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어리그 형제의 ‘타임 패러독스’

심리적 시간 직선적 아닌 순환적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시간여행

의상대사 ‘일즉다 다즉일’ 떠올려

 

▲ 스피어리그 형제의 ‘타임 패러독스’ 는 어긋난 인연의 고리를 풀기 위해 시간을 역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스피어리그 형제가 감독한 ‘타임 패러독스(원제 Predestination)’를 보고나면 기시감이 든다. 이는 아마도 어느 지점에서 ‘마이너리 리포트(Minority Report)’와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와 유사하기 때문인 듯싶다.

이 영화는 일어난 범죄를 막기 위해 과거 범죄가 일어난 시점으로 돌아간다는 발상은 ‘마이너리 리포트’에 빚지고 있고, 주인공이 어긋난 인연의 고리를 풀기 위해 시간을 역행한다는 발상은 ‘나비효과’에 빚지고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시간의 속성은 불가역적이다.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시간이고, 인생도 그러한 시간의 불가역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시간여행을 꿈꿔왔다. 이번에 소개하는 ‘타임 패러독스’도 타임머신 여행을 제재로 다룬 작품 중 하나이다. 줄거리의 골자는 아래와 같다.

뉴옥을 초토화시키는 ‘피즐’이라는 폭파범을 잡기 위해 범죄예방본부는 ‘템포럴’이라는 요원을 시간여행 현장에 투입시킨다. 템포럴 요원은 피즐 폭파범을 막으려다가 얼굴에 화상을 입는다. 템포럴 요원은 미래로 돌아가 얼굴 이식수술을 한다. 이식수술을 마친 템포럴 요원(에단 호크)은 마지막 임무를 위해 1970년으로 간다. 뉴욕의 한 바에 템포럴 요원은 미혼모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컬럼리스트 ‘존’(사라 스누크)을 만난다. 존은 템포럴 요원에게 자신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고아원 출신인 ‘제인’은 고독한 삶을 살다가 클리블렌드 대학에서 한 남자를 만난 뒤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 남자는 하룻밤의 사랑을 끝으로 사라진다.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을 낳고서 제인은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기관을 모두 갖고 있었으나 제왕절개 시 과다출혈과 자궁을 드러내서 남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딸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템포럴 요원은 존에게 묻는다.

“당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그 사내를, 어떤 법적 책임을 물을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하겠는가?”

존은 템포럴 요원의 제의를 수락하고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제인이 만난 운명적인 사랑의 남자는 다름 아닌 존 자신이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영화의 주인공은 문제를 풀기 위해서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제인이 낳은 아이가 시간여행을 통해 고아원에 버려져 성장한 뒤 제인이 된다는 사실과 존에게 화상을 입힌 이가 템포럴 요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니까, 제인과 존과 템포럴 요원과 피즐은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시간여행 때문에 그 한 사람의 삶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켰던 것이다. 이는 의상대사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가 불교적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이유는 제인과 존과 템포럴 요원과 피즐이라는 순차적이면서 동시에 순환적이고, 한 사람의 삶이면서 동시에 네 사람의 삶인 이야기가 대단히 연기적(혹은 인과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초전법륜 당시 연기법을 설하면서 ‘갈대다발의 비유’를 들었다. 갈대다발의 갈대들은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외따로 서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설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제인과 존과 템포럴 요원과 피즐이라는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주인공들의 관계도 갈대다발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이 과거 혹은 미래의 자신을 만났을 때 그를 죽여야 하는 당위적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애 때문에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식 30송>에 따르면, 사람이 번뇌를 일으키는 이유는 아만(我慢), 아취(我取), 아견(我見), 아애(我愛) 때문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 번뇌는 과도한 자기애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많은 사람이 과도한 자기애 때문에 일을 그르치곤 한다. 기실, 불법(佛法)에 의거해 보면, 이 세상에는 자기랄 것도, 자기의 소유랄 것도 없다.

그런 까닭에 ‘타임 패러독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심리적인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고 순환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애를 버릴 때 비로소 참 자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타임 패러독스’라는 한국 제목도 제법 잘 지은 제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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