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상처 입은 영혼 서로 보듬어
사무량심(四無量心) 지니면
모든 정한 씻을 수 있어

마흔 다섯은
귀신이 와서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참대 밭 같이
참대 밭 같이
겨울 마늘 낼 풍기며,
처녀 귀신들이 돌아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귀신을 기를 만큼 지긋치는 못해도
처녀 귀신하고 상면(相面)은 되는 나이.
- 미당 서정주의 ‘마흔 다섯’

케이블방송 드라마치고는 시청률(7.3%)이 상당히 높았던 tvn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이 막을 내렸다. ‘오 나의 귀신님’은 공중파를 포함해 시청률 동시간대 1위를 기록했다. 흥행에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오 나의 귀신님’은 재밌다. 방송사는 ‘오 나의 귀신님’의 공식 홈페이지에 드라마 장르를 ‘오컬트 로맨틱 코미디’라고 써 놓았다.


‘오 나의 귀신님’의 골자는 막내 요리사인 나봉선(박보영)과 셰프인 강선우(조정식)의 러브스토리이다. 따라서 로맨틱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따라서 코미디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컬트 드라마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단서는 드라마 제목에 함유돼 있다. 나봉선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인 신순애(김슬기)의 넋이 빙의됐다. 이 드라마의 재미는 1인 2역을 담당하는 박봉영의 역할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박보영은 나봉선의 역할과 신순애의 넋이 빙의된 역할을 해야 했는데, 신순애의 넋이 빙의된 역할을 할 때는 신순애의 캐릭터를 무리 없이 소화하였다.


드라마의 극적 요소를 더하는 것은 최성재(임주환)의 캐릭터이다. 처녀귀신인 신순애가 왜 죽었고, 강선우의 동생인 강은희는 왜 뺑소니 사고를 당했는가 하는 문제의 열쇠도 최성재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최성재는 어린 시절 입양되었다가 파양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양아버지가 최성재를 파양한 이유는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동생과 차별을 받다가 파양된 경험이 있는 최성재의 마음에는 어둔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 있을 수밖에 없다. 성장한 최성재는 우연히 음주단속 중에 자신을 입양한 양아버지를 만난다. 그리고 최성재는 양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하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강은희를 차로 친다.
복잡한 심경을 지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최성재의 역할을 임주환은 무리 없이 잘 소화했다.
‘오 나의 귀신님’은 재미있으면서 따뜻함도 유지하는 드라마이다. 재미는 요리라는 시대적인 아이템을 가져왔고, 희극적인 요소를 덧씌운 데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따뜻한 정조는 상처 받은 인물 군상들이 모여서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오 나의 귀신님’을 보면서 필자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떠올렸다. 사무량심이란 불교의 보살이 가지는 네 가지의 자비심을 일컫는다. 사무량심은 자(慈)·비(悲)·희(喜)·사(捨) 등 네 가지 무량심을 의미한다.
자무량심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이며, 비무량심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계에서 구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래서 자무량심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비무량심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희무량심은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가짐이며, 사무량심은 모든 중생을 구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보는 마음가짐이다.


사무량심은 자비를 상징하는 십일면관음의 조상(彫像)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곧 십일면관음의 11가지 모습 가운데 불면(佛面)을 제외한 10가지 모습은 이 사무량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필자가 미당 서정주의 ‘마흔 다섯’을 인용한 이유도 사무량심을 지니길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흔히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한다. 그 어디에도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마흔 살이 아니라 여든 살이라고 할지라도 중도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선(善)과 악(惡), 미(美)와 추(醜), 진(眞)과 망(妄)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궁극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양변을 여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삶이 사람의 일이듯, 죽음도 사람의 일인 것이다. 소위 ‘귀신’이라는 것도 우리의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는 정한의 감정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처럼 자무량심을 지니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처럼 비무량심을 지닌다면, 모든 관계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희무량심과 사무량심을 지닌다면 어떤 관계에서도 차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사무량심을 지닌 사람은 세상의 모든 정한을 맑게 씻을 수 있을 것이다.
‘마흔 다섯’에서 ‘처녀 귀신들이 돌아와 서는 것’이라는 표현은 들끓는 청춘을 되돌아볼 줄 아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상처 입은 타인의 가슴을 어루만질 줄 아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불제자라면 ‘귀신을 기를 만큼 지긋치는 못해도, 처녀 귀신하고 상면(相面)’은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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