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 불교70년- 한국불교 문학 70년

만해 스님·이광수 초석 다지고
미당 서정주·김동리 기둥 올려
1970~80년대 불교 구도 소설
역사의식·보살정신 회통 보여줘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만해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에서 인용

만해 한용운 스님이 열반한 날짜는 1944년 6월 29일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게 된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열반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현 시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광복 70년, 불교 70년’ 문학부문을 살펴봄에 앞서 먼저 필자는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정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는 ‘근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문학’에 대한 정의이다.

먼저, 근대화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흔히, 정치학적으로 근대화의 3요소로 △산업화 △민족주의 △자유인의 출현을 꼽는데, 한국의 경우는 이 근대화의 핵심요소들이 동일시기에 구현되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근대화 과정이 일제강점기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단계를 살펴보면, 1750~1810년 중상주의(상인자본), 1810~1870 자유주의(산업자본), 1870~1930 제국주의(금융자본), 1930~1990 후기자본주의(국가독점 자본), 1990 이후 신자유주의(다국적 자본)으로 나눠진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도 우리나라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 근대화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복 이후 곧바로 6.25전쟁을 치러야 했던 까닭에 근대화 과정은 정상적으로 구현될 수 없었다. 특히 전후 사회에서는 ‘산업화’에 밀려 ‘민주화’의 실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번 글은 불교문학이 광복 70년 동안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불교문학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홍기삼 평론가는 〈불교문학의 이해(민족사)〉에서 불교문학을 분류하면서 △불교경전 문학 △붓다의 가르침을 세계관적 토대로 수용한 창작문학 △경전과 창작의 중간 지대에 걸쳐 있는 문학의 자원(선시, 불교설화, 승전류, 영험록 등)로 나눴다.

이글에서는 불교적 세계관을 다룬 창작문학만을 다룰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그 이유는 사르트르가 말했다시피 “문학은 영구혁명 안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사회적 종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면 불교문학 역시 사회 현실을 담보해야 한다는 명제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불교문학들을 간단히 논하되 불교적인 제재를 차용함은 물론이고 주제에서도 보살(菩薩) 사상, 무아(無我) 사상, 선(禪) 사상 등 불교사상을 다룬 작품들을 텍스트로 했다. 그 이유인즉슨, 불교사상에 입각해 해석할 여지가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불교문학의 범주에 넣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시의 본령으로 서정을, 소설의 본령(本領)으로 서사를 꼽고 있는데, 이 역시 근대문학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가능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만해축전의 모습. 불교를 넘어 한국 근대문학의 초석을 다진 만해 한용운 스님은 불교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선양사업들이 진행 중에 있다.
한국 근대 불교문학의 원형
서정적인 시와 서사적인 소설이라는 한국 근대문학의 원형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바로 만해 한용운과 춘원 이광수이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는 보살사상이 용해돼 있다. 이타행을 통한 중생구제의 태도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것이다. 시집에 가장 빈도가 높은 다섯 개의 어휘는 ‘사랑(146), 꽃(74), 눈물(62), 이별(60), 죽음(41)’이다. 〈님의 침묵〉이 대표적인 서정시집으로 분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홍기삼 평론가가 지적했다시피 ‘만해의 시가 서정적인 아름다운 연가로 읽혀질 때 그의 모국어 사랑,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육체를 가진, 그래서 온갖 고통의 멍에를 쓰고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의미가 되어 아침 햇살 속의 이슬처럼 한결 영롱한 빛을 내뿜게’ 되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소설도 남겼는데, 1938~1939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박명〉은 순영의 대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보살행의 실천을 역설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춘원 이광수는 〈이차돈의 사(1935)〉, 〈사랑(1938)〉, 〈세조대왕(1940)〉, 〈원효대사(1942)〉 등 장편과 〈무명(1939)〉, 〈꿈(1938)〉 등 중·단편의 불교적 작품을 남겼다.

이중 단편 중에는 조신설화를 모티브로 한 〈꿈〉이, 장편 중에는 원효대사의 일대기를 그린 〈원효대사〉가 대표적인 불교소설로 꼽히고 있다.

〈원효대사〉는 원효 스님이 방울 스님에게서 선을 배움으로써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할 수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춘원 이광수가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는 등 대일 협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당시에 쓰인 것이어서 일본의 대동아 전쟁을 두둔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 불교문학으로는 1910년대에 발표된 양건식의 단편소설 〈석사자상〉, 〈한일월〉, 〈아의 종교〉, 〈오(悟)!〉와 1930년대 현진건의 장편소설 〈무영탑〉을 꼽을 수 있다.

