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 스님

스님에게 계율은 생명이었다
아니 생명보다 우선했다
스님의 자세는 종교처럼 신성했다

▲ 청화 스님, 89×60cm, 종이에 수묵, 2015스님에 대해 일면식도 없다. 스님에 대한 이미지는 스님께서 남기신 말이 중요하다. 나는 이를 통해 스님의 영상이 벽을 뚫고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본질과 바탕, 실체와 허구, 앞과 뒤 이런 것은 구분되어 있지 않다.
개인 초대전시회에 메모가 남겨있었다. 전화를 드렸다. 미술 평론가 손철주 선생으로부터 연락처를 받았다며 상의할 게 있다했다. 나는 소개한 이를 신뢰하고 있기에 약속을 했고 다음날 만났다. 김 회장은 사업을 크게 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이야기 내내 진지함과 절실함이 있었다.


요점은 “곡성에 있는 극락암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청화 스님 초상을 모시고 싶다. 이 두 분을 잘 모실 수 있도록 진영을 그려주면 고맙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분과의 관계를 물었고 특히 노 대통령 진영을 모시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의견 교환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미 청와대의 부탁으로 초상화를 그린 인연이 있기에 흔쾌히 수용했다. 그 만큼 대상 인물에 대한 연구나 기초 자료가 선행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청화 스님에 대해서는 스님의 흔적을 더듬으며 공부 할 시간이 필요하다 했다.
나는 청화 스님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먼 거리에서 조차 만나 뵙지 못했다. 다만 스님으로서 법에 따라 계율을 철저히 지켰던 분이고 염불선을 주장한 이름 있는 수행자로서 기억한다. 스님의 눈빛은 푸르고 깊다는 세상의 소문과 어떤 스님보다 따뜻하고 겸손하였으며 다른 스님과 빛이 달라 감동 받았다는 증언 정도가 전부였다.


김 회장을 만난 지 며칠 후 청화 스님의 상좌이신 극락암 성본 스님이 찾아 오셨다.
나는 그림을 그릴 화가의 입장에서 표현 대상인 청화 스님에 대해 궁금한 점을 여쭈었다.
스님에게 청화 스님은 어떤 분으로 기억되는지요?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따뜻하게 대해 주시기도 했지만 매몰차게 혼내며 훈육하셨던 분이시지요. 인연법에 따라 살고 있기에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스님 임종 시 아무 대안도 없이 돌아 가셔서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그 점이 제일 서운합니다.”
스님은 청화 스님과 생활 하면서 잊을 수 없는 광경이 있는지요?
“나는 스님을 40년 시봉했습니다. 30년은 직접 모셨고 10년은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스님께서 누워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스님에 대한 인상과 기억은 이 순간에 멈춰 있습니다. 항상 참선 수행을 했고 시간을 내어 책을 보는 등 단 한시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수행자로서 철두철미한 모습이었습니다.”


스님, 40년간 앉아 수행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눕거나 앉거나 하는 것이 청화 스님 정도의 경지에 오른 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스님이 그토록 주장한 염불선이 무엇인가요? 선방 수좌들은 염불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염불선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등등의 의문에 대해 가식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본 스님은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여 말씀해 주셨다. 스승이신 청화 스님에 대한 것은 개인적인 주름까지 가감 없이 진솔하게 말씀해 주시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신뢰를 받았다.
그해 겨울, 청화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위해 곡성군 옥과면에 갔다. 성륜사는 은일하여 살기를 청한 자의 집처럼 아담했다. 절집의 구성이라기보다 물러나 독서하는 선비의 공간처럼 보였다. 스님의 안내를 받아 청화 스님께서 주석하셨던 방이며 사리탑등을 둘러보았다.
성륜사 주지스님께 청화 스님에 대한 다양한 모습의 사진을 부탁했다. 그러나 스님을 그리기 위한 기초 사진 자료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청화 스님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스님을 기리는 가치에 대한 배려가 아쉬웠다.


저녁에 성본 스님께서 계시는 극락암으로 돌아왔다. 극락암은 불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절이었고 기본적인 생활 설비조차 갖추어 있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절을 지키는 스님만은 인정이 넘쳤고 따뜻했다. 지혜로웠고 세상의 이치에 밝았다.
극락암에서 단둘이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어린 시절에 은사스님을 만나서 같이 살림을 한 분이어서 그런지 목소리는 힘찼고 거칠 것이 없었다. 이때 나누었던 스님에 대한 삶의 조각들은 스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이런 시간을 지낸 후 청화 스님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았다. 스님에게 계율은 생명이었다. 아니 생명보다 우선했다. 스님의 자세는 종교처럼 신성했다. 이런 자세는 원고를 쓸 때에도 엄정하고 정중하며 지극했다.
스님께서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의 서고엔 책이 없다. 보았던 책은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스님의 서고를 지킨 책은 사전류가 대부분이다.


음식은 특별히 즐겨하지 않았다. 쌀가루 2되로 3달을 살아간다. 이런 식습관 때문에 몸은 야위었다. 치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나 정신은 자유로웠다.
나는 스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왜 보살들이 스님을 존경하며 따랐는지 궁금해 졌다. 성본 스님은 청화 스님의 인자함과 따뜻함 그리고 겸손함 때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청화 스님은 어쩌면 뛰어난 인생의 고뇌를 상담해 주었던 분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생의 아픔은 대부분 자기 입장에서 생긴 고뇌이다. 상담가는 자기 입장을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어떤 문제를 바라 볼 때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면 옳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이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다. 안목이 열리지 않으면 자기 생각 밖에 못한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다. 이처럼 자기의 입장을 내려놓고 타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모두 옳은 측면도 있지만 모두 틀린 측면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내려놓을 수 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상담가이고 깨달은 자다. 나는 청화 스님을 생각할 때 이런 깨달은 자의 깨끗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수행의 지향점이 중요하다. 세상을 아는 분의 눈빛은 다르다. 나는 스님의 눈에서 세상을 향한 포용의 생명력을 보았다.

 

▲ 내려놓다, 60×88cm, 종이에 수묵, 2015바가지, 쌀, 깨어짐, 실로 꿰맴, 참과 빔. 스님은 쌀 두되로 일 년을 살았다. 그러면서 속박의 자유와 청빈의 풍요를 누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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