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끌고 다니는 당신 주인에게

모든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으면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그저 가난하면은 열심히 지극하게 벌이하시면서 말입니다.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6(남) 저는 식구의 권유로 작년부터 오늘까지 무조건 계속 선원에 나오고 있습니다. 나오기 전까지는 제가 술도 좀 하고 여러 가지 힘든 일도 좀 하고 있었지만 나오게 되면서 그런 것이 일체 끊어지고 ‘무조건 선원에 올라가야 되겠다.’ 이런 마음으로 오게 되는데, 선원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상당히 고요해져서 우선 눈물부터 나오게 됩니다. 또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듣다 보니 제 자신이 현재 가고 있는 마음이 어떤지 점검하고 싶어서 이렇게 무작정 나왔습니다.

큰스님 하하하. 뭘로 점검을 할까요? 고요한 마음이니깐 된다? 안팎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 되셔야 되겠죠? 집에 있으나 변소엘 가나 여기 절에를 오나, 하여튼 당신이 있는 곳곳마다 부처는 계시니까요. 당신이 있기 때문에 부처는 있는 겁니다. 당신이 없다면 모두가 무효죠. 그러니까 당신을 끌고 다니는 당신 주인에게 모든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으면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그저 가난하면은 열심히 지극하게 벌이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악한 거든지 선한 거든지 모두 감사하게 생각하고 내 탓으로 돌리면서 남을 원망하지 말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이 공부하는 데는 적격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내 탓이지 내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뭐가 탓이 될 게 있습니까? 부닥침이 뭐가 있고? 그러니까 잘했든 못했든 내 탓이죠. 그거를 네가 잘못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하고 따지게 된다면 이 선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몸뚱이가 떨어지기 전에 모든 도리를 알아서 증득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론으로만 알고 말로만 알고, 그저 설법을 강백으로서 여여하게 한다 하더라도 그건 아닙니다. 내 몸 떨어지기 전에 열심히 하십시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은 몸 떨어지고 입 떨어지고 말 떨어지면 뭐 남는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열심히들 하십시오.

이 공부는 가난하다고 해서 못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못나서 못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모두가 육신 장애자보다도 정신 장애자가 많으니까, 그 정신 장애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게 살자는 뜻입니다. 부처님도 내내 지금까지 그렇게 설하고 계시고요. 한 말도 한 예가 없고 한 생각도 한 적이 없고 또는 한 가지도 자기가 한 예가 없기 때문에 이날까지 하시는 겁니다. 끝간 데 없이 말입니다. 어저께 오늘 내일이 없이, 중간도 없이, 열심히 하세요.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서 잘해 나가신다니 감사합니다.

질문자6(남)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질문자7(남) 제 내자가 본원(本院)과 대구지원에 한 3년 살다가 지금 그만 납골당에 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저승에 가서라도 산 세상과 같이, 대구·부산·서울 이런 데 모양으로 꼭 만날 수가 있을는지, 말 한마디도 없이 갔기 때문에 대행 스님께 한 말씀 여쭤 보려고 여기 올라왔습니다.

큰스님 인생은 모두가 만났으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한 사람을 만났으면 고정되게 그냥 똑같이 또 살고