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사대가 돼서 흩어지고 말지만

이 정신, 너의 진짜 참마음은 끝 간 데 없이

바로 너를 살리고 너의 중생을 살리고

수 많은 외부의 중생들을 다 건질 수 있다는 걸 알라.

 

▲ 그림 최주현

형제 법우님들, 앞으로는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더 마음을 계발해서 천체를 앉아서 조절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우리 모두 스스로, 근본으로부터 배출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정말이지 절실한 일입니다.

이런 걸 여러분이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 법은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비유해서 조그마한 티끌만도 못한 것을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전에 여기 한 처사님이라고 아시죠? 그분이 사흘을 못 넘긴다고 의사 셋이 다 그랬습니다. 그런 걸 “몸에 꽂은 거 다 빼고 죽든지 살든지 나갑시다.” 하니까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리더군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무조건! 무조건 말입니다. 이유는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 이 사람은 누구든지 데려갈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무조건입니다. 왜 그랬느냐? 상원사(上院寺)를 지을 때에도 그랬었지만 뭐든지 무조건이지 거기는 이유가 붙는 자리가 아니다 이 소립니다. 무슨, 어려워서 못살겠네, 죽겠네, 이것이 잘못됐네, 저것이 잘됐네 이런 게 붙으면 그건 진짜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이란, 여러분의 법이란, 그 묘하고 슬기롭고 진짜 아무것도 붙지 않는 그 자리에서, 눈은 샛별같이 떠지고 한생각은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시면서) 솟는 그 무조건적인 생각! 예, 이런 것이 건질 수 있는 겁니다. 그거는 크고 작고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꼭 하겠노라!” 하고 주먹을 불끈 쥘 때, 마음속에서 정말 절절한 눈물을 흘리지마는 눈은 생동생동하게 더 똥그랗게 떠지고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는 이러한 그 ‘무조건’의 생각, 그겁니다.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 ‘주인공이 해 주겠지.’라고 한다면 아니, 그러면 주인공 따로 있고 여러분 따로 있습니까? 그것도 관법을 통해서 여러분의 지혜 물리가 터져야 알 겁니다, 아마.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을 하는 거지.’ 그게 관(觀)입니다. 또 지금 내가 무조건이라고 그런 겁니다. 어떠한 문제를 꼭 해야만 되겠다 할 때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거기에는 아무 이유가 붙지 않아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망상은 끊는 게 아니라 바로 여러분에게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는 수련 재료이자 바로 여러분을 성장시키는 과정이죠. 그렇기 때문에 망상을 끊지 않고 여여하게 그대로 넘어가는 무조건! 망상을 한다고 여러분이 생각을 하니까 망상이지 아니, 누가 망상이라고 이름을 지어 놨는지, 그것도 사람이 지어 놨지 누가 망상이라고 지어 놨겠습니까? 그것에 왜 흔들립니까?

줄창 말하지만, 이 세상에 누구나가 다 수억겁에 걸쳐서 엄청난 그 과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랬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에 쓸리고 저기에 쓸리면서 진짜 부처님의 골수를 모르게끔 자기 마음으로 그렇게 만들 겁니까? 그래서 부처는 너무 가까워서 위 속눈썹하고 아래 속눈썹하고 똑같이 작용을 하는 그것이 바로 부처님 법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자기와 아주 가깝게 있으니 멀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언젠가 한번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요새 암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 암이라고 하는 이름에 그만 끄달려 포기를 해 버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또 백혈병이라고 해서 포기합니다. 뼛속으로 썩어 들어간다고 해서 포기합니다. 무엇이든 여러분이 포기를 하니까 포기가 되는 겁니다. 이건 여러분이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골수에 전부 병이 들어서 썩어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 속에서 벌레가 뼈를 긁어 먹는다고 의사가 그러더라고 그럽니다. 병원을 여섯 군데를 다니면서 진찰을 해 봐도 다 그러더라는 겁니다. 내가 그때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뼛속을 긁어 먹는 게 아니야.”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알면 좋은데 모르니까 “그거는 긁어 먹는 병이 아니니까, 그냥 우리가 감기 조금 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습니다.

