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스스로서 청정하고, 스스로서 체계가 서 있고
계율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계율도 없고 질서도 없고
청정함도 없는 게 진리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그래서, 모두 공(空)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 거니까 그냥 놔라. 이게 공해서 돌아가니까 거기다 놔라 이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놓으라면 놓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겁니다. 놓는 게 뭐냐? 왜 어떤 스님은 방하착(放下着)을 하라 그러고, 어떤 스님은 놓으라 그러느냐? 이것은 첫째 진실히 자기 자성(自性), 자체 불성을 믿어야 하고 둘째는 물러서지 않아야 하고 셋째는 그대로 믿고 활용을 하고 밀고 넘어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무전통신기도 눌러야 통신이 되죠? 불을 켜려 해도 스위치를 올려야 켜지지요? 가설이 돼서 불이 켜질 수 있는 건데도 자비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불을 켤 때는 켜고 끌 때는 끄고, 자유 아니겠느냐. 만약에 그러한 마음으로 자비하니까, 부처님은 자비하기 때문에 스위치를 올릴 것도 없고 내릴 것도 없다, 이런다면은 여러분의 몸은 어떡하고 여러분의 가정은 어떡하며 세상 돌아가는 거를 어떻게 똑바로 관(觀)해 봅니까? 똑바로 관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국내에도 그렇고, 세계를 똑바로 보지 못해서 우리 국내를 살릴 수도 없고 발전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스님네 역시 머리만 깎고 목탁이나 치고 경(經)이나 읽어서 그렇게 살라는 게 아닙니다. 들어가나 나가나 한번 관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봐서 ‘이건 이렇게 돼야 되겠구나.’ 하고선 점을 딱 찍고 넘어간다면 그건 그대로 통과야. 그대로야. 그대로 실천에 옮겨지는 법칙이야. 그런데 내 몸 하나 처단 못하고 내 가정 하나 처단 못한대서야 어찌 귀중한, 아주 이 세상에 이름 없는 이름의 법칙을 어떻게 부처님 법이라고 하겠습니까? 참으로 이 부처님 법은 너무도 신비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그 마음은 체가 없어서 시공도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니, 공(空)해서 돌아가는 이 자체가 색(色)이 공(空)이요 공이 색이니 그 자체를 뛰어넘어라 한 겁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옛날에도 나라에 이러한 도리를 증득한 분이 있다면 그 나라를 치질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습으로 서로 싸워서 이기고 지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데를 치면 나라가 망합니다. 그거를 아는 자는 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도 가끔 있었죠. 공부하는 인간이 살다 살다가 어떻게 독사지옥으로 떨어져서 큰 뱀이 돼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일편단심 공부를 했더랍니다. 공부를 하는 도중에, 얼마 안 남았는데 아, 군인들이 주둔을 해 가지고 거길 그냥 싹 모두 깨트려 버리고 쳐 버리고 그러다 보니까 몸뚱이가 동강동강 났죠. 즉 그로 인해 그 동네가 망했다는 얘깁니다. 그 동네가 산산조각 난 것은, 자손들이 전부 미치고 병들고, 다 흩어지고 죽고 그러니까 그냥 망한 거죠. 그만큼 이거는 미신적이라고 할 수도 없고, 미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모르면 당하고 알면 대처를 한다는 뜻입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우리가 공부한다고, 좌선만 참선이라 생각하고 앉았으면 만법을 활용할 수 있고, 만법을 활용할 수 있으면서도 실상적으로 생활이 참선이고 그대로 생활이 삼매(三昧)라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육신은 망가지죠. 약탕관을 들고 다녀야죠.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약해지죠.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믿음이 진실하다면…,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어떤 분이 와서 “저는 암인데요, 꼭 살려 주십시오. 집이라도 팔아서 시주를 할 테니 살려 주십시오.” 내 가슴은 철렁했죠. 왜냐하면 애들은 여럿이고 오두막집이라도 팔면은 저거 저…. ‘저렇게 모르나.’ 이런 답답한 느낌을 어떤 때는 많이 느낍니다. 그 사람이 그나마 있는 오두막집을 팔아서 고생을 한다면 내 마음은 좋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과거 생으로서부터 받은 업보라면 그건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해. 그러나 사는 길이 있긴 있죠. 진실히 믿고, 어려워도 진실히 믿고 거기다가 ‘죽든 살든 네 탓이다!’ 하고선 딱 놓으면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게 사는 길이라고요. 그런데 난 그럭해선 요구를 안 해요. 항상 그런 말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돈이 있으면서도 돈은 쥐고 있어야 된다. 암이니까, 그거 죽을 거니까, 아무 때 죽어도 죽을 거니까 돈은 있어야 자식들하고 산다고 하면서 돈은 꽉 쥡니다.


