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 - 불교와 뇌과학

마음은 찰나 한점 식의 흐름
윤회·해탈의 불교 가르침과도 조화
인지속박서 벗어나는 것 ‘깨달음’

두뇌의 활동을 측정하는 장치가 아무리 정밀해져도, 우리의 마음에서 절대로 객관화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철학자들이 ‘감각질(感覺質, Qualia)’이라고 부르는 주관적 체험이다. 내가 맛 본 소금의 짠맛을 남이 전혀 알 수 없고, 내가 느낀 치통을 남이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세상만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이 우리들 각자 하나씩 갖고서 혼자만 보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와 같다. 모든 것이 나의 주관적 체험이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실재하는데, 체험되는 것은 나의 주관뿐이다. 남의 주관은 그 존재를 추측할 수는 있어도 체험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 또는 의식은 주관에서만 작동한다. 이런 주관, 마음, 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심리철학과 뇌과학의 난제이긴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화엄학의 통찰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화엄경〉의 부처님은 비로자나부처님이다. 화엄신화에 의하면 대위광(大威光) 태자가 무수한 세월 동안 보살행을 한 끝에 비로자나부처님으로 성불하면서 그 몸 그대로가 온 우주가 되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이 우주 그 자체다. 우리 모두는 비로자나부처님의 몸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이다.

그러면 화엄학의 이런 통찰을 예비지식으로 삼아 주관, 또는 마음, 또는 의식의 정체를 구명해 보자.
‘일미진중함시방’에서 ‘일미진(한 점의 티끌)’과 ‘함시방(온 우주가 담김)’을 구분할 때, ‘한 점 티끌 크기의 어느 한 지점(一微塵)’에도 ‘온 우주의 모든 정보(十方)’가 담겨있다(含). 여기서 바로 그 ‘한 점’이 바로 객관이라면, 그 안에 ‘담긴 온 우주’는 그 ‘한 점’의 주관적 측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우주의 그 어떤 지점을 잡아도 그 지점은 객관과 주관의 양 측면을 갖는다. ‘일미진’의 측면과 ‘함시방’의 양 측면을 갖는다. 그래서 의상 스님의 법성게에서는 “낱낱의 미진에도 역시 그러하다(一切塵中亦如是).”고 노래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서 어느 한 지점을 잡아도 그 점 속에는 시방의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 3차원 우주상의 그 어떤 좌표점도 ‘한 점’이라는 객관적 측면과 ‘함시방’이라는 주관적 측면이 함께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주관성’(心)은 진화과정에서 창발한(Emergent) 것이 아니고 생명체(衆生)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공간(佛)의 모든 지점에 ‘주관성’이 잠재한다. 우리가 사는 3차원 우주의 본질이다. 우주 그 자체인 비로자나부처님(佛)의 몸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다르지 않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고 설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는 생명체의 진화과정에서 물리적 세계만 존재하다가, 나중에 주관 또는 마음 또는 의식이 출현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이와 반대다. 진화 초기에 모든 생명체는 타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주관적 체험만 존재하다가 감각기관이 생기면서 비로소 객관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일 테다. 그리고 인간의 뇌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객관의 모호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진화과정에서 주관은 객관에 선행(先行)한다.

‘상일주재(常一主宰)’한 자아는 없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 이전의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회전한다고 보았다. 지구는 둥근데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천동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솔직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였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회전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천문학 이론은 단순해졌다. 태양과 지구의 관계에서 주객을 뒤바꾸자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다른 모든 행성의 운동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 것이다. 칸트(Kant, 1724~1804)는 ‘인식’과 ‘대상’의 선후관계를 역전시킨 자신의 인식론 철학을 이에 빗대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마음과 뇌의 관계를 구명하고자 할 때 난관에 빠지는 이유는, 뇌에서 마음이 발생했다거나 객관 세계에서 주관성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선입견 위에서 연구하고 이론을 모색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생명체의 진화과정에서 주관이 객관에 선행한다. 각 개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촉각이나 미각, 후각과 같은 ‘근접 감각’만으로 이루어진 유일무이의 주관만 존재하다가 진화과정에서 시각과 청각이 열리면서 점차적으로 객관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지렁이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종차(種差)를 넘어서 일관하는 마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그 실마리를 주관에서 찾아야 한다.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이 있고 그 속에서 내가 산다”고 생각한다. 3인칭 시점이다. 객관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주관에서 출발하여 객관을 해석한다. 일체를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로 나누는 오온(五蘊)설이 그렇고, 일체를 더 세분하여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 가지 지각기관과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여섯 가지 지각대상의 열두 영역으로 나누는 십이처(十二處)설이 그렇고, 일체를 좀 더 세분하여 지각기관 여섯(眼~意)과 지각대상 여섯(色~法)과 지각내용 여섯(眼識~意識)의 열여덟 가지 요소로 나누는 십팔계(十八界)설이 그렇다. 모두 나의 주관적 지각을 토대로 구성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一切)’이다. 오온 가운데 ‘마음’에 해당하는 것은 ‘수, 상, 행, 식’인데 이 중 ‘수, 상, 행’은 십이처 가운데 ‘법처’이고 ‘식’은 ‘의처’다. 또 십팔계 중에서는 육식계와 의계가 의처이고, 법계가 법처다.

