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것도 없고 산 것도 없습니다! 그냥 여여함이죠!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 하는 것은
세세생생에 자기가 벗어나기 위해서,
내면으로는 자기 악업 선업에서 벗어나고,
또 천체로서는 바로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죠.

석가모니도 늙고 죽음이 있었는데…
질문 부처님 가르치심의 핵심이 되는 인연법을 말할 때 으레 십이연기(十二緣起)가 거론되곤 합니다. 무명(無明)이 있으니 행(行)이 있고, 행이 있으니 식(識)이 있고…. 그와 같이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다라는 식으로 설명해 나가다가, 그래서 생로병사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 거꾸로 말한다면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고, 행이 없으면 식이 없고, 그렇게 해서 생로병사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걸 줄여 보면 무명이 있기에 생로병사가 있고 무명이 없으면 생로병사가 없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분명코 무명을 여의신 분이었는데 어째서 늙고 죽음이 있었는지요?
답변 부처님께서 그 대답을 안 하신 게 아닙니다. 대답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모두 못 알아들어서 대답을 못 들은 거죠. 죽는 것도 없고 사는 것도 없습니다. 본래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본래 빛깔과 음파를 통해서, 통신을 통해서 이렇게 텔레비전이 나오듯 나오는 것이지, 이 텔레비전 자체가 살고 죽는 게 아닙니다. 보실 줄 아는 사람은 생로병사가 무(無)라고 할 거고, 보실 줄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몸뚱이가 죽으니까 죽었다고 하고 몸뚱이가 살아야 살았다고 할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 말을 가끔 하죠. 두 친구가 하나는 스님이 되고 하나는 속인인데, 속인인 사람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스님 된 친구를 불렀답니다. 천도를 잘 좀 해 달라고 떡 불렀는데 천도는 안 해 주고, 한다는 말이 “어휴! 온 것이 없다면 갈 곳도 없을 것을….” 아, 이렇게 한마디 하고 쓱 가 버리거든요. 온 것이 없다면 갈 곳도 없을 것을…. 그런데 그게 지어 가지고 그냥 죽었느니 살았느니 애를 쓰고 야단들 아닙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옷이 헐고 헤지고 바래고 그랬으면, 또 그 시대에 맞지 않고 그러면 벗어 놓고 새 옷을 입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거와 똑같습니다. 그런 건데 죽었다 살았다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 도리만 알면은 죽은 것도 없고 산 것도 없습니다. 그냥 여여함이죠.

둘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질문 스님께서는 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둘 아닌 도리를 실천을 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둘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해야만 하나요?
답변 둘이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해야만 되겠느냐고 물으셨는데요, 모두 내 몸뚱이 네 몸뚱이를 가지고 이렇게 실천이 되게끔, 둘 아니게 실천이 되게끔 된다면 일일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뿌리가 뭐, 떨어졌다가 붙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 뿌리는 자기 뿌리가 가지고 있죠. 자기가 있는 데에 자기 뿌리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상대방이 나에게 줘도 상대방인 그 사람도 자기 뿌리를 가지고 있고 나도 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순간에 그 뿌리와 뿌리가 한데 합쳐 버려요. 합치게 돼 있어요. 이 텔레비전을 끄면 안 나오죠. 켜면 나오죠. 그렇게 자유자재해라 이 소립니다. 우리가 그냥 이렇게 하게 되면 벌써 둘이 아니게끔 된다 이 소리죠.
처음에는 서툴지만 그게 둘이 아님이 되기 때문에 서툴러도 하다 보면 물리가 터지게 되고 자꾸자꾸 늘어나게 되죠. 이렇게 되면 어, 생각 자체 하는 것도 요이하게 되고 생각하는 것도 유유하게, 그냥 자연적으로 그냥 생각이 들고 말입니다. 왜 악한 것도, 부처님께서도 얘기하셨지만 “악한 거나 선한 거나 둘로 보지 마라.” 이랬죠. 그거는 이 모두를 합류화시키는 데 있는 겁니다. “이 몸뚱이도 나 하나로만 보지 마라. 수천 개가 이 몸속에 살아 있다.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자 내 생명들이다. 그러니깐 너 하나만이, 모습을 보고선 너라고 그러지 마라.” 이랬죠.

