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진흥원 수요법회 동명 스님(전등선림 선원장)

 

▲ 동명 스님은 … 1964년 해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내소사에서 사미계를,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75년 합천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백양사 등 제방선원에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화두로 참구했다. 87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을 졸업한 스님은 부안 내소사 주지와 조계종 종회의원, 개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 성북동 전등사 전등선림 선원장을 맡고 있다. <사진제공=대한불교진흥원>

 

타인에 맞춰 사는 ‘객’ 되선 안 돼
주인 의식으로 인생 끌어가야
정성 일념으로 부처 행 따를 것
담아둔 것 털어내야 행복 찾아와
마음은 정함 없고 걸림 없어
파란꽃 보고 빨간 마음 낼 수 있어야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라

우리나라는 학명 스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학명 스님은 달마 그림을 참 잘 그리셨습니다. 학명 스님이 그리신 달마 그림 화제에는 “객 노릇도 잘 못하면서 공연히 주인을 괴롭힌다”는 말이 써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제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달마를 보면 미소도 짓지 않고 우락부락한 얼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사실은 달마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달마는 그 속에 있겠지요. 얼굴을 무섭게 나타냈을 뿐이지 속마음은 아마 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명 스님은 그 달마의 모습을 ‘객’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매일 일과에 따라 아침에 일어나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며 일상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내 일상을 잘 살펴보면 사실 남의 살림살이만 얘기하고 정작 주인 없이 주인을 괴롭히는 경험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예불을 모시고 낮에는 법문도 하고 집에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면 ‘오늘 하루 종일 내 주인공은 어디에다 감춰놓았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저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혹은 얌전하지 않으면서 얌전한체하려고 하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서도 안 먹는 척 하고 보는 눈들이 많기 때문에 옷도 말끔히 입습니다.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집에만 있으면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밖에 나오면 사람들 보는 눈 때문에 신경 쓸 게 무척 많아지지요. 그런 것들이 주인을 잃은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인이란 건 뭘까요? 우리는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야합니다. 객으로 살면 하는 행동이 달라집니다. 저는 절에서는 주인으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면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항상 주인을 잃지 않고 주인 노릇을 철저하게 잘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불자님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사실 스님들 생활이 편치가 않습니다. 걷는 것도 점잖게 걸어야하고 말도 법도에 맞도록 해야 하고 되도록 자비스럽게 생활을 하는 것이 스님 생활입니다. 그런데 절에 오는 불자님을 만날 때 보면 주인의식으로 오는 사람은 행동이 다릅니다. 앉아 있는 것, 보는 것도 다르고 어디 서 있건 그 사람은 눈에 들어옵니다. 재미로 혹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잠시 신심이 있어서 오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앉아 법문을 듣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도를 잘 드려야 합니다. 어떤 기도를 올리거나 제를 올려도 그 하는 행위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화장실을 갈 때도 가는 모습이 점잖아야 뒤에서 보더라도 멋있습니다. 요즘 TV를 보니 남자는 앉아서 소변보는 것이 좋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저는 박수를 쳤습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너무나 거칠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준다면 마땅히 수정해야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런 공들임 없이 알량한 마음으로 어떤 것을 누리려 하는데 저는 이것이 못마땅합니다. 내 본심을 정성도 들이지 않고 그저 복권 당첨되듯 내 삶의 주인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정성이 필요합니다.

법문을 들을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야지 과연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이 듣고 있는 것일까요? 마음을 두고 있을 때 듣는 것이지 귀로 듣는다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만 따라 가다보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 감고 길을 가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처럼 귀로 듣는 것만으로 살림살이를 산다면 부자 되는 살림살이는 할 수 없겠지요.

부처님의 행을 하는 사람들은 털끝만치도 흔들림이 없어야합니다. 당당하게 생활하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자신을 갖고 매사 정성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설사 다 쓰러져가는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 해도 중요한 것은 열심히 불공드리는 그 순간입니다. 그 정성을 부처님께서 쳐다보는 것이지 겉치레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이 중요합니다. 정성으로 우리의 삶을 이겨내고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닫힌 마음 열어 행복 찾을 것

