관음사 중앙포교당 건물이 완공되면서 사무장을 맡게 됐습니다. 법난 발생 하루 전인 26일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종무소로 출근했는데 총을 찬 두 명의 군인이 저를 종무소로 끌고 간 후 현금출납장부를 뒤지더니 군기무대로 연행해 갔습니다. 그 곳에는 이미 당시 관음사 주지인 지선 스님(현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관음사 총무국장 연종 스님, 관음사 신도회장 故 고원규 씨도 연행돼 있었습니다.”
고초를 겪고난 이후 김 前 회장의 본격적인 신행 활동은 1983년 법우회 회장 소임을 맡으면서 부터다. 관음사 중앙포교당(현 제주은행 본점 맞은편 중앙주차장)서 매주 예불, 천수경 독송, 108참회 등의 참회법회를 열었다.

올해 9월 전국청소년 지도자 대회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는 김영보 前 제주청교련 회장.
“이것이 불자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의무감처럼 열심히 했습니다. 참회 법회를 열면서 내 자신을 내려놓는 계기가 됐습니다. 매일 매일의 기도와 신행은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저의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남을 위해 봉사해야 겠다는 발심도 바로 이때 많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이후 1990년대 초 관음사 자비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김 前 회장은 그 무렵 관음사 측이 ‘중앙포교당을 없애겠다’고 선포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자비 회원들에겐 제주불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포교당을 더 짓지는 못할망정 없앤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포교당에 주차장 시설이 들어서면서 연화유치원을 비롯해 법우회 등의 신행단체, 대불련, 룸비니 등 청소년 단체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이런 어려움이 지속되던 지난 1996년 김 前 회장은 ‘불자 청소년들이 봉사인증을 받을 수 있는 단체는 청교련 밖에 없다’는 불교계 뉴스를 접하고는 머리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바로 해야 할 일이 이거였구나’라고 깨닫게 됐다. 김 前 회장의 청소년 포교 원력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김 前 회장은 바로 청소년교화연합회(이하 청교련) 중앙회에 전화를 걸어 제주지역에 청교련을 창립하겠다고 뜻을 내비쳤다.

청교련 중앙회는 그동안 제주지부를 설립하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나서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뜻하지 않던 희소식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김 前 회장은 곧바로 김수진 관음사 前 신도회장에게 곧바로 달려갔다. “그때까지 제주도는 청소년 포교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아니 인식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뜩 누가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불교를 짊어질 청소년 포교가 진정한 인재 불사라고 계속 설득했지요.”
끈질긴 김 前 회장의 구애에 관음사 자비회원들을 모두 이사진으로 등록하고, 고봉식 당시 제주관광대 총장을 초대 지부장에, 조명철 당시 제주시교육장 등을 이사 등으로 운영진을 꾸렸다. 그리고 그해 제주도내 중·고생 2,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소년들에게 도덕성을 키워주는 윤리회복실천대회 및 캠페인을 남녕고등학교 체육관서 열고 제주도청까지 캠페인을 벌이며 제주청교련의 첫 출범을 알렸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아시아청소년축제 및 국제캠프대회를 김녕해수욕장 일원서 개최한 가운데 외국인 80명과 전국에서 50명, 제주도 청소년 220명 등 총 350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며 본격적인 청소년 포교에 닻을 올렸다.

“현 불교계의 가장 시급한 포교분야가 바로 청소년을 위한 것입니다. 청소년 시기는 인격 완성을 향해 나가는 무한한 잠재력의 기간이죠.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이 시기, 청소년들에게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세상 속에 진리가 무엇인지를 바로 보라’ 했듯이 제주청교련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 현상에 경각심을 갖고 세상의 진리가 무엇인지 바로 보는 ‘안목’을 길러주는 역할을 해야 겠다고 원을 세웠죠.”