그런데 이런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돈이 없는 자는 변호사가 무료로 대변을 해 줄 수도 있고 판사나 검사가 참작해서 해 주지만, 돈이 많으면서도 돈을 내놓지 않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내고 보석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또 서류를 해서 근거가 아니라면 상신을 할 수가 없죠. 뭘로 어떻게 근거를 잡아서 법정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안 그럴까요? 그래서 여러 가집니다. 부처님 법에는 시주하는 거다 안 하는 거다, 또는 꼭 해야 한다 안 해야 한다 이런 게 없습니다. 여러분에 따라서, 그것도 자유겠죠.
나는 설법한답시고, 어떻게 된 건지 그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모르는 대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체계 있게 경을 봐서 하려고 한다면은 벌써 그 묘법은 다 없어지고 여러분에게 이익이 하나도 가질 않아요. 그러니 내가 그 짓을 왜 합니까? 일구월심 여러분의 아픔이 내 아픔이고, 내 아픔에 의해서 그 피 한 방울이고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또 여러분이 저 사람은 체계 있게 못하니까 나 안 간다 해도 할 수 없다 이거야. 안 와도 할 수 없고 와도 할 수 없고, 진실히 믿어도 할 수 없고 안 믿어도 할 수 없는 거죠.
그전에도 그랬죠. 신도 분들이 내가 미약하고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한 명도 안 오셔도 좋다고요. 그래도 이 세상에는 꽉 찼다고요. 허공에도 많다는 말을 한 예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다 주지 않았다고 굶거나 여러분이 갖다 줬다고 잘 먹거나 그러지도 않는다 이겁니다. 기껏해야, 하루 온종일 먹어야 한 공기 반이나 한 공기면 하루 종일 먹을 걸…, 보리밥 꽁뎅이. 아, 우리 스님네들더러 물어보세요. 김치하고 먹으면 그만인데, 내가 왜? 잘 먹겠다, 덜 먹겠다, 더 먹겠다 이런 게 어딨습니까? 외려 부작연(不綽然)해. 외려 부담이 간다고요. 여러분이 좋은 걸 사다 주면 오히려 부담이 가. ‘어이구, 자식들하고 자기네나 먹지 뭣 때문에 이걸 가져오나.’ 이러고. 솔직한 심정이에요. 나는 지금까지도 스님이 돼서 여러분한테 절을 받는다 이런 것도 없고, 내가 스님이니까 으레 여러분한테 보시를 받아야 하고 여러분한테 음식을 받아야 하고 잘 먹고 잘 지내야겠다 이런 생각조차도 해 본 예가 없어요. 이 세상천지와 더불어 사생(四生)이 전부 내 마음과 몸과 그 아픔을 같이하고 참, 혼연일체가 돼서 상부상조하는데 어찌 남의 일이며 내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셨어요? 여러분 속으로 난 자식이 금방 죽는 거하고, 남의 자식이 금방 죽는 거하고 둘을 놓고 본다면 어떤 것이 귀중하겠습니까? 대답해 보실래요? 그거를 냉철하게 알고 본다면 본래 산 게 없기 때문에, 본래 죽을 게 없기 때문에, 무슨 그게 죽었다 해서 맘이 아프고 저게 죽었다 해서 맘이 아프고 맘이 안 아프고 이런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입에 붙은 밥풀같이 그냥 이렇게 얘기한다면 이거는 가식이죠. 진실입니다. 