그랬는데 이게 말로는 할 수가 없는 말이죠. 둘 아닌 도리를 어떻게 실천을 하느냐는 그 얘기는 내가 할 얘기가 아니죠, 사실은. 여러분들이 그대로 마음 놓고 생각 없이 그냥 “아, 이것 좀 먹어 보우.” 이러고 줬는데, 그냥 줬는데도 그냥 둘 아닌 줄 알아라 이거죠. 그걸 생각을 일일이 해서가 아니라. 둘 아닌 줄 알고 이렇게 줬어도 그렇고, 받았어도 둘 아닌 줄 알게 되면 이 받은 것이, 저절로 이 대가가 일로 가요. 가는 줄 모르게 가고 오는 줄 모르게 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과응보를 모른다면 이 큰 도리를 모른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이 전 세계에서 지진이 일어난다 하는 것도 우리가 지진이 어떻게 해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고 있죠.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그냥 덮여서 죽고 땅속으로 들어가서 죽고 모두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우리가 개미들도 보고 여러 가지 벌레들도 많이 보죠. 벌레 둥우리가 하나가 터지게 되면, 삽으로 인해 딱 터지게 되면은 그게 그냥 쫙 헤지면서 땅에 묻히기도 하고, 그냥 모두 다리도 끊어지고 목도 끊어지고, 다 죽게 되고 사는 놈은 살고 이렇게 되죠. 이런 거 보는 거나 우리가 지금 지진이 일어나서 그렇게 죽는 거나 뭐가 다릅니까. 다르지 않죠.

그래서 차원에 따라서 연쇄적으로 내려가는 거죠. 오계를 받을 때 얘기했죠. 남의 생명도 내 생명과 같이 생각하라. 또는 내 물건과 같이 생각하라. 내 아픔같이 생각하라. 이렇게 모두 말입니다. 그래서 그 벌레들 그렇게 죽는 문제들. 허청없이 그냥 밭에 가다가도 그저 이런 벌레들이 모두 꾸역꾸역 나오면은 아무 생각 없이 탁 쳐서 그냥 벌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산산이 헤어지고 죽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 문제가 자기 문제로 돼 버려요.
그게 고통이라고 그러는데 네가 한 거는 네가 그것을 해결해야죠. 자기가 해결해야 그게 맞죠. 그렇기 때문에 거기까지 간다면 자기가 고통을 받을 때 그 모든 생명들이 그렇게 귀하다는 거를 생각하게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고를 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거는 자기가 진화되고, 살아 있으면서도 진화되고, 살아 있으면서도 생산이 되고, 살아 있으면서도 길을 찾고, 살아 있으면서도 길을 걸림 없이 걷게 될 때에 비로소 자유인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가 지금 모두를 잘해야 되죠. 스님네들은 염불도 잘해야 되고 뭐, 모든 거를 잘해야 되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마음들이 이거를 잘했다 하면은 한 가지는 이렇게 빼놓고 이거 해요. 빼놓고 하는 게 아니죠. 닥치는 대로 잘해야 되겠죠. 어떤 거든지. 어떤 거를 막론하고 다 잘할 때에, 때에 따라서 길을 걷다가도 그런 일이 생기거든요. 그런 일이 생기면은 자기가 항상 그냥 무심코 하던 거기 때문에 그냥 하게 되죠. 그냥 생각하게 되고요. 그냥 자기 하나의 생각뿐이 아니라 포괄적인 생각으로서 그냥 하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뭇 중생을 건질 수 있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지진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이런 공부를 해서 포괄적인 생각으로서 둘 아니게 생각한다면 모든 거를 다 건진다. 죽여도 건지는 거고 살려도 건지는 거다. 이게 사람이 한 철 살다가 그냥 끝나면 그게 아닌데요, 한 철 살다 끝나는 게 아니라 내내 이게 끝이 없이 돌아가는 거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이거를, 죽었어도 그냥 건진다. 그리고 또 포괄적으로 생각을 잘할 때에 어떤 때는 종자가 덜 생기게 하는 이유도 있는 거죠. 우리가 집은 조그만 데다가 식구는 너무 많이 이렇게 하게 되면은 그 집이 터질 거 같으니까 종자를 다섯, 하나 하나 치면 열 개 스무 개를 낳아야 될 텐데 그냥 하나로 묶어서 낳는다, 이런 것도 되고요, 이런 것도 실천입니다, 이게. 모두가 실천이에요.

옛날에도 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죠. 인제 공부하는 분들이, 선방에 계신 분들이 인제 바람을 쐬러 나갔는데 한 분이 이렇게 가다가 말곤 뚱그렇게 그냥 금을 그어 놓고선 “너희들, 여기 못 들어오면 정각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러거든요. 그러니깐 전부들 글로 들어갈 수밖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있다간 아무 소리 없이 발로 그 그린 거를 다 지워 버리고 하는 소리가 “여기 들어가면 매여서 정각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또 그러거든요. 그랬는데 그거를 어떻게 해야만 옳습니까? 이쪽에도 글로 들어와야 정각을 한다 하고, 이쪽에는 그것에 매이면 정각을 못한다 하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거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틀리든지 옳든지 그냥 해 보세요. 허허허. 틀려도 별로 틀리지 않을 텐데. 이거를 그 당시에도 그렇게 놓고선 아무리 일러 달래도 일러 주질 않았어요. 본인들이 그건 알아야 하느니라 하고.