만해 한용운과 춘원 이광수는 일제강점기에 시의 서정과 소설의 서사라는 기틀을 만들었고, 대표적인 불교문학을 남긴 주인공이었다. 다만, 둘의 차이가 있다면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민족주의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때로는 제국주의에서는 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하지만, 약소국에게는 파시즘에 맞서는 이념이 된다.

끝까지 일제에 맞선 만해 한용운과 중도에 일제에 부역한 춘원 이광수의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미당, 근대 문학의 기둥을 세우다
만해 한용운과 춘원 이광수가 한국 근대문학의 기초를 닦았다면, 미당 서정주와 김동리는 한국 근대문학의 기둥을 세운 인물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미당 서정주는 석전 박한영 스님과의 인연으로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전(中央佛專)에서 수학하게 된다. 그 결과 불교사상에 심취하게 되고 시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게 된다. 들끓는 원시성과 생의 의지로 충만했던 처녀작 〈화사집(1941)〉과 달리 미당의 시세계는 〈귀촉도(1946)〉 이후 전통문화에 차츰 경사된다. 〈귀촉도〉, 〈견우의 노래〉 등 작품들은 특유의 가락과 조탁된 언어로 전통적인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다.

이후 미당은 〈서정주시선(1955)〉에서 〈국화 옆에서〉, 〈상리과원〉,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무등을 보며〉, 〈풀리는 한강 가에서〉 등 작품을 통해 핍진한 전후 한국사회를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자연의 품을 빌려 위무한다.

미당의 시 세계는 〈신라초(1960)〉에서 신라의 역사 속에서 영원성을 발견한다. 〈선덕여왕의 말씀〉, 〈꽃밭의 독백〉, 〈노인헌화가〉, 〈인연설화조〉 등이 그 대표작이다.

미당이 본격적으로 불교사상에 귀의한 시집은 《동천(1968)》이라고 할 수 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내가 돌이 되면〉, 〈가벼이〉 등 작품들은 연시(戀詩)의 형태를 빌리고 있으나 그 내용은 불교사상으로 충만해 있다.

미당 서정주는 60여 년 동안 1,000편에 가까운 시를 남겼다. ‘시인 부족의 족장’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그는 우리의 모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우리 민족의 사상이 얼마나 심원한지 시를 통해 일깨워줬다. 그의 손끝이 닿는 곳에서 민족의 정한은 맑게 씻기어 영롱한 아름다움으로 바뀌었다.

전후 한국사회에서 서사문학의 원형을 만든 것은 김동리이다. 미당이 가장 한국적인 서정시를 썼다면, 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서사를 썼다고 할 수 있다. 김동리는 우리 민족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유불선(儒佛仙) 사상은 물론이고 토속사상과 기독교사상까지도 서사 속에서 용해하는 기량을 보였다.

토속사상이 깃든 작품으로는 《을화》, 〈무녀도〉, 〈황토기〉, 〈달〉, 〈역마〉, 〈바위〉를, 기독교 사상이 깃든 작품으로는 《사반의 십자가》, 〈목공 요셉〉을, 유교사상이 깃든 작품으로는 〈화랑의 후예〉, 〈용〉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솔거〉 3부작, 〈등신불(1961)〉, 〈극락조(1968)〉, 〈눈 오는 오후(1969)〉, 〈저승새(1977)〉, 등이 불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에 해당한다. 

〈솔거〉, 〈잉여설〉, 〈완미설〉은 불화(佛畵)를 모티브로 한 연작소설로서 비록 불교사상이 서사 속에 제대로 용해되지 못한 단점은 있으나 이후 한국 예술가 소설의 원형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등신불〉은 등신불을 제재로 다루고 있고, 그 주제도 승속일여(僧俗一如) 사상이어서 김동리의 대표적인 불교소설로 꼽을 만하다.

〈등신불〉은 학병으로 중국으로 끌려간 23세의 화자가 부대를 탈영해 한 사찰에 은둔한다는 게 줄거리다. 그 과정에서 화자는 정원사에 안치된 등신불을 친견한다. 등신불을 보는 화자의 심정은 아래와 같다.

허리도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그러한 어떤 가부좌상이었다.

소설 말미에서 원혜대사는 만적의 소신공양 이야기 끝에 화자에게 식지를 들라고 한다. 이는 나의 식지와 만적의 소신공양이 다르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저승새(1977)〉도 윤회사상이 잘 용해된 빼어난 김동리의 불교소설이다. 만허 스님이 주석하는 곳마다 저승새가 나타나는데, 이 저승새는 세속에서 사랑했던 여인인 남이가 환생한 것이다.

