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원 토요법회 해주 스님(동국대 정각원장)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묶으면 ‘업’
업보의 소멸은 참회가 있어야 가능
살생 많이하면 ‘삼악도’에 떨어져
마음 참회할 때가 비로소 ‘진짜 참회’
적극적 선행펼치면 ‘화엄보살’도 이뤄

 

▲ 해주 스님은 … 운문사로 출가 동학승가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불교학연구회 회장과 조계종 중앙종회 종회의원 및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 수미정사 주지, 학교법인 승가학원 법인이사로 활동한 바 있다. 현재 동국대 정각원장을 역임 중이다.

마음참회가 진(眞) 참회
우리가 육도윤회를 하는 동안 제일 복이 많은 세계 두 곳을 말하라고 한다면 인간계와 천상계 일 것입니다. 인간계보다 복이 더 많은 세계는 천상세계입니다. 이 두 개를 합쳐서 인천복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여래십호(如來十號, 부처의 칭호가 열 가지라는 말)를 얘기하실 때 천인사(天人師)와 불세존(佛世尊)이라는 칭호도 십호 중에 포함하셨습니다. 천상계와 인간계의 모든 존재들의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육도(六道)의 모든 스승일수도 있지만 천상계와 인간계를 대표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천상복락이라 말하지만 천상복락이 인간복락보다는 못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으로 향해 갈수 있는 곳은 인간계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괴로우며, 때로는 슬프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또 적당히 희망을 가져 큰 꿈을 가지도 합니다. 하지만 천상계는 복을 누리느라 그런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인간계를 호구 발심하는 곳이라 일컫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은 큰 덕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면 천상계는 복진타락(福盡墮落, 복이 다하면 굴러 떨어진다는 의미)해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봤을 때 생활법문은 그러한 복을 잘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법문일까요? 그렇다면 ‘법문’이라는 말은 빠져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왜 문(門)자가 들었냐면 열반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문(門)자가 붙습니다. 불교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이것은 곧 부처님처럼 되게 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인천복락만 누리는 말씀으로는 그 길로 인도하기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재가생활, 신행생활 뿐만 아니라 출가생활, 수행생활도 다 ‘생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생활법문이라는 것이 범위가 굉장히 넓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와 관련해 〈화엄경〉 말씀 중 이구지(離垢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합니다. 이구지(離垢地)는 ‘모든 번뇌의 때를 다 여인자리’를 일컫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루 24시간 출가생활, 제가생활, 세속생활, 학생생활, 사회생활, 신행생활 등 여러 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육근(六根,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기관과 이를 통솔하는 의근)이 육경(六境, 육근에 대응하는 인식대상)을 상대해 육식(六識, 여섯 가지 마음 작용)을 발생하게 합니다. 반야심경에서도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묶어서 업이라고 합니다. 업에는 가보가 반드시 있어서 업보(業報)가 있습니다. 업보의 소멸은 참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루 종일 발생하는 업을 몇 가지로 나눠서 말해본다면 〈천수경〉에서는 십악참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십악이라 했으니 반대로 십선업도 있겠습니다. 선업과 악업을 열 가지로 나눠서 얘기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간추려 본다면 신삼구사의삼(身三口四意三) 신업(身業)에 세 가지, 구업(口業)에 네 가지, 의업(意業)에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는다면 당연히 의업입니다. 신업과 구업도 이미 있지만 마음이 함께 했을 때 가보가 발생합니다. 핵심은 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말하고 어떤 마음을 쓰는 것에 따라서 정신세계나 도달한 마음자리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수경〉은 마음으로 참회를 하면 열 가지가 다 끝난다고 말합니다. 〈천수경〉 이(理)참게 내용 중에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卽名謂眞懺悔)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회를 한다고 해도 마음 참회가 아니면 진참회도 아닌 것이라 합니다.

이구지가 수행에 있어서 도달되는 위치로 보면 사실 낮은 자리가 아닙니다. 〈천수경〉 ‘십업’에 대한 말씀이 〈화엄경〉 ‘십지’에 보면 담겨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구절을 봤을 때는 약간 의아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부분이 화엄경 전체의 말씀과 성격이 다르다고 봤습니다. 화엄경은 깊은 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인간은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착하고 좋은 일 하라는 사탕발린 말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사실 두 말씀이 다 같은 의미였습니다.