우리가 혼연일체가 돼서 마음이 같이 돌아가고 하는 도리를 배우지마는 몸은 각각 있으니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랑하면서 또는 화목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가정이 다 화목하게 지낸다면 얼마나 복이 들어오며 얼마나 공덕을 이루겠습니까? 그렇게 할 줄 안다면 한 나라를 지킬 수도 있고, 세계를 관해서 볼 수도 있고, 우주를 탐험할 수도 있고, 여러분의 마음 하나가 여러분의 분신(分身)을 수만 개로 만들 수도 있고, 들이고 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을 여러분 앞에 자꾸 전달을 해도 여러분이 실천 한번 해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이요, 그것을 한 번도 실험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칼싸움을, 무술을 잘하던 사람은, 칼로 항상 맞아 보기도 하고 때려 보기도 한 사람은 강도가 들어와도 눈도 안 깜짝거리겠죠. 그런데 그런 것을 한 번도 당해 보지도 않은 사람은 칼을 들고 들어오면 부르르르 떱니다. 안 그럴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번연히 이것이 떡그릇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떡그릇에 엎드러져 보는 것도, 그것도 참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인공 자리를 스스로서 믿고 물러서지 않는 사람에 한해서는, 이런 게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제작할 때 주인공을 딱 찍어 놓죠. 찍어 놓으면 그 주인공은 영화가 다 끝나도록, 소설을 다 보도록 죽을 둥 살 둥 하면서도 죽지 않습니다. 그렇죠? 여러분이 찍어 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게끔 해 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유스럽게 주인공으로서 딱 모든 걸 관해 봐서, 나에 관한 건이라든가 자식에 관한 건이라든가, 국가에 관한 건이라든가 이 세상을 관해서 보려면 세계를 똑바로 봐야 하고 또 보이지 않는 데, 우주적으로도 다른 혹성의 세계를 관찰해야죠.


그렇게 관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차츰차츰 우리가 이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봐서 딱 찍어 놓는다면 그대로 법이에요. 그런데 내 몸도 그렇고, 죽느냐 사느냐도 자기 마음대로지 구태여 그것을, 그러니까 소설의 주인공으로 하나 점찍어 놓으면 되듯이, 영화 속에서 다 죽어도 그 주인공 하나만은 살 수 있도록 찍어 놓는다면 여러분이 왜 걱정 근심을 합니까?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이거는 극치적인 삶에 의해서 부처님의 법이며 도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전자에 명주옷만 입고 무명옷 입었다고 해서 전자의 명주와 똑같아야 하고 전자의 명주를 입어야 하고, 이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전을 하려면, 즉 명주도 지금 실크로 만들어서, 실크만 만들어서도 아니 됩니다. 고상하게 색채를 다 내서 또 꽃을 만들어서 다 조화를 이루어서 딱 상점에 내놔야 잘 팔리겠죠. 이름은 바뀌었으나 그 근본은 똑같습니다. 이렇게 나가야 할 텐데 지금 가르치는 것이 명주, 무명 고대로 그냥 가르치고 있으니, 실크가 벌써 나왔는데 명주 가르치니 어떻게 합니까? 이거 오죽이나 답답하겠습니까?