2012년 시민포교당서 열린 봉축 기념 점등법회. 사진 맨 왼쪽이 김영보 前 회장이다.
김 前 회장은 15년 동안 제주청교련 임원직을 묵묵히 수행하다 지난 2010년 1월 회장 소임을 맡으면서 청소년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관점서 청소년들의 창의력을 키우는데 힘써 왔다. 1998년 12월 5일 부터는 우리문화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서바이벌 퀴즈’를 실시했다. 급격히 확산된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잊혀져가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의 우수성 홍보는 물론 퀴즈대회 준비과정을 통해 청소년 인성교육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1999년 청소년들의 건전한 여가문화의 징검다리인 YP(청소년 스스로지킴이) 운동, 청소년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는 주변환경 조성을 위한 청소년 유해환경 감시단 조직을 해 나갔다. 이후 2001년에는 사이버지킴이(cyber keeper) 활동을 통해 사이버 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유해요소로 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고, 청소년들의 끼를 발산하는 ‘끼 Zone’ 동아리 문화존 사업과 부처님 가르침을 한지 위에 표현해보는 초·중·고생 서예백일장 대회 등 청소년들의 자아정체성 확립에 도움을 주고자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뛰어다녔다.

제주청교련 활동을 왕성하게 할 무렵 김 前 회장은 지도자 연수 교육 차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지인의 소개로 그는 자명 스님(서울 마하보리사 주지)과의 운명적 만남을 가진다. 동국대 김성철 교수가 자명 스님의 수행력을 높이 전했기 때문에 더욱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청교련 지도자 연수가 끝난 후 그는 늦은 밤 11시 30분 자명 스님을 친견했다.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김 전 회장이 처음 ‘인연’에 대해 물어보자 스님은 “거사님, 인연은 불교 용어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어 김 회장이 “스님, 그럼 불교가 뭡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평등입니다”라고 답하자 김 회장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김 회장은 마음속으로 ‘대단한 스님을 만났다. 이 스님을 스승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 한 후 ‘불교가 평등하다’는 그 참 진리를 들어봐야겠다고 싶었다. 다음날 다시 스님을 찾아가 “불교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스님의 “일주일에 두 번만 오세요”라는 말씀에 거리상 스님을 제주도로 모시고 와서 공부하기로 했다. 이후 제주도내 불자들이 자명 스님을 모시고 1주일에 이틀 동안 늘 새벽까지 공부를 했다.

“불자들은 많이 모였지만 스님의 충격적인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사실 그동안 배워왔던 불교의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자존심이 상했던 겁니다. 스님 말씀이 들을 땐 그럴 듯하지만 조금 있으면 생활 속 습에 의해 잊혀 버렸던 거죠. 하지만 불교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토론하고 비판하면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2013년 4월 열린 제주 청소년 문화제서 축사를 하고 있는 김영보 前 제주청교련 회장.
김 前 회장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좀 더 집중적으로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청소년 포교에도 스님의 가르침을 활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결실은 자명 스님과 여름 및 겨울 방학 때 대불련 학생들을 데리고 전국을 돌며 신행활동을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학생들에게 스님의 끊임없는 학구열은 큰 귀감이 됐습니다. 스님은 학력도 전법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방송통신대, 동국대 석사, 박사 학위를 따는 등 늦은 나이지만 전법에 필요한 토대를 닦아 놓으면서 스펙(?)을 넓혀 나가셨습니다. 스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제자들과 청소년들도 함께 공부하는 면학분위기도 자연스레 조성이 됐지요.”