또 한 가지는, 거기에서 한 거니까 무조건, 이건 절대로 이런 병이 돼서는 안 된다고 아주 작심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이름을 모르겠습니다만 저 원주 소태면이라나? 소천면인가요? (대중 가운데서 ‘소초면’이라 함.) 응! 소초면인가요? 이제 이름도 잊어버렸어요. 너무 오래 되어서요. 그랬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병원에 다니면서 집을 팔고 땅 있는 걸 다 팔았습니다. 나중엔 정말이지 남의 행랑채에 들어 있어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공부를 모르기 때문에 방편상 그렇게 한 거죠. 이 부처님 법은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약으로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가 약입니다, 그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했죠. “야, 감자 한 관 살 돈은 있느냐?” 그러니까 있대요. 감자 한 관에 2천 원이래요. 그래 2천 원어치를 사 가지고 가서, 갈아서 즙을 내서 거기에 미숫가루를 멀겋게 타서 간식으로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또 맛있게 해 먹으려면 누런 설탕 사다가 가미해서 그냥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그게 거기에 해당이 됩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글쎄. 그게 거기에 해당이 되는 겁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진짜로 믿었던 겁니다, 진짜로! 아는 사람 같으면 그거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믿었죠. 자식들은 칠 형제나 되고, 쉰 살에 또 늦게 아들을 낳아 가지고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진짜로 믿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살고 계시고, 쉰 살에, 늦게 낳은 그 아들의 덕을 보고 지금까지도 사시고 계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래서 아리송한 게 부처님 법입니다. 아주 정말이지 이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가끔 한 처사님한테도 그랬지만, 이렇게 해 본 예가 있습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보이는 세계에 나오는 모든 거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나온 거거든요. 그래서 딱 진을 쳐 놓고선 “안 돼!” 하면 아예 그냥 못을 콱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시면서) 쳐 놓는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그런 예가 더러더러 있죠. 왜? (한숨을 내쉬시고) 내 가슴이 너무 아파서요. 그 사람이 죽고 살고, 또는 ‘여기 믿으러 다녔는데 안 고쳐져서 어떡하나?’ 그런 거를 떠나서, 그런 거를 다 떠나서, 믿고 안 믿고 그걸 떠나서 말입니다. 이렇게 정립이 되고, 그 못을 박는, 정말이지 굵은 불바퀴를 그냥 콱 (주먹을 쥐어 내리쳐 보이시면서) 박는 그 마음은, 아마도 이 세상 다 없어진대도 그건 빼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참답게 아신다면 정말 여러분은 법신(法身)이요 불부처요 산 부처요, 여러분이 화신(化身)이요 법신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글자도 붙지 않고, 이론도 붙지 않고, 더한다 덜한다, 이게 옳다 그르다도 붙지 않고, 가난하다 또는 부자다도 붙지 않고, 위대한 사람이다 위대하지 않은 사람이다도 붙지 않습니다. 진실한, 그 뼈저린, 아주 진한, 바닷물을 다 모아서 한 방울이 되는 그 피 한 방울이 말해 줍니다. 이건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난 어저께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은 한없이 쏟아지고 누구한테 보일 수도 없어서 보이진 못하나마 눈이 생둥생둥하게 떠지면서 기둥이 와짝 (주먹을 쥐어 보이시면서) 섰습니다. 그건 왜 그랬을까요?

