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관계 - 나와 이웃, 종교와 종교, 남한과 북한, 국가와 국가

 

아프다. 그리고 시끄럽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아픈 이유는 다양하다. 나와 이웃의 갈등, 종교간 갈등, 남북갈등에 국가간 갈등 등 현대사회에는 수많은 아픈 이유가 존재한다. 관계 즉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는 말이 있둣 불교는 갈등과 아픔 해결에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을까. 개인과 개인을 비롯 국가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 개선을 위한 연기와 화엄의 불교적 해답을 모색한다.〈편집자 주〉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피해주는지 성찰
나와 이웃 - 김경집 진각대 교수
 
불교는 평등과 존중의 종교
‘연기’ 기반한 대화 필요
“大我의 삶 속에 행복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평등사상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태어나면서 부모와의 관계가 형성되며, 다음이 형제와의 관계, 그리고 성장하면서 이웃과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고 불편하면 다툼이 일어난다.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기본적인 가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존귀하다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부처님의 탄생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수없이 외웠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해석하면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오직 홀로 존귀하다’이다. 갓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내용은 불교의 근본 사상이며 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불교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존재는 존귀하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탄생게가 고타마 싯다르타가 했다고 해서 그 분만이 이 세상에서 존귀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을 우리 스스로가 한다면 우리 모두 이 세상의 존귀한 존재이다. 존귀하게 태어났으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내 자신이 그렇다면 상대방은 어떨까? 상대방 스스로 탄생게를 외친다면 그 역시 이 세상 존귀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내 자신도 존중받아야 되지만 상대방 역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존중받아야 하듯 부모도 자식을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 사회 역시 이런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웃에게 존중받고 싶으면 이웃을 존중해야 한다. 존중받는 상사가 되고 싶으면 아래 직원을 존중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 이런 가치를 갖는 것 이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평등사상이다.

연기적 관점에서 상대방을 이해

물질의 풍요는 인간사회를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 끊임없이 발명되는 생활용품은 인간이 과연 앞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것을 대변하는 단어는 ‘편리함’이다.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는 과학과 기계문명의 발달은 심각한 폐단을 동반한다. 협동심보다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풍요함을 즐기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자연히 이웃에게 필요한 대화가 상실되어 버렸다. 생각하는 자세도 필요 없게 되었다. 골치 아픈 일과 심각한 일을 싫어하는 단순한 인간으로 변해간다. 현재의 즐거움이 필요할 뿐 미래를 위한 인내심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의 연기관으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만물은 상호관계에 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히면 자신도 손해를 보고, 상대방을 도우면 자신도 이익을 받는다. 또 남을 해치면 내가 죽고 남을 도우면 내가 사는 이치이다. 이런 근본 진리는 우리의 이웃과 사회는 물론 세계열강의 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21세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사상과 종교로 불교를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에 따라 성인이 되는 종교이다. 이런 인간중심의 종교관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을 가져오고, 이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화합의 시작이다

격조 있는 사회를 위한 불교의 역할

사회에도 격조가 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 사회에도 품격이 있다. 사회의 품격은 그곳에 속한 사람들이 만든다. 격조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사회의 품격은 높아진다. 지금 우리가 속한 사회의 품격이 낮다면 그것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격이 낮기 때문이다.

인격이란 사람 됨됨이다. 된 사람이란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다. 자신보다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자신보다 지식이 없어도 무시하지 않고 배울 것을 찾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다. 이런 인격 있는 사람이 많으면 그 사회 분위기는 좋을 수밖에 없다.

이웃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 모두의 문제이다. 불교가 그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이다.

불교는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이 생활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은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내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눠주며 생활하고 사회와 국가가 부강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대아의 생활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상대가 손해를 본다면 그것은 소아의 생활이다. 소아와 대아의 차이는 물질의 규모에 있지 않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세상을 살면서 느낀 것은 만족보다 불만족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족하지 못한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행동한다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리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 편리함에 금전이 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윤리나 도덕을 망각한다면 세상은 범죄로 덮이고 만다. 그러나 적은 금전이라도 남을 위해 베풀면 소아에서 대아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불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며,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 최종석 금강대 교수
“포괄주의적 태도로 타종교 만나자”
종교와 종교 - 최종석 금강대 교수
 