지금 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 부처님 법을 오히려 미국 사람들이 더 숭상하고 있는 판국인데 우리 국내에서 부처님 법을 삼백 년, 오륙백 년 뒤떨어지게끔 해서 쓰겠습니까? 앞장서도 지금 서럽다고 할 판국에 그래 뒤떨어져서, 한 오륙백 년 뒤떨어져 가지고서는 그때에 가서 “아이고, 부처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저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우리 자식 잘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복으로써 비는 것만 해 가지고 되겠습니까? 또 스님네들도 그냥 경을 가르쳐 주는 강원(講院)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 스님네들도 앞으로는 명주, 그 한마디로 표현을 했습니다만 근본은 똑같으니 실크로 만들어 보자. 실크로 나왔으니 실크라는 이름이 바로 명주라는 걸, 양면을 가르쳐 줘야 된다 이겁니다. 실크에는 세상 돌아가는 대로, 지금 모든 국민이 원하고 찾는 대로 꽃 모양으로 놔서 세상에 내놔야 한다 이겁니다.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잘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나는 무슨 계획하고 하는 말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말 이 공부를, 공부 아닌 공부를 하시려면은 아까도 얘기했지마는 본래 스스로서 청정하고, 스스로서 체계가 서 있고, 계율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계율도 없고 질서도 없고 청정함도 없는 게 진리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부처라는 이름도 부수고 넘어가야 될 판국이죠. 이 커피잔이 만약에 부처의 이름이라면 커피잔을 부수고 들어간다 하는 건 뭘 뜻하느냐? 내가 이 커피잔에 물 들어 있는 걸 갖다가 마셔 버리면 그냥 나하고 둘이 아니니까 이 커피잔의 이름을 말할 거는 없죠. 둘로 나누어 버리는 게 아니라 이것은 항상 나요, 바로 내가 급하면은 커피잔을 들고 물도 떠먹을 수 있고 커피도 먹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뛰어넘어야 된다는 얘기죠. 이걸로 비유했지만 잘들 새겨들으세요.
옛날에도 이런 예가 있었죠. 어떤 사람이 아침 일찍이 일을 하려고 나가보니까 아, 새들이 모여서 지저귀고 있거든요. 이 소리도 많이 들으셨으리라고 믿습니다마는 중국 어디에서 그랬대요. 들은 얘기이기도 하고 보기도 한 얘깁니다. 현실도 그렇습니다. 나도 그런 걸 많이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까마귀는 무(無)의 세계의 영령들의 소식을 전해 주고, 까치는 지금 현실에 사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 준다는 유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전해 주는 거는, “어이구! 또 까마귀가 울어댔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렵다.” 그랬거든요. 그게 아닙니다. 당신네 집에 오늘 저녁에 강도가 들어서 죽을 테니까 피하라고 피하라고 막 가르쳐 줘도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겁니다. 못 알아듣고는 강도를 당해서 사람이 죽었단 말입니다. “어이구, 그 까마귀가 와서 짖더니 이렇게 흉한 일이 생겼다.” 이겁니다. 왜 까마귀 탓을 합니까? 일러 줘도 못 알아듣는 자기 탓을 하지. 그리고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고 그랬는데 좋은 소식뿐이 아닙니다. 일가친척 사기꾼이 오는데 까치가 까악까악 짖었다 이거야. 일가친척이 왔다 이겁니다. 그런데 도둑질 아닌 도둑질을 해 간다 이겁니다. 그거는 또 좋은 소식입니까? 그러니 모든 이치가 다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아까 얘기하던 거 마저 해야죠. 아침에 일찍 나가서 그렇게 하고 있으려니까 아, 새들이 모여서 막 재잘대고 그러거든요. 잘 들어보니까 지금 어느 나라의 창고에 금이 있는데, 그걸 도둑질해 갈 텐데 이 국고가 비면은 큰일 날 테니 야단이라고 아, 이러면서 지지고 볶거든요. 그 사람이 가만히 들으니까 이거 큰 야단이 났거든요. 자기가 얘기해 봤던들 믿어 주지도 않을 거고, 이거 큰일 났다고 하면서 단숨에 쫓아갔습니다.


쫓아갔는데 아, 들어가질 못하게 하지 않습니까? 들어가겠다고 해도 못 들어가게 하니까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밤에 조심하십시오. 이 국고가 빌  테니까 철저히 지키라고 하십시오.” 이랬더니 이 미친놈 보라고, 이 미친놈! “이놈아, 이 미친놈아! 네가 와서 그러는 걸 내가 가서 얘기하면 나도 미친놈으로 모가지 달아나가.” 그러니까 나 말 못한다 이거죠. 그런데 그날 저녁이 지나니까 정말 도둑을 맞았거든. 국고의 금덩어리가 그냥 다 나가 버리고 말았죠. 그거를 나라에서 찾느라고 온통 뒤집고 야단들을 했는데 그때의 그 생각이 문득 났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와서 그렇게 일러 준 게.