전후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인 미당 서정주와 작가인 김동리가 불교사상에 심취한 작품들을 남겼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는 한국문화의 젖줄 중 하나가 불교사상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미당 서정주와 김동리는 심원한 사상을 다루고 탁월한 미적 성취를 이뤘지만, 젠더(Gender, 계급성)적인 측면에서는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미당 서정주와 김동리는 친일행적은 물론이고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근대사 과정에서도 순수문학을 주창하면서 문단권력의 실세로 행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일 행적과 독재 찬양 발언 등은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당 서정주와 김동리가 남긴 문학적 궤적까지 폄훼돼서는 안 될 것이다. 미당 서정주와 김동리의 문학은 어찌 보면 전근대성에 기인하기 때문에 종교의 경지로 승화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동국대와 사단법인 미당기념사업회는 2월 26일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미당 서정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낭송 공연'을 개최했다. 동국대 교수를 지내기도 한 미당 서정주는 한국 근대 시문학사에 족적을 크게 남긴 인물이다.
구도소설, 깨달음을 소설로 만나다
미당 서정주 밖에도 6.25전쟁 전후로 많은 시인들이 불교작품들을 남겼다. 6.25전쟁 이전 활동한 시인으로는 백석, 김달진, 조지훈 시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백석은 토속 언어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 민족공동체의 정취를 복원했는데, 〈여승〉, 〈수라(修羅)〉, 〈절간의 소 이야기〉, 〈고사(古寺)〉 등 쓸쓸한 정조의 불교작품들은 식민지민의 정서를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그런가 하면 월하 김달진 시인은 승려 출신답게 심원적 불교적 사유가 용해된 작품들은 남겼다.  조지훈 시인도 승려 출신 시인 중 하나이다. 그가 남긴 〈앵음설법〉, 〈승무〉, 〈고사(古寺) 1〉 등은 불교사상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탁월한 서정의 결이 돋보인다.

이밖에 김광섭의 〈저녁에〉와 박두진의 〈유전도(流轉圖)〉도 윤회사상을 다룬 서정시로 손꼽을 만하다.
6.25전쟁 후 활동한 시인으로는 이형기, 박재삼, 신경림, 고은, 홍신선, 박제천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이형기의 〈낙화〉, 신경림의 〈갈대〉, 고은의 〈문의마을에 가서〉는 불교적 세계관이 어떻게 시로 형상화되는지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 그중에서도 산업화 과정이 본격화되는 1970년대를 맞아 한국문학도 한층 진일보하게 된다. 당시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역사의식(혹은 계급의식)이 전면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실천문학의 시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1970~1980년대의 불교문학은 역사의식이 보살사상과 회통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작가로 황석영과 조정래를 꼽을 수 있다. 황석영은 단편 〈삼포 가는 길〉에서 백화라는 술집 작부의 삶을 통해 당대 관음보살의 현현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백화는 관음보살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조정래는 대장경을 편찬하는 과정을 그린 역사소설 〈대장경(1976)〉을 통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가르침을 역설했다.

당대 발표된 양대 대하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태백산맥〉과 〈장길산〉에 등장하는 승려들이 신음하는 민초의 삶을 위무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1970~1980년대 불교문학의 또 다른 특징은 구도문학이 잇따라 발표된다는 것이다. 김성동의 〈만다라〉, 한승원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강인봉의 〈구나의 먼 바다〉, 남지심의 〈우담바라〉가 대표적인 불교계 구도소설로 꼽을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승려인 주인공이 불교적인 가르침을 사회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고뇌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중 〈만다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우담바라〉는 영화화돼 많은 관객이 몰리기도 했다.

정찬주는 1980년대부터 근현대 스님들의 전기를 소설로 펴냈다. 그의 생생한 전기 소설은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역할을 다룬 <천강에 비친 달>을 출간하기도 했다. 1970~1980년대에는 시단도 민초들의 아픔을 위무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미시담론의 1990년대 불교문학
1990년대 이후 불교문학의 특징으로는 미시(微示) 담론과 현학주의를 꼽을 수 있다. 미시담론은 1970~1980년대 문학의 특징인 거대담론의 반대급부로 나타난 것으로 존재론적 고독을 다루는 특징이 있다. 미시담론의 불교문학으로는 윤후명과 윤대녕 작가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이 두 작가의 작품은 불교적인 제재를 통해 영원성을 노래한다는 점과 빼어난 문체문학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과 윤대녕의 〈신라의 푸른 길〉 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에도 구도소설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데, 1970~1980년대와 다른 점은 보다 현학적인 성향을 띄고 가공의 인물이 아닌 실존인물의 전기를 다룬다는 것이다.