 

불살생 그 자체로 화엄
화엄경의 전체 수행을 얘기하자면 십바라밀로 얘기 합니다. 그중에 지계바라밀이 열 가지 선업을 닦으라는 십선업(十善業) 내용입니다. 열 가지 선업은 열 가지 악업을 안 하면 열 가지 선업을 닦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더 적극적으로 선업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생을 안 하는 대신 방생하고 도둑질을 안 하는 대신 보시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신행생활 하고 수행생활 하는 보살이 이 자리에 머물면 이런 분을 ‘화엄보살’이라 합니다. 심성, 즉 성품이라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은 다양하게 이야기 합니다. 편하게 ‘마음’이라는 한 단어로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사실 엄청 다양합니다.

그래서 성품자체가 살생과 거리가 멀어 불살생(不殺生)을 실천하는 분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나 모습을 나타낼까요?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등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기는 참 많이 아는데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기가 힘듭니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화엄에서는 첫걸음이 마지막 걸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즉 처음 마음만 일으켜도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도리가 화엄입니다. 이는 성품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살생 또한 그 자체로 화엄입니다. 사람들은 큰 것을 기대하다가 작은 것을 얻게 되면 실망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작은 것은 큰 것과 결코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몸 속 장기 하나가 잘못되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불살생 실천 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살생도구 자체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부엌 칼 등 필요할 때가 있지만 살생을 위한 도구로 몽둥이, 칼 등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돼 왕이 불법(佛法)을 믿으라 할 때 백제는 계율을 통해 불법을 믿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따르는 시행령 중 하나가 살생도구를 다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생도구는 다 농기구로 바꾸도록 한 것입니다.

또한 겉으로 들어나지 않더라도 마음 속 원한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 풀어지지 않는 한 때문에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화병은 사실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화엄에서는 일체 모든 것이 자기 마음에서 투영되고 만들어진 것이라 말합니다.

화엄경에 따르면 살생을 많이 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살생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인간계에 태어나더라도 두 가지 가보를 받게 됩니다. 단명하거나 병고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구가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던데 만약에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에 태어나 환생을 한다면 에너지 불변의 법칙처럼 인구수도 보존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많았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으며 지금까지 늘어난 인구는 어디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일까 하는 등의 생각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천상계로 더 많이 갔나, 아니면 축생계에 있다가 전부 사람으로 환생했나 하는 등의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물론 사람은 윤회(輪回)하며 가보를 받습니다. 한 사람이 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한 사람이 여러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해탈하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몸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어떤 심성으로 어떤 신행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인가를 돌아봐야겠습니다.

 

마음 낸 바에 따라 성품 결정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 〈화엄경〉80권 가운데 제6권으로 80권 전체 39품 가운데 2번째 품) 3게송을 할 것인데 이 말씀은 전부 〈화엄경〉 말씀입니다. 찬불게송 또한 〈화엄경〉 말씀입니다. 신행생활을 하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모두 이해하고 실천하고 받들어야할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이 여래현상품 게송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인데 승엄 보살이 했습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賢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리좌(以恒處此菩提座)
부처님의 몸은 충만해서 온 법계에 가득하고 일체의 모든 중생들의 앞에 있으니 인연 따라 감동이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 지금 우리가 항상 있는 이곳이 바로 깨달음의 장이다.

화엄의 핵심 사상이 담긴 게송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생들 앞에 부처님께서 나타나신 것도 중생연에 따른 것으로, 십지에 보살이 신행생활 하는 것도 전부 인연 따라 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인과(因果)를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를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은 법계에 충만해 늘 뵐 수 있지만 어떤 분은 뵙고 어떤 분은 못 뵙습니다. 이것은 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개개의 중생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감(感)이라고 하고,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만나지는 것을 응(應)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감응(感應)이라 합니다. 연 따라 나타난다 하여 중생들의 행위는 연기라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화엄에서 이를 연기라 하지 않고 ‘성기’라고 하셨습니다.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즉 부처님도 중생연 따라 중생들 앞에 나타는데 이것은 인연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닌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 하여 성기라고 표현합니다. 화엄에서는 모든 존재들과 존재들이 하는 일과 그 일체를 성기와 연기로 봅니다. 〈화엄경〉에도 37번째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이 있습니다. 예전 번역에 따르면 이를 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성품을 바로 보면 이 자리에 바로 성불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인의 삶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보시와 지계, 불살생 등 연기의 과정을 통해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연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 성품이 우리 안에도 내재해 있지만 부처님처럼 자유자재로 되지 않습니다. 인연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그 연조차도 화엄에서는 내 마음이 만들었다고 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성품에 있는 원한을 사라지게 만든다면 여러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잠깐 사라진 것을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불보살님의 가피와 스승님의 가르침, 일체 모든 불자님들의 인연들이 굉장히 소중하고 좋은 것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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