그래서 둘 아닌 도리를 이렇게 여러분들한테 가르치고 그러면은, 이것이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도 여기 와서 닿지 않는 말이 있고 여기 와서 닿는 말이 있죠. 만날 그냥 그 한 도리에서 자꾸 돌아가는 거니까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부처님 법이냐?” 하고 물으니 아주 뭐 신나게 그냥 “이 세상은 모든 게 하나로 돌아갑니다.” 하니깐 “그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 있느냐?” 이러고 물으니 대답을 거기서 못했더란 말입니다. 그와 같이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고,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모를 때는 아주 그게…. 그래서 지혜로워야 된다. 지혜롭게 돼야 눈도 뜨고 귀도 뜬다. 이런 거죠. 우리가 ‘둘’ 해도 하나고 ‘하나’ 해도 둘입니다. 하나 하면 둘이 있는 거고 둘이 있는 거면 하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깐 세상은 다 비었습니다.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은,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세상도 없고 모두가 없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좋을까요.

극한 상황에 몰려야 불문에 드는지
질문 스님이 되는 것은 큰 복을 받으신 것이라 우리 불자들은 믿고 있습니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려야 승려가 되거나 불문에 드는 것입니까?

답변 그것도 두 가지 여건이 있죠. 하나는 선업이든지 악업이든지 자기가 과거에 배우던 업식이 있어서 다시 그 길을 밟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서 마음이, 내 뿌리의 자리에서 엄숙하게 자꾸 이렇게 몸뚱이를 리드하니까, 생각이 ‘아, 나는 이 도리를 공부할 수밖에는 없다.’ 하고 나오게 되는 거죠. 또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서, 근기가 아주 튼튼하고 뿌리가 튼튼하고 좋아서, 착한 일을 많이 했고 그런 덕이 있기 때문에 이런 도리가 좋아서 자꾸 공부하게 되고 끼리끼리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불문에 들게 되고 서로가 이 마음 법을 공부하는 거죠.

지금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모두 딴 이름이나 찾고 딴 형상을 찾으면서 기복으로 다니는 거죠.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 하는 것은 세세생생에 자기가 벗어나기 위해서, 내면으로는 자기 악업 선업에서 벗어나고, 또 천체로서는 바로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죠. 그러니까 자유자재권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죠.

산소를 잘못 건드리면…
질문 대부분의 자손들이 부모를 산소에 모실 때 좀 더 좋은 자리에 모시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소를 잘못 건드리면 그 자손에게 어떤 해가 미치는 경우가 있다던데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는지요?

답변 묘지는 그 산의 산수라고도 하고 묘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둥글게 묘지를 댔죠? 그래서 거기다가 부모를 모시고 본 사람은 누구며 보여 준 것은 뭐냐 이겁니다. 돌아가시기 이전 이후를 다 합쳐서 본 사람은 지금 산 사람이고, 보여 준 거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또 둥그렇게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 번째 가서 둥그렇게 돼 있는 것은 전후가 한데 합쳐진 바로 원 도리라고 볼 수밖에 없죠. 천상천하가 다 한데 합쳐서 뭉쳐진 도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물 컵을 들으시고) 산소라면 여기도 우주개공이 담겨 있다, 이런 거죠. 이거나 이거나, 둘이 아닌 까닭에 바로 본 놈도 둘이 아니죠. 그래서 묘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여러분이 잘 생각을 하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원심력을 얻고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생각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죽은 사람, 산 사람도 둘이 아닙니다. 껍데기 병만 깨졌을 뿐이지 그 근본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움죽거리지 않습니다. 죽고 사는 게 없습니다. 물이 얼음이 됐다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됐다가 이럴 뿐이에요. 얼음이라고 이름만 불렀을 뿐이죠. 그래서 그것도 죽었으니 송장이라고 할 뿐이지 둘이 아닌 것입니다, 물과 얼음이 둘이 아니듯.