‘시장 상황’에 처한 종교현실
종교간 갈등은 쇠퇴 지름길
공동 목표로 시대요구 부응

종교 경쟁이 불가피한 시대

오늘의 현대사회는 다양한 종교 신념과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다원화된 사회이다. 21세기는 종교들 간의 경쟁이 불가피한 시대이다. 종교는 시장상황(market situation)에 직면해 있다. 종교 소비자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전통은 소비자의 상품이 되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게다가 21세기는 지난 세기보다 산업화, 도시화, 사회구조의 재편성이 더욱 급속히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른 현대인의 새로운 욕구도 다양해질 것이다. 이와 함께 인터넷 확산에 따른 사이버 공간의 출현과 함께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인류생존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태계의 파괴나 환경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종교 등 현대사회의 전 분야에서 고조되고 있다.

종교교리 전반의 새로운 이해 요구

오늘날 기성종교는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화해 가는 현실에 대하여 대응해야 할 과제를 많이 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종교인 불교나 그리스도교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가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다면 종교는 무력하게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다시 한 번 브라이언 윌슨(B. R. Wilson)은 현대사회에 있어 종교는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도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영혼이나 내세에 대한 입장이 오로지 종교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고, 오늘날에는 자연과학적인 해석도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과학에서는 영혼을 두뇌활동의 산물로 보고 신체활동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또한 뇌과학의 발달과 유전자공학의 발달은 인간영혼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교리 전반에 걸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과학의 성과에 종교는 맞서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 성과를 포괄하는 은유와 상징의 지평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종교문화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어느 한 종교만이 감당하여 해결하기 어려워진 실정이다. 이 시대의 종교들은 독선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관용적 태도로 종교 간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절실하게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어느 종교나 배타주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포괄주의적 태도를 견지한 채로 타종교와 만나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적인 대화의 자세라고 하기 어렵다. 자신의 종교만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지녔으며, 타 종교는 자신의 가르침의 일부분에 불과하여 결국 자신의 종교로 돌아오는 과정적 진리만을 지녔다고 보는 태도가 포괄주의적 태도이다. 이제는 이러한 포괄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즉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자신의 종교만이 가졌다는 신념에서 벗어나서,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때 오히려 자신의 종교의 가르침이 더 깊고 넓게 이해되고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타종교와 함께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 간 투쟁은 종교회의감을 증가시킬 것

물론 종교는 ‘절대진리’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자기 종교의 절대성과 최고성을 주장하는 ‘절대신념체계’이기 때문에 비타협적이고 다른 신앙을 무시하거나 이단시하는 위험이 있다. 현대의 다종교사회에서는 각 종교의 사상적, 교리적 편견과 독단적 배타성이 야기하는 종교 간의 갈등과 충돌의 가능성이 늘 잠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있는 곳에는 종교와 종교 간의 대립과 충돌이 늘 있어 왔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종교를 이유로 한 분쟁이 지속되는 등 종교 간의 마찰과 대립은 그치지 않고 있다. 계속되는 종교적 분쟁과 충돌로 종교가 인간 삶의 지혜나 이웃에 대한 사랑의 기반을 제공해주는 가르침으로 인식되기는커녕, 오히려 종교가 대립과 투쟁의 주된 원인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나 실망감도 점차 증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적 과제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가 직면한 문제를 의식화시키는 일이며, 그 의식화된 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의 혼탁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은 과학적 접근이나, 정치적, 사회적 접근을 넘어서 총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자각과 함께 인간의 사고의 변화를 도모하는 종교적 접근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현대사회가 직면한 인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을 종교적 문화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이 종교문화 운동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에서 지구상의 생명 전체를 포함하는 운동으로 그 폭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와 종교가 함께 하는 공동의 목표이고, 이를 통하여 종교 간에 진정한 관계 맺기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불교사회정책연구소 법응 스님
조건 없는 나눔… 함께 살아가는 길
남한과 북한 - 법응 스님 불교사회정책연구소
 
남북이 지향할 공유 가치 ‘통일’
북한·열강들 합의의 장 이끌어야
평화 통일 불교계 역할 모색 필요

각국 패권 다툼의 경연장이 된 남북

2015년도 남한 인구는 5천1백만 명, 북한은 2천5백만 명 정도로 남북한의 인구는 도합 76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아득한 고조선으로부터 조선과 대한제국으로 이어진 수천년의 역사를 공유하면서 고유한 언어와 풍속, 쌀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전통을 함께 해 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민족과 영토가 남과 북으로 양분됐다.