승려출신인 고은이 선재동자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화엄경(1991)〉과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의 구도기를 다룬 〈선(禪)〉을, 한승원이 초의선사의 행장을 형상화한 〈초의(2003)〉와 원효선사의 행장을 재해석한 〈원효(2006)〉를, 최인호가 경허선사의 행장을 모티브로 한 〈길 없는 길(1993)〉을 발표했다. 이중 한승원의 〈원효〉는 이광수의 〈원효대사〉와 달리 원효를 반전주의자로 그림으로써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원효사상이 지니는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노력했다.

이밖에도 1990년대 이후 불교소설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황석영의 〈심청〉, 송기원의 〈안으로의 여행〉, 김성동의 〈꿈〉을 꼽을 수 있다. 〈심청〉은 매춘 오디세이아의 서사 속에서 보살행을 다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안으로의 여행〉은 자전적 구도 여정이 돋보이고, 〈꿈〉은 조신설화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1990년대 이후 불교시를 발표한 시인은 수없이 많아 이름만 언급해도 이 지면이 다 채워질 정도이나 불교와 생태주의의 회통을 추구한 이문재 시인과 서정시 속에 불교사상을 용해하는 노력을 거듭한 문태준 시인만큼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근현대 한국문학에서 불교 아동문학으로는 정채봉의 〈오세암〉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문학은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 대중과 함께 웃고 울었다. 다만, ‘근대문학의 종언’이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상황에서 종교와 문학이라는 두 숭고미의 본령이 한국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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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대표적인 승려문인은?
韓 문학 전반 걸쳐 큰 영향

시 오현·소설 정휴 탁월한 업적
법정스님 ‘무소유’ 수필 열풍
〈유심〉 등 불교문학 견인차

광복 70주년 동안 활동한 승려문인은 적지 않다. 제3세대 문인들이 대거 활동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절정기인 이룬 1970~1980년대에 불교문학도 꽃을 피우는데, 이때 특징 중 하나가 1970년대 전후로 등단한 승려문인들이 시, 소설, 수필을 발표한다는 것이다.

오현 스님이 1968년 〈시조문학〉 시조부문에, 지현 스님이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정휴 스님이 197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성우 스님이 197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청화 스님이 197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잇따라 등단한다. 

이중에서 꾸준히 시 창작을 한 스님은 오현 스님과 청화 스님이다. 선시와 현대시가 조우하는 지점을 꾸준히 모색해온 오현스님은 《아득한 성자》, 《마음 하나》, 《절간 이야기》 등 시집을 출간했으며, 그 문학적 공로를 높이 평가받아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을 수상했다.

특히 오현 스님은 만해축전을 개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백담사를 문예도량으로 거듭나게 했으며,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창간한 〈유심(唯心)〉을 복간해 발행해오고 있다.

청화 스님은 시집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수필집 《돌을 꽃이라 부른다면》을 상재했다.

정휴 스님은 유일하게 서사문학에 천착했는데, 경허선사를 소재로 한 《슬플 때마다 우리 곁에 오는 초인》, 불교사상에 입각해 죽음 문제를 다룬 《열반제》, 광기 속에 예술혼을 펼친 중광스님의 삶을 그린 《중광》 등을 발표했다. 정휴스님은 선(禪) 문학을 대중화하는 작업에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1970~1980년대의 현상 중 하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수필문학의 시대를 견인했다는 것이다.

유응오 소설가
1980년에는 ‘승려시인회’가 발족됐고, 1983년에는 시인회를 모체로 ‘승려작가협회’가 창립됐다. 이후 진관 스님을 중심으로 승려시인회가 꾸준히 활동 중에 있다. 진관 스님 역시 최근까지 24권의 시집을 발간하는 등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불교계에는 시 전문 계간지인 〈유심〉이  복간되고, 문예계간지인 〈불교문예〉가 1995년 창간호가 발간돼 불교문예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1995년 제정된 현대불교문학상은 시인 신경림, 이시영, 정희성, 홍신선, 공광규, 소설가 한승원, 최인호, 전상국, 조정래, 송기원, 평론가 홍기삼, 권영민, 조남현, 김인환, 방민호 등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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