우리가 이 도리를 어떤 때는 부처님의 도량이라고도 하고 그러는데 도량은 어디고 다 도량이죠. 그래서 “부처님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니까 아무 소리 않고 뚱그렇게 그냥 그려 놓고는 말았더라. 어떤 사람은 뚱그렇게 그려 놓고는 침 한 번 뱉는데 떨어질락말락할 때 점 하나 찍어 놓더라는 얘기도 있고요. 그것도 저것도 묵묵히 있었던 분도 있었죠. 어떤 분은 송장을 타고 빙글빙글 서너 바퀴를 돌다가 그냥 훌쩍 나갔고요. 그러니 그것을 말로 형용할 수는 없으니 그대로 그런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가 그 마음이 채워지면 스스로 알 것이니까 본 사람은 거기 누워 있는 사람, 묘지가 한데 합쳐진 것도 사람이 이렇게 모아 놨고요. 마음이 한데, 이전 이후가 다 한데 모아진 셈이나 똑같은 거죠. 그거를 아시면은 원심력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그걸 잘 탐구해 보세요. 그래서 자기 주인공에 놓고요.
그리고 여기서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소승이다, 대승이다 하는 교리를 다 놓고 돌아가는 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 무슨 그것이 잘못되고 잘되고가 있습니까? 일체 만법에, 뭐 마음은 체가 없는 겁니다. 그렇죠? 영(靈), 의식은 수만 개가 들어와도 들어온 사이가 없고 내놔도 내놓은 사이가 없고, 또 내가 가다가 ‘아, 여기가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으면 거기 그냥 묻으면 좋은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지리학이라든가 천문학이라든가 또는 의학이라든가 천체물리학이라든가 이런 것이 포함돼서 돌아가는 공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공부를 지금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걸리지 마시라는 얘깁니다.

여러분이 체험을 해 봐서 알겠지마는 아, 그런 데서 부적을 붙이고 온통 야단을 하면서 그렇게 걸리다가는 못 하나 박아도 탈이 나. 그런데 나중에는 그거고 뭐고 다 버리니까 탈도 안 나고 외려 더 잘되더라는 얘깁니다. 지금 사람이 먹고 살고 이렇게 살기도 귀찮아 죽겠는데 어떻게 와서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데 아니, 그런 걱정 저런 걱정 하다가 세월 보내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다 놓으세요. 아무 걱정도 마시고, 걸리지 마세요. 그러면 돼요.

지구의 장래가 궁금합니다
질문 저의 질문은 지구의 장래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 지구의 모든 현실을 지켜볼 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중환자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인구 폭발 문제라든지 물 부족, 식량 부족, 이상 기후, 양 극점의 얼음 녹는 문제, 지진 발생, 오존층 파괴, 자원 고갈, 산소 부족 등등 많은 중증을 앓고 있습니다. 스님, 앞으로 지구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생기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우리가 학술적으로 지식적으로 배운다면 가지가지 이렇게 벌여서 이름을 알아야 하고 모든 걸 배워야 하지만, 이건 참선입니다. 선에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모든 거를 한데, 이거 공부할 때도 한군데로, 내면의 한군데로 모아서 놔라 이런 뜻입니다. 모아서 놓지 않아도 한군데다 놓으니까 모아지죠? 한군데로 놓으면은 모아지듯이 일체 돌아가는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디서 나오는가? 예를 들어서 그 천차만별의 일들을, 그것을 이름으로 어떻게 지어서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일체 일거수일투족을 다 한마음에 집어넣으면 거기에서만이 일체가 모두 돌아갑니다.

항상 누적되지 않게 겁내지 말고 모든 거를 거기다 놓으라 그랬죠. 진짜로 믿고 거기다 놓으면은 그냥 모두가 움죽거리게 된다고요. 그래서 움죽거리는 것만이 또 능사가 아니라, 안 움죽거리는 것도 움죽거리는 것도 똑같다. 이것을 해 나가려면 잠시라도 찰나찰나 이렇게 안 움죽거리게 할 수 있어야만 움죽거리게 할 수 있죠. 즉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가 이렇게 한 바퀴 돌아서 이어지는 겁니다. 또 미래도 한 바퀴 돌아서 미래가 이어지고 하기 때문에 그거를 과거도 현실로 미래도 현실로, 일초 전 일초 후 이렇게 생각하시면 아주 간단할 겁니다. 그래서 삼세를 이게 둘 아니게 넘어갈 수 있어야만 이 우주의 모든 것을 그냥 한군데 하나로 생각할 수 있고, 하나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둘 셋으로 수차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한군데로 하나로 뭉쳐서 해낼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어디서 벌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천차만별의 것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어떠한 용도가 생긴다,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할 때에 그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젭니다. 이것은 모두 여러분들이 제각기 놓고 제각기 배우는 게 아니라, 무조건 자기 불성인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거기다 놓기만 하면 모두가 앞서 입력된 건 다 없어지고 새로이 입력되는 것이 현실로 나오게 돼 있다. 나오게 돼 있는 그 원력이 바로 그 모두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이 나온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군인이 전진을 하다가 후퇴를 해야 하기도 하고 후퇴를 했다가 전진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퇴하는 것도 전진하는 것도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하는 거죠. 이거는 말로 우리가 말만 들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한다면 내면에서 자기의 뜻이, 이렇게 가르치는 뜻이, 길잡이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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