또 한 가지는, 우리는 지금 정신계로 치닫고 있습니다. 공부하시는 여러분이 이 세상을 바로 여러분의 어깨에 짊어진 채 한생각을 내서 둥글려서 모든 걸 해 나가신다면 우리나라는 진짜 융성하게 될 겁니다. 오늘은 너무 느낀 점이 많은데요, 조그만 그릇에다가 재료를 많이 부어서 막 흘러내려서 부작용이 나 가지고 저렇게 야단들을 하지 않도록 우리는 정립을 해야 됩니다, 또. 그럼으로써 자라나는 새싹들이 주인이 돼서 살 때, 그리고 그 밑으로 밑으로 내내 선맥(禪脈)이 끊어지지 않고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도록 지키고 나갈 수 있게끔 법신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들이 “학술적으로 하지 않고, 경전으로 하지 않고 왜 그렇게 딴말을 하느냐?”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했죠. “풀포기 하나도 생명이 있고 이심전심으로 전달하고, 같이 공생(共生)을 하고 공식(共食)하고 있는데 무엇이 부처님 법이고 무엇이 부처님 법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가톨릭교인이고 기독교인이고 다 와서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디 호텔을 정해서 설법을 한다 하고 기별을 하니 심지어는 가톨릭교 신부나 목사도 모입디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그냥 서슴지 않고 대답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나중에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면서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러면서도 남에게 해롭게 대답도 하지 않고 어떤 거 하나 나쁘다는 것도 없이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느냐고 그러는 겁니다. 그랬는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부처님 법이 그렇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잘났다고 해 봐야 이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잘났으며, 이 고깃덩어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의 골수는, 여러분의 누진(漏盡)으로서 오신통(五神通)을, 법바퀴를 벗어나야 바로 불바퀴를 굴릴 수 있으며, 불바퀴를 벗어나야 바로 이 마음이 천백억화신으로, 분신으로 화해서 바깥으로 전 우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들락거리면서 이걸로 쓸 거는 이걸로 쓰고, 저걸로 쓸 거는 저걸로 쓰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또 이 지구만 해도 이 안의 세계를 위하여 지구 바깥으로 세 개의 소임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뭐냐. 지구 바깥에 법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법계라는 그 자체는 무엇이냐. 우리네들의 마음, 생명이 있기 때문에 바로 우리네들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고 하는 것처럼, 지구도 살아 있는 생명들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물질, 혹성이기 때문에 많은 물질들이 입자를 통해서 분자가 돼 가지고는 세 가지 소임을 합니다. 아주 질서정연하게 단계 단계 단계…. 그래서 지구 바깥으로 그 단계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소임을 맡은 단계입니다. 안으로 들이고 바깥으로 내는 소임, 안으로 바깥으로 전부 통신하는 소임, 그리고 책정을 하는 소임, 세 가지를 그렇게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안으로 들이고 밖으로 내는 것만 보더라도 더 넓게 보면 이 지구 안으로 모두가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도, 우리가 지금 발을 붙이고 다니는 것도, 남극 북극에서 그 소임을 하면서 들이고 내기 때문입니다. 남극이 똥 누는 데라면 북극은 먹어야 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나쁜 건 내놓고 좋은 건 들여놓듯이, 지금 인간 혹성 자체가 그렇게 살듯 지구도 그러하다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네들 마음 자체의 보이지 않는 입자, 즉 말하자면 화신들이, 내 몸뚱이도 보호하려니까 그렇게 3단계로 나누어서, 아니 인간에겐 5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다섯 단계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걸어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끌어잡아 당기는 것과 끌려들어 가는 것의 양면을 다 책정을 잘하는 작업이 하나 있습니다. 세균성이 들어와도 우리가 들여놓을 건 들이고 내놓을 건 내놔야만 하는 작업도 있죠. 이 허공에도 지금 세균성이 그냥 욱시글득시글하니까요, 안에서도 그렇지만. 또 유전성으로 온다든가 영계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인연에 따라서 들입다 침입을 하게 방치가 된다면 우리가 도저히 살 수가 없죠. 임신을 했어도 임신한 그 자체에 자꾸 집어넣기 때문에 그 애가 이 세상에서 대통령감인데도 소통령도 못 하게 만들어 놓을 수도 있는 거죠,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미래세계 정신세계의 노예로서 산다 이겁니다. 우린 맘대로 살 수가 없어. 내일 어떻게 될는지 모레 어떻게 될는지도 몰라. 그래서 부처님께선 “안으로도 노예가 되지 말고 바깥으로도 노예가 되지 말라. 네 정신 네가 가지고 있고, 네 주인공 네가 가지고 있으니….” 그 소린 뭐냐 하면, 네 주장자가 있다면 이렇게 끌리고 저렇게 끌리고 그러진 않을 거다 이거야. 네 집이 비지 않았다면 이것도 들어오고 저것도 들어오고 들락날락하지 않을 거다 이거야. 네 집이 비었기 때문에 수없는 게 들락거리면서 네 집을 망가뜨리느니라, 이랬거든.

