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붓다’

스승이 떠나고 공허해 하는 싯다르타
향락궁에서 기생 우르밀라 만나
사랑과 슬픔 비애 등을 경험


지난 줄거리

신도시를 건설하는 등, 왕자에게 세상의 고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왕의 계획은 점점 어그러진다. 신도시로 이사 간 백성 중 한 명이 왕궁으로 찾아와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등 싯다르타는 불합리하게 일어나는 세상의 일에 의문을 갖게 된다. 또한 강한 승부욕을 보이는 데바닷타와의 대결에서 싯다르타가 번번이 승리를 거두며 데바닷타의 분노는 극에 달하는데…
 

▲ 스승은 왕궁을 떠나며 싯다르타에게 분노, 증오, 마음의 끌림, 미혹, 갈애 등에 얽매이게 될 때, 그제서야 그것들을 놓아버리는 방법도 알게 될 거라고 이야기 한다.
치타가 마을의 아기를 물고 가는 사건이 발생하자, 싯다르타는 우선적으로 아이를 살리는 것에 치중한 반면 데바닷타는 싯다르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치타의 머리를 쳐서 들고 들어온다. 이렇게 되자 둘은 치타를 죽인 것이 옳다 그르다로 설전이 벌어졌고 왕궁 전체가 이 문제로 술렁인다. 데바닷타는 치타가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으니 죽이는 게 맞다고 말하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 인간은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마을 전체를 파괴하지 않나요? 우리가 얼마나 용감한지를 증명하려고 사람들을 죽여버리잖아요. 우리의 심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지요. 형에겐 사냥이겠지만 그들에겐 목숨이 끝나는 거지요. 이것은 범죄가 아닌가요?”
이 일을 계기로 싯다르타가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 자격이 있느냐에 대한 자질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숫도다나 왕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 싯다르타는 치타에게 물린 아기를 구해낸다.

이어 왕의 꿈 해석을 두고 논란이 일면서, 왕은 싯다르타에게 비폭력과 명상을 교육하는 스승 카운다냐를 나무라게 되고 그는 결국 사직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떠나는 카운다냐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 제 교육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숲속에서 어찌 살아가는지는 아직 가르쳐주시지 않았잖습니까… 완벽한 은둔에 대해서도…”
“어떤 것들은 가르칠 수가 없는 거란다 싯다르타. 시간이 지나면 너도 그것을 알게 될 게야. 분노, 증오, 마음의 끌림, 미혹, 갈애 등에 얽매이게 될 때, 그제서야 너는 그것들을 놓아버리는 방법도 알게 되는 거란다. 네가 경험하지도 못한 일을 지금 논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과일이 충분이 익은 다음에야 나무에서 딸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카운다냐는 자신의 책을 건네며 명상할 것을 당부한다.


스승을 떠나보내고 공허해하는 싯다르타를 보며 왕은 싯다르타를 향락궁으로 보낼 결심을 한다. 이렇게 향락궁에 들어간 싯다르타는 기생 우르밀라를 만나게 된다. 싯다르타는 우르밀라에게 성가를 부를 것을 권하지만 우르밀라는 자신은 성가를 부를 수 없다고 말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희는 오직 사랑의 기술만을 배웠습니다. 사랑이 저희들의 경전이고 매력이 저희의 성가이며 욕망이 그 열매랍니다.”

▲ 향락궁에서 기생 우르밀라를 만나게 된다.

그녀와 밤을 보낸 싯다르타는 마음이 불안할 때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숄을 선물한다. 이후 둘은 친구처럼 친하게 지낸다. 그러면서 싯다르타는 우르밀라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드로나단은 싯다르타가 향락궁의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겨 타락할 것이라 예상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아들 데바닷타가 취해서 궁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여성과 술의 향락에 빠진 데바닷타는 향락궁의 기생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기생이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시중들 것을 강요해 병세를 악화시키니 향락궁은 슬픔에 빠지고 싯다르타는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가슴 아파한다.