남북분단의 원인은 외적으로는 일본의 대륙진출과 미소양국의 세계패권주의, 내적으로는 세계정세에 둔감하고 개혁과 유신은 외면하면서 내분으로 국력을 쇠진시켜온 구한말 지배세력의 무능과 탐욕, 그리고 해방 후 극심한 사상적 혼란에 기인하고 있다. 1950년부터 3년 간 이어진 한국전쟁 이후 남한은 제도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북한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3대 세습체제를 통치이념 및 수단으로 하고 있다.

한반도 상황에서 빼놓을 수없는 것이 미국과 중국이다. 중국에 있어서 한반도는 지전략적(地戰略的) 요충지대다. 중국은 중국대륙의 목줄과도 같은 역할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절대 포기할 수 없으며, 제1, 2도련선(島鍊線)을 해상 방위선으로 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바, 남북한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서 통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US Rebalance to Asia)’정책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는 물론 태평양에서의 군사와 경제적 패권을 지속적으로 장악하려 한다. 여기에 일본은 미국의 비호 아래 동아시아에서 군사강국으로,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자국의 국내외적 이익의 창출을 위해 항시 발을 담그고 있다. 이와 같이 한반도는 과거는 물론 현대에도 열강 각축의 중심에 서 있다. 이러한 각축상태를 탈피해서 그야말로 ‘남과 북’이 올바른 관계를 맺고 7600만 명의 국민이 안락하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는 길은 무엇인가? 남북의 위정자들 그리고 종교계 등 사회지도층은 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북이 긴장의 연속 속에서도 어떠한 형태이든 대화를 이어가고 있으니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7.4공동선언, 고 김대중, 고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과 6·15 공동선언 그리고 개성공단의 운영이란 성과가 있었다. 또 지금은 중단됐으나 금강산 관광이 성사 됐었다. 근자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되고 있다. 반면에 북한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근래 ‘목함지뢰’ 사태까지 대략 3000건이 넘는 침투와 국지도발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화통일의 남북 기조 공고해야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은 남북의 근본적인 이념차이로 인해 양측이 이해하고 주장하는 평화와 자유의 개념, 통일의 수단과 방법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분명코 남과 북이 올바른 관계 속에 가야할 한 방향의 길은 평화적 통일이고 통일 후에는 자유, 인권, 복지, 청정한 환경 등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을 구현하고 발전시켜 가야 하는 것이라면, 한반도를 중심에 두고 힘겨루기 중인 미국과 중국 그리고 폐쇄를 고집하며 강성군사대국으로 치닫는 북한을 어떻게 대화와 교류, 공존을 위한 합의의 장으로 나오도록 설득시키느냐가 필연적 과제다. 이 과제가 이루어져야만 남과 북은 물론 주변의 열강들까지도 자유와 평화라는 한 방향으로의 역사를 일궈 갈 것이다.

문화ㆍ경제 등 사업으로 신경망 연결

물론 북한과 주변 열강을 설득해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는 일에는 위험요소들이 내재해 있으나 탁월한 외교력으로 관련 국가를 설득하고 북한과는 경제,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통해 교류의 신경망을 연결하고 고착화시켜야 한다. 하여,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의 선 제안 등 대북정책에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호로써 통일정책이 아니라 현실적인 변화를 위해 북미 간 수교의 가교 역할을 하고, ‘동북아 평화실크로드 - 평화벨트 구상’ 등을 정책의제로 삼아 중국과 통 큰 거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국과 북한에 대해 민간외교로써 문화교류에 적극 투자해야 하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통일에 대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또한 망국의 원인인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후진 국가를 면치 못하고, 통일을 위한 경제기반이 붕괴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국방력의 우위를 점하는 힘의 논리도 중요하나 불교의 가르침과 같이 “조건 없이 베풀어라 - 함께 사는 길이다”라는 대 명제를 실천할 때 북한의 정권에까지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북한정권은 폐쇄정책에서 과감한 개방과 개혁만이 인민을 위하고 희망적 미래가 담보되며 세계사와 궤를 같이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북한도 더 늦기 전에 체제의 이념과 통치 수단에 대한 변화를 스스로 추구해서 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의 길은 수천가닥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푸는 일보다도 더 난해하다. 그러나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무상한 존재로서 의미 있는 삶에 나태하지 않는다면 어렵지만도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해 불교계가 앞장서고 남과 북이 가야하는 평화의 길에 불을 밝혀야 한다.