매 순간 우리는 변화를 인지한다. 움직임이든, 소리이든, 색깔이든, 냄새든, 맛이든 변화에 대한 매 순간의 앎은 모두 ‘앞 찰나의 감각’과 ‘지금 찰나의 감각’을 비교함으로써 얻어진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은 직후 1회용 봉지커피를 마시면 단 맛이 덜 느껴진다. 순간적으로 비교가 일어나면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찰나적으로 일어나는 ‘의존적(緣) 발생(起)’이다. 즉, 찰나적인 연기(緣起)다. 앞 찰나의 사건이 ‘등무간연(혹은 차제연)인 조건’이 되어 뒤 찰나의 사건의 의미가 규정된다. 오늘과 내일을 비교할 수도 있고, 오전과 오후를 비교할 수 있고, ‘아까’와 ‘지금’을 비교할 수 있지만 시간적 비교의 궁극은 찰나적이다.

앞 찰나와 다음 찰나를 비교하는 일이 모든 ‘의미 발생’의 토대가 된다. 의식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의 토대가 된다. 의식은 매 순간 변화하는 찰나적 흐름이다.

실재하는 것은 ‘무상하게 명멸하는 한 점 식(識)의 흐름’일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무상하게 명멸하는 한 점 자상(自相)의 흐름’일 뿐이다. 특수의 특수, 실재의 궁극에서는 인식과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다. 한 찰나 동안만 존재하는 ‘한 점의 자상’이 그대로 그를 인식한 ‘한 점의 식(識)’이기도 하다.

마음의 정체, 그리고 윤회와 해탈

현대의 뇌과학 연구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유물론으로 기우는 이유는 과거의 일반적인 ‘자아관’이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전통의 경우 일반적인 자아는 감성(Sensibility)과 오성(Understanding)과 이성(Reason)으로 이루어져서 회상도 하고 상상도 하며, 지각도 하고 추리도 하는 자아였다. 그것이 단일한 영혼이고 정신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대한 이러한 생각, 즉 서구전통의 일반적인 자아관, 영혼관은 뇌손상 환자들의 증례와 상치된다. 마음의 본질을 ‘무상하게 명멸하는 한 점 식의 흐름’이라고 규정할 때 뇌 손상 환자들의 여러 증례와도 어긋나지 않으며 윤회와 해탈이라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조화를 이룬다.

뇌의 신경망은 ‘마음이 창발하는 곳’이 아니라 역(逆)으로 ‘한 점 식(識)으로서의 마음이 타고 흐르는 궤도’다. 물론 뇌는 국소적 신경회로의 모듈(module)로 가득하며 순차적으로 작동하는 컴퓨터와 달리, 여러 가지 모듈들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동시에 작동하는 병렬 프로세스이긴 하지만 주의와 의식, 기억과 회상 등과 같은 주관적 과정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이는 앞에 인용한 〈전습록〉에서 말하는 귀적(歸寂)이 아니라 명백(明白)으로서의 식(識)이다. 찰나설에서 보듯이 그 ‘한 점의 식’은 1초에 최대 75개소의 지점까지 순차적으로 머물면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는 등 여러 기능들을 발현한다.

마음의 본질을 ‘주의를 타고 흐르는 한 점의 식’이라고 규정할 때, 그 기능에 대해 통일된 해석이 없는 뇌파(腦波)에 대한 연구도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다. 뇌파는 두피에서 측정한 전압의 파동적 변화다. 귓불 등을 기준전극으로 삼고 전압계(Voltage meter)의 다른 한 극을 두피에 접촉시키면 리듬을 갖는 전압의 변화가 관찰된다. 1초에 8~12회 진동하는 뇌파를 알파파(Alpha波), 12~30회의 진동을 베타파(Beta波), 4~7회를 세타파(Theta波), 4회 이하를 델타파(Delta波)라고 부른다. 알파파는 눈을 감고 이완 상태에 있을 때 나타나고, 베타파는 깨어서 활동할 때의 일반적인 뇌파이며, 세타파는 졸 때, 델타파는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주로 나타난다.