부처님도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 중생들은 어떻습니까? 설사 내 자식이 회사 사장이고 대학 총장이고 대통령이더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졌다고 뻣뻣하게 행동하는 것은 보살정신이 아닙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더 아름답고 멋있어야지 그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살면 죽을 때 내 삶을 뜨겁게 태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흐트러지면 여기가 화택이요, 마음이 안정되면 그곳이 극락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편해야 고요한 것을 찾을 수 있을 뿐 겉모습을 가지고 가치를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는 인연법을 중요시합니다. 내 자식이 차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사실 부처님한테 아무리 불공을 올려도 내 자식이 죽었다면 불공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일들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그 생로병사의 원리를 알고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불교를 믿으면 왜 내 자식이 그런 변고를 당했는지 원리를 알게 되고, 고통을 조금이나마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절에 와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다 불교이자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가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불자님은 어느 때나 어느 자리에 앉아 있건 그 자리가 환해집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쉽게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만큼 간사한 동물이 없습니다. 개는 예뻐해 주고 먹을 것을 주면 꼬리치고 좋아하지요. 그런데 사람은 누군가 자기에게 잘해줘도 꼬리치듯 기뻐하면서도 마음은 열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닫힌 채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다들 후회를 하고 삽니다. 죽어서 상여 매고 갈 때까지도 결국 마음 안 열고 가는 사람들을 여럿 봤습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꼭꼭 담아둔 채로 가는 겁니다. 우리 보살님들 바깥 처사님이 “당신 어머님은 참 못났다”면서 친정에 대해 한 마디 얄궂은 말을 한다거나, 임신해서 먹고 싶은 음식 사다주지 않으면 절대 잊지 못하지요. 물론 속은 상하겠지만 담아둔 것을 펴내지 못하고 죽는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스스로 떨치는 것이 어렵다면 부처님 전에 찾아와 풀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마음은 정함 없고 걸림 없다

스님에게만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파란 꽃에서는 파란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마음의 실체는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은 마음은 분명히 있습니다. 파란 꽃에는 파란 마음, 노란 꽃에는 노란 마음, 붉은 꽃에는 붉은 마음, 하얀 꽃에는 하얀 마음이 있습니다. 대게 마음을 보지 못하고 일평생 살다 가는데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마음을 좀 보고 사시길 바랍니다. 모난 꽃에는 모난 마음, 둥근 꽃에는 둥근 마음, 큰 꽃에는 큰 마음, 작은 꽃에는 작은 마음이 핍니다. 형체가 없기 때문에 정함이 없는 마음이며 걸림 없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린 일평생 쓰고도 남는 것이 있을 것인데 왜 그 ‘걸림 없는’ 마음을 쓰지 않고 평생 동안 ‘걸려있는’ 마음만 쓰는 것일까요. 따라서 파란 꽃을 보고도 빨간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병 갔을 때 국화꽃을 가져가면 꽃만 보고 ‘왜 국화꽃을 저 사람이 갖고 왔을까? 내가 죽길 바라고 있나? 장미 갖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난 오래도록 살고 싶은데’ 등 오만가지 생각이 들지요. 하지만 보다 깊은 뜻을 보아야 합니다. 저희 절에는 영가등으로 빨간등도 킵니다. 왜 영가등은 하얀 것만 써야합니까? 빨갛고 예쁜 장미 연등이 더 아름답지 않나요? 연등이란 것은 닫혀있는 마음을 열라는 의미로 불을 켜는 것입니다. 파란색 빨간색 하얀색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보여주기 위해서 했을 뿐이지 영가에게는 하얀색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음도 없는데 삶이 있겠습니까? 삶도 없는데 죽음이 있을까요?

뼈대 있게 살아야합니다. 부처님 법은 이 세상에 어떤 법보다 가장 수수합니다. 생로병사가 없다면 사실 말할 게 별로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들이 있지만 불교는 시시하게 지옥이니 극락이니 하는 것들을 말하지 않지요. 쓸 데 없고 사소한 것에 눈 돌리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절에 와서 아무 말도 없이 기도드리는 자세가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묻어나기도 하고, 그 모습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불자님들에 절에 찾아와 기도하는 거 보면 저는 환희심을 느끼곤 합니다.

그 모습에서 그 사람의 무게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무게가 없으면 막 대하게 되고 우스갯소리로 지나가던 귀신도 한 번씩 때려봅니다. 그런데 무게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설사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은 한 동자스님이 밥을 먹고 있는데 그 앞에 있는 노스님이 바라보고 있으니 부처님이 내려와서 동자스님 머리를 만지더랍니다. 그래서 동자스님한테는 그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고 혹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어제 공양을 하다가 뱀 머리 나와서 깜짝 놀랐다고 하며 그것을 드러내 몰래 감춰뒀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마음이 쓰일까봐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기특해서 칭찬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무슨 행동을 하든 항상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허튼 행동을 하곤 하는데 관세음보살님은 항상 그리고 전부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가 보든 말든 괘념치 말고 항상 점잖고 우아하게, 그리고 시시하게 살지 마십시오. 아까 얘기했듯이 정함이 없는 마음을 쓰라는 말입니다. 정함이 없는 마음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정해진 바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큰스님일수록 계율을 잘 지키고 반 만생을 정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정함이 없는 무유정법을 지키며 사십시오. 정함이 없는 법을 아는 동시에 생명 있는 것을 다독거리고 살 줄 알아야 하며, 부자로 사는 사람이 가난한 자를 함께 생각하고 가난한 자로 사는 사람도 역시 부자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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