 

배신의 게임을 협력의 게임으로
국가와 국가 - 정천구 서울디지털 석좌교수
 
공익 실현이 좋은 국가의 조건
‘죄수 딜레마’ 극복, 신뢰 쌓아
“먼저 ‘좋은 국가’로 변화하자”

좋은 국가로의 변화

사람과 사람 간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사람 자체가 변해야 하며 동시에 사람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객관적 법칙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국가와 국가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국가가 좋은 국가로 변해야 하고 동시에 국가 관계가 국제관계를 규율하는 객관적 법칙에 따라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민족국가가 탄생한 것은 서양에서 30년 종교전쟁의 결과 맺어진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조약에서부터였다. 그때부터 국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군주들은 국내적으로 주권을 가지고 다른 군주들과 원칙적으로 동등한 자격으로 교섭을 할 수 있는 외교규칙과 국제법이 발전하였다.

20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세계화는 정보통신혁명에 힘입어 지방과 개인을 각성시켜 지방화와 자유화를 촉진시켜왔다.

세계화의 물결과 지방화의 추세 속에 국가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과거와 같이 권력으로 강제하고 국민생활에 간섭하는 압제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할 수는 없게 되었다. 20세기 민주화의 물결과 21세기의 이집트, 리비아 등 중동에서 일어난 반독재혁명은 정보화·세계화시대에 강압적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이제 국가는 자신의 역할을 공익(公益)을 실현하는 일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가 내에서 법질서를 유지하는 일, 국민을 외침으로부터 지키는 일, 그리고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보호하는 역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세계화시대에도 국가 이외에 다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국가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공익(公益)을 실현하여 국민에게 봉사하는데 있으며 이런 역할에 충실할 때 국가는 세계화시대에도 위축되지 않고 번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는 사라질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이상과 같이 국가와 국가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주관적 조건인 좋은 국가가 되는 길은 충분히 밝혀졌다. 그럼 좋은 국가관계를 맺기 위한 객관적 법칙은 어떤 것인가? 국제정치는 국내정치와는 달리 국가들의 행동을 강제할 권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유엔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들 간의 협의기구로 국가들의 동의에 의해서만 행동할 뿐이다. 국가 간의 관계는 약속이고 맺은 약속을 지키는 자발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국제법 철학의 제일원칙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라틴어로 Pacta sunt servanda)’로 표현된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 간의 관계는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가 간의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을 강제할 객관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국가들에게 더 유리하게 때문이다.

게임이론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국가 간의 관계는 협력하면 상호이익이 되지만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피하게 갈등과 배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가 적용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란 이런 것이다.

검사가 두 사람의 공범자들을 분리 심문하면서 “두 사람 모두 범죄를 자맥하지 않으면 가벼운 처벌로 풀려나지만 두 명이 모두 자백하면 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 자백하고 다른 사람은 부인하는 경우 자백한 자는 보상을 받고 석방되지만 부인한 자는 가중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백을 권고했다고 상상해 보자.

이 경우 모두 자백하지 않으면 모두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을 것이지만 상대방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죄수들은 가장 안전한 자백을 선택하여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불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럼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반복게임일 경우 가능하다.

게임이 한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게임인 경우 한쪽 편에서 배신에는 벌을 주고 협조에는 보상을 주는 전략으로 꾸준히 대응하면 배신 게임을 협조게임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반복되는 게임에서 상호주의에 입각한 이런 전략은 지금의 배신이 미래의 처벌을 받고 지금의 협력이 미래에 보상됨을 의미한다. 상대방이 이런 전략을 택하고 있고 그러한 전략을 물 먹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력해 온다는 사실은 국제정치연구에서 오래전에 입증된 이론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이상의 논의결과는 현안문제인 남북한관계를 비롯한 모든 국가와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

앞으로 남북한관계가 다시 시작될 기회가 온다면 한국은 이상과 같이 국제관계에서 잘 입증된 기본원칙과 지혜를 활용하여 남북한관계를 신뢰를 바탕으로 새롭게 쌓아갈 수 있다. 문제는 북한정권이 이런 원리를 깨달아 신뢰프로세스에 들어올 때까지는 여러 차례의 게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게임자체에 응하지 않고 한국에서 정권변화가 올 때까지 버티고 기다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런 신뢰프로세스가 남북한관계에 제대로 적용되려면 북한이 먼저 좋은 국가로 변모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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