그러니깐 장군한테 이제 얘기를 했단 말입니다. 얘길 하니까 장군이 뭘 생각했느냐 하면은, 그거를 찾을 생각은 안 하고 그놈이 그렇게 잘 들으니 내가 저걸 이용을 해서 ‘새가 뭐라고 그러는가? 어디 뭐가 있는가?’ 이런 걸 알아서 내가 좀 더 나라에 이름도 올릴 겸, 돈도 벌 겸 해서 그 사람을 찾았어요. 아, 찾아서는 떠억 “너, 아침마다 나가서 새소리를 들어라, 뭐라고 그러나?” 그렇게 시켜서 가서 들어 보니까는 “얘, 고놈 나쁜 놈인데 얼마 안 있으면 모가지가 달아나갈 거다.” 그러거든요. 허허허. 아, 새들이 그러고 하니 그 얘기를 할 수가 있어야죠. 그럭했다 하면은 큰일 날 테니까. 쭈물쭈물하니깐 그냥 막 때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노릇도 못하겠다고 해서 몹쓸 고생을 하고 자기 부모까지 다 잃고 관가에 끌려가서 자기 가족도 몹시 매를 맞고 그래서 스스로서 그냥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말을 잘못한다거나…. 물론 꼭 해야 될 말을 하는 것은 값있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말이란 건 잘 가려서 해야 됩니다.


또 이런 얘기가 있죠. 어느 집에 키우는 돼지들이 말을 하기를 “아, 저 집은 소를 팔아 왔는데 그 소 판 돈을 지금 가지고 있어. 저렇게 돈이 있는데도 가난한 척하고 있잖아?” 하고선 말을 하거든요. 돼지들이 꿀꿀꿀꿀 해도요, 그 가정 일들을 다 알거든요. 돼지 밥을 갖다 주는데 꿀꿀꿀꿀 하곤 돼지가 돼지 물을 먹으면서 아, 서로 고개를 이러면서 하거든요. 소를 팔아왔는데도 우리 밥은 물만 준다 이거죠, 물만 준다. 하하하. 그래서 그 소릴 들은 사람이 하도 우스워서 껄껄대고 웃다가 옆 사람이 “넌 미친놈처럼 왜 웃니?” 그러니까 무의식중에 그 소리가 나온 겁니다, 무의식중에. “아, 글쎄 돼지들이 말이야, 밥을 먹으면서 이 집이 소 판 돈이 있는데도 먹을 걸 이렇게 안 주고 그냥 뜨물에다가 만날 술지게미만 줘 가지고선 우리들을 취하게 만들고 못살게 만든다.” 이러더라고 껄껄대고 웃었단 말입니다. 그 말 한마디, 불쑥 나간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가족을 다 잃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지금 현실에도 저 까마귀나 까치처럼 사생의 말 못하는 것들도 그 뜻을 모두 듣고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참, 오백 나한을 만든 자체도, 소로 변장을 하고 나와서 그렇게 도를 닦고 있다가 다시금 보살로서 등장을 했다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마적 떼들 오백 명을 부처님 앞에 귀의하게 만들어 놓고 그랬다는 얘기를 여러분은 다 잘 아시니까 그만 얘기하겠습니다.
공부하는 여러분은 제가 쓸모 있는 말이든 쓸모없는 말이든, 쓸모없는 말이라고 생각지 마시고 하치않은 말이라도 좀 더 믿으신다면 이 컵이라는 질서 있는 이름을, 말을 안 하더라도 여러분이 목마르면 물 마실 수 있는 그런 능력은 기를 수 있는 인연이 될 겁니다.
그럼, 오늘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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