또한 향락궁을 나오는 싯다르타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바로 우르밀라의 연인이자 코살라국의 칙사인 발데프였다. 싯다르타는 우르밀라와의 관계를 의심해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남자를 용서하고자 한다. 그럴 수 없다는 숫도다나왕에게 싯다르타는 칙사를 살해하면 두 나라의 관계도 혼란스러워질 것이라 말하며 설득시킨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살아남은 발데프를 우르밀라와 결혼시켜 코살라국으로 보낸다. 한편 숫도다나 왕은 발데프가 국경을 넘어갈 때 살해하고자 하지만 이를 미리 안 싯다르타가 막아주면서 둘은 무사히 국경을 넘는다. 
 

▲ 우르밀라의 연인에게 공격당하는 싯다르타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철저하고 처절한 의심과 질문

한국의 스님들은 아침마다 부처님을 예경하면서 행선축원(行禪祝願)을 한다. 축원의 내용 가운데 한 구절이 붓다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참선정진(參禪精進)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의단독로(疑團獨露)이다. 의심이 덩어리가 되어 드러나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왜 이런 축원을 하는 것일까? 의심은 무엇이고, 덩어리는 무엇일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는 괴로움이 그득하지만 해결했을 때는 전쟁하다가 사로잡혀서 밧줄에 묶여 있다가 풀려난 것 같은 시원하고 후련한 해방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의심이 지극하면 문제를 풀려고 하는 노력도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 논리적이고 대강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듯 도저히 풀어낼 것 같지 않은 문제가 다가오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대했을 때는 생각나지만 밥 먹거나 잠자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잊어버리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지만 골똘히 생각하고 그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클 때는 무슨 일을 해도 그 문제만 또렷하게 다가서서 앞으로 가면 앞으로 따라오고, 뒤로 가면 뒤로 그리고 잠자거나 앉거나 눕거나 심지어 꿈을 꾸어도 그 문제는 나타난다. 그렇게 마치 작은 실마리가 뭉쳐져서 실타래가 되듯이 의심도 덩어리처럼 되는 것을 의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깨우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의심자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이 덩어리가 되어 드러나게 되면 해결은 어느덧 와있게 된다. 아난다가 결집에 참여하려고 수행하다가 되었음을 확인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 머리를 베개에 대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나는 초기불교도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생각한다. 착실하게 한 계단씩 밟아나가는 점수(漸修)의 방법을 쓰지만 깨달음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99.999%는 100%가 아니다.100%는 이뤄지는 순간에 이룬다.


드라마 붓다의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이 의심이란 놈이 영락없이 잡힌 짐승이나, 도둑이나, 적처럼 아니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애인처럼 척하니 다가서고 있다. 아니 항상 그와 함께 하고 있다. 8~10회를 통해서도 싯다르타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역시 의심이다. 그리고 그것의 표현은 질문이다. 드라마 붓다의 시청자들은 그의 의심이 어느 곳에 머무는 가를 살피는 것도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한국의 불자들은 의심과 질문이 습관화되어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싯다르타의 의심과 질문을 잘 새겼으면 한다. 싯다르타가 수행자로서의 길을 선택할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아버지 숫도다나는 향락궁이라는 여인들과의 정염을 마음껏 누리는 유흥가에 가도록 한다. 그 전에도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지 않는 데바닷타는 비아냥거리며 말한다. 또,또,또 질문이지. 추가질문이요~오. 데바닷타가 경전에서는 계속 못된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경전의 기록자들의 시각일 수도 있으나 싯다르타만큼 철저하고 처절한 의심과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의 한국불교는 금강경, 화엄경을 위주로 교학을 공부하면서 참선정진을 하는 참선행자나, 염불정진을 하는 정토행자나, 주력(呪力)정진을 하는 밀교행자 그리고 초기불교를 공부한 사마타행자 등이 있다. 기본을 모두 알고 특징적인 정진을 따로 하면 좋은데 하나만 알다보니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조금은 혼돈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해소하고 바른 신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가는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의심이 덩어리 되게 사유하고, 생긴 의심은 훌륭한 스승을 찾아 물어서 해결하고, 물어서 안 것은 또한 골똘히 사유해서 확인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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