그리고 김 前 회장이 더욱 공부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떡집을 운영하고 있던 저에게 하루는 스님이 ‘떡장사한테 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더군요. 기분이 나쁘기 보다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부를 하라는 경책이셨지요.” 즉시 김 前 회장은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처음 대학 문을 두드렸다.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방송통신대 제주지역대학을 4년 반 만에 졸업했다. 한번 일으켜진 향학열은 계속 이어졌다. 그 해에 바로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입학해 매주 이틀 씩 서울을 오가며 2년 반 만에 〈한국불교 청소년 포교 필요성 연구〉란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고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다.
오기와 집념이 이뤄낸 큰 성과였다. 김 前 회장은 “석사 학위는 시험만 보면 취득 할 수 있지만 석사 논문을 꼭 쓰고 싶었습니다. 15년 동안 청교련 활동을 하면서 ‘과연 불교가 청소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항상 화두였는데 그 연구를 하면서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신행생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저에겐 중요한 과제 였거든요. 청교련 창립은 처음에 불교 포교의 입장서 시작했지만, 결국 청소년들이 잘 사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불교가 잘사는 길 아닙니까? 불교적 가르침을 통해 청소년들이 행복해 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 포교의 근본 목적이라는 걸 절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자명 스님을 통해 불교 인생의 진로를 찾게된 김 前 회장은 큰 스님들의 통찰력 있는 즉문즉설로 불자들, 학부모, 청소년들이 갖는 일상적 마음 고민 해결을 위한 자리도 만들었다. 혜국 스님을 시작으로 자명 스님 등 선지식들을 초청한 토크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콘서트에서는 어렵기만 하고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은 학교폭력과 불자들의 고민을 알기 쉽고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기회가 됐습니다.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고민을 들어주고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는 의미있는 자리로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청소년 포교’를 화두로 20여년 간 청소년 교화에 힘써온 김 前 회장은 그동안의 노고를 인정받아 올해 9월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는 쾌거를 얻기도 했다. 여성가족부 주최로 서울 종로구 AW컨벤션센터서 열린 ‘전국 청소년지도자대회’서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기여한 공로로 국무총리표창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기 앞서 청소년들이 꿈을 원 없이 펼쳐볼 수 있도록 마당을 마련해 주는 것이 ‘진정한 불사’라고 주장하는 김 前 회장.

“불교가, 가정이, 사회가 바로 서려면 청소년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부처님이 어리석고 우쭐하던 ‘주리반특가’ ‘라훌라’ ‘야사’ 등을 바르게 인도했듯이 제주청교련도 청소년들이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며 부처님의 바른 길로 이끌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마지막 회향도 역시 청소년 포교에 힘이 닿는 한 계속 지원해 주는 일입니다.”

청소년들과 함께 ‘유해환경 추방 캠페인’을 펼친뒤 김前 회장이 기념촬영을 하고있는 모습.
특히 김 前 회장은 지난 2012년에 도내 불자들의 도심법당 역할을 담당하며 도심 포교에 큰 역할을 한 시민포교원 법당을 광양로터리 인근 이도1동 인화당한약방 2층으로 이전해 새롭게 법당을 조성했다. 부처님 이운 봉불 법회가지 여법히 봉행하며 수행 공간 조성에도 힘쓰고 있다. 아직도 새벽 4시 30분이면 시민포교당서 어김없이 새벽예불을 올리는 김 前 회장은 부처님의 성도재일 등 21일 (3·7일)마다 하루 3씩 고성염불로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항상 살피며 삶의 변화를 이끌며 신행활동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라는 화두는 결국 ‘내가 노력해야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망상이 일어나는 게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거죠. 우리는 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좋고 나쁨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전 두 개의 양면처럼 받아들이면 괴로움이 사라지더군요. 노력해서 투자한 만큼 공덕도 쌓입니다.”

김 前 회장에게 고성염불 수행은 스스로 열심히 수행 정진해 마음을 가다듬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부처님과 보살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이라고 할까. 수행의 덕분인지 최근 김 前 회장은 건강관리센터에서 받은 검진 결과, 스트레스가 제로라는 판정을 받았다. 김 전 회장은 수행을 통해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부처님의 가피가 본래 내 마음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무소의 뿔처럼 청소년들의 행복을 위해 오늘도 전법의 길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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