‘한 점 식의 흐름’이 인지(認知)를 구성하기 위해서 뇌의 각 부위를 재빨리 왕래하면서 신경회로를 점화할 때, 인접한 두피에서 일어나는 전압의 파동적 변화가 뇌파일지도 모른다. 30Hz 이상의 뇌파를 감마파(Gamma波)라고 부르는데 이는 동시에 두 가지 지각정보를 제시하면서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서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주시하면서(시각) 휴대폰으로 통화할(청각) 때 ‘한 점 식의 흐름’은 후두엽의 시각영역과 측두엽의 청각영역을 분주히 오가야 하며 뇌파의 파동 수는 늘어난다. 이와 반대로 어떤 하나의 대상에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때 4Hz이하의 델타파가 나타난다고 한다. 마음이 이완될수록 뇌파의 진동수가 줄어들고 분주할수록 늘어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한 점의 식’이 주의(Attention)의 찰나적 요동을 따라서 대뇌 피질의 각 영역을 분주히 오가면서 남긴 흔적이 뇌파일 수 있다.

‘한 점 식의 흐름’은 시공연속체의 최소단위인 ‘점-찰나(point-instant)’의 연속이다. 그 ‘점-찰나’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사라진다. 인식론적으로는 현량(現量)이라는 인식수단이면서 자상(自相)이라는 인식대상이기도 하다. 오직 한 찰나 동안만 존재하는 하나의 점이다. 존재론적으로는 시방(十方)을 담고(含) 있는 일미진(一微塵)이다. 이 ‘점-찰나’의 객관적 측면은 4차원(x, y, z, t) 시공좌표에서 유일무이한 ‘한 점’이고 주관적 측면은 ‘시방’에서 감관과 뇌의 해석을 거쳐 그 한 점으로 들어오는 색, 성, 향, 미, 촉, 법의 정보들이다. 지극히 주관적 체험이라는 감각질(Qualia)의 경우도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유일무이의 것들이다. 과거에 내가 느꼈던 감각질도 ‘생각 속의 감각질’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감각질과 다를 게 없다.

부처님께서는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의 세 가지 신통력(三明)이 저녁, 자정, 새벽에 차례대로 열리면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한다. 자신의 전생을 모두 기억하는 숙명통과 다른 생명체의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관계를 모두 아는 천안통, 그리고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누진통의 셋이다. 숙명통이 가능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한 점의 식(一念)’에 무한한 과거(無量劫)가 누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꿈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영상과 소리가 나타난다. 한 점 식의 흐름이 대뇌피질의 시각영역과 청각영역을 훑으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숙명통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전생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방식 역시 이와 같으리라. 현생의 대뇌 기억 회로에 저장된 그 무엇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과거를 머금은 한 점 식의 흐름(無量遠劫卽一念)’이 대뇌피질의 캔버스에 그 과거 이력(履歷)을 그리는 것이리라.

불교의 깨달음은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계(戒, 윤리), 정(定, 집중), 혜(慧, 지혜)의 삼학(三學)을 통해 성취된다. 이 가운데 계행은 뇌의 세 층위 가운데 ‘감성의 뇌’와 ‘본능의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수행이다. 나와 세상,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때, 그 모든 것이 ‘연기(緣起)한 것이라서 공(空)하다.’는 점을 자각하여 고정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사고의 뇌’인 신피질 도처에 형성되어 있는 고정관념의 신경회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렇게 감성의 속박(修惑)과 인지의 속박(見惑) 모두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적 깨달음이다. 뇌가 어떤 특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뇌에 가득한 ‘감성의 신경망’과 ‘인지의 신경망’의 속박에서 ‘한 점 식의 흐름’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탈한 ‘한 점 식의 흐름’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적멸에 든다. 본능과 감성과 고정관념으로 가득한 생명의 세계, 윤회의 세계에 더 이상 미련이 없기(無願三昧) 때문이다. 아라한의 죽음이다. 완전한 열반이다. 더 이상 내생이 나타나지 않는(不受後有) 대열반이다. 그래서 모든 아라한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다시] 탄생[함]이 파괴된다. 청정한 행을 완수했고 해야 할 일을 했다. [나에게] 내세의 삶은 없다고 안다.” 자신이 깨달았다는 자각(解脫知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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