그러니 네 기둥이 없는데 내 기둥을, 네 기둥이 없는데 내 주장자를 줄 수가 있느냐 이거야, 네 집이 비었는데. 네 집이 비지 않고 주인이 있다면 내 주인을 너를 줄 것이로되, 줘서 한마음이 돼서 하나가 돼 가지고 일을 크게 할 텐데, 네가 집이 비어 가지고 네 마음에 주장자가 없는데 내 주장자를 어떻게 너에게 한데 합쳐 줄 수 있느냐 이거죠, 쉽게 말해서. 그러니 네 주장자가 없다면 빈집이 돼서 털구멍을 통하고 눈구멍을 통하고 콧구멍을 통해서 들락거리면서 그저 깡패니 뭐니, 예를 들어서 얘기예요. 보이지 않는 데서 전부 그냥 드나들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만 드나드는 게 아니라 짐승들의 그 의식도 드나들기 때문에 집이 망가져서 나중에는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공부를 못 할 거며, 또 집이 먼저 망가지면 내가 나를 찾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라 이겁니다.

그래서 집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몸으로 고행을 하지 말고 정신 수행을 하라 하신 거죠. ‘정신 수행으로서 진짜로 들고 나는 데에 누가 하는가. 네가 하는 것을 알라. 몸은 사대가 돼서 흩어지고 말지만 이 정신, 너의 진짜 참마음은 끝 간 데 없이 바로 너를 살리고 너의 중생을 살리고 수많은 외부의 중생들을 다 건질 수 있다는 걸 알라.’ 하셨죠. 그 말은 ‘위로는 억만 분이 깨달으셨다 하더라도 한 도량의 한 부처이니라. 그러니 평발 한발로 디뎠느니라.’ 이거야. 그러니 얼마나 거룩한 말씀이냐는 거죠. 그 말을 고렇게까지는 안 하셨어도 『금강경』이나 『화엄경』이나 『반야심경』을 본다면 거기에 그냥 탁탁 들어가 박혀 있어, 아주. 글자 아닌 글자를 아주 거기에다 똑똑 박아 넣었다고.

엊그저께 어느 스님이 “왜 『반야심경』을 그렇게 풀이해서 미국에 가서까지 하느냐?” 그러더라고요. 그거를 영어로다가 써서 우리 발음대로 그냥 하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도. 조곤조곤 차근차근 그걸 읽어 내려가는데, “참 잘 읽는다.” 내가 그랬다고요. 그걸 어떻게 따집니까? 그러니까 우리말 영어죠. 하하하. 그랬는데 아, 그것도 흉인 거예요, 글쎄.

그래서 그 스님더러 그랬어요. “부처님이 좋은 말씀을 하셨다고 경전을 보고 지금 그대로 해야 한다면…. 그때 시절에 트럭이 있었겠느냐, 짐차가 있었겠느냐. 짐차라는 이름이 있었겠느냐.”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서 얘긴데, 그때 만약에 지게꾼이 있었다면 “지게꾼!” 하고 불러야 그땐 대답을 했는데 지금은 짐차 트럭을 불러야 됩니다. 그것도 전화로 해도 됩니다. 그러면 짐차를 불러야 하는 지금 시절과 지게꾼 부르던 그 시절이 다른데 지금도 그럼 “지게꾼! 지게꾼!” 하고 불러야만 하느냐? 그럼 트럭 운전수는 대답도 안 합니다, 지게꾼을 부르니까. 자기 이름이 아니거든. “그런데 지금 ‘지게꾼! 지게꾼’하고 부르란 말입니까?” 그랬어요. 그랬더니 싱긋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스님 말씀이 옳소. 참, 우리가 못하는 걸 당신이 해 줘서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데….” 그러고는 그만두더군요, 허허허….

오늘은 이렇게 설법하는 날이 아닌데 하다 보니까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마는, 내가 그렇게 잘하니까 나를 믿고 따르라 이런 게 아니고, 본래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이 진리가, 뜻이, 법이, 중용이 바로 그러하다 이런 겁니다. 오늘은 우리가 서로 토론을 하는 날인데 나 혼자만 지껄여서, 지껄인다고 그래야 돼요. 하하하…. 안됐지만 어떡합니까? 그러니 질문들을, 청년회도 그렇고 모두 질문들 하십시오.

 

질문자1(여) 저도 사실 마음 밝히는 공부를 참 하고 싶은데 스님처럼 꼭 출가수행을 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걸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음, 그거는 대답하기가 곤란하잖아, 그건 자유로 하는 건데. 하하하…. 내가 느낀 거 두 가지를 얘기하겠는데 머리 깎고 입산을 한다면 모르는 사람들이 “저이는 스님이야. 그러니까 스님한테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 이러지만, 출가하지 않고 공부하는 이는 그냥 스님하고 똑같이 다 실천할 수 있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넓게 할 수가 없으니까 머리를 깎는 거지.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말이야. 안 보이는 데서는 다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건 자유야. 스님이 되고 안 되는 건 자유고, 공부하는 거는 스님이 됐든 안 됐든 똑같아. 이거는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야, 그냥. 아니, 그 도리도 모르고 스님이 된다면 스님은 돼서 뭘 해? 껍데기 스님이 돼야 소용없어, 아무리 천만 명이 된대도. 그러니까 결심하고 스님이 되는 거, 이거 보통사람들 아니야. 허허허…. 보통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스님 안 돼. 스님 되는 것도 보통이 아니야. 부모 형제 다 버리고 모든 것을 다 속단해 버리고 이 무명초, 천차만별로 어지러운 모든 걸 깎아 버리고, ‘나는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도리를 알겠다.’고 다짐하고 들어오는 거, 이거 보통 아니야.

그런데 공부를 한다니까 말인데, 어떤 분야든지, 만약에 의학을 해서 아픈 사람을 건진다 하더라도 이 도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야. 물질 또는 학술로 배워도 마음으로 50%의 보이지 않는 데서 나오는 걸 체험해서 터득하지 못한다면 자기가 그걸 커버하고 나갈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의당히 이거는 배우고 나가야 된다는 거야,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질문자1(여) 더 솔직하게 스님한테 말씀드리면, 세상에서 말하는 재산이라든지 명예라든지 그런 것은 하나도 뭐, 욕심이 있다거나 그런 생각이 없는데 단 하나 제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제가 시집을 안 가고 그냥 스님이 되어서 살 수 있을까, 그것만은 끝까지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생각해 보는 중이거든요, 스님.

큰스님 그렇게 생각을 해 보고 있는 중이라면 진짜 생각을 해서 단호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이 들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런데 나는 시간 뭐,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아. 우리가 시집을 간다 장가를 든다고 하는데, 그런 일에 정신을 빼앗기는 사람이라면 공부도 못 할 거 괜히 스님이 돼서 뭘 하느냐. 가정이라도 잘 지켜야지. 이 공부는 모든 사람을 건질 수 있는 그런 것이고, 앉아서도 이 세상을 다 주름잡을 수 있는 거야. 승려가 안 돼도 말이지.

그러나 이 스님네들은 여기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마음이 돼 줘. 한마음이 돼 준단 말이야. 단호히 결정을 내렸을 때는 우리의 마음이 두 마음이 아니라 전체를 그냥 다 끌어들여서 한마음이 돼. 한 기둥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스님이 되려면 스님이 돼서 이 세계를 누비면서 이 마음법을 전파해도 좋지. 우리 생명의 근본과, 말하고 체험하고 이러는 게 불교니까. 그러니까 풀 한 포기라도 제도하려면 스님이 되고. 그런데 살림하는 사람들은 풀 한 포기까진 생각을 안 해. 또 죽은 사람들까지도 생각을 안 하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아, 살기 바쁘니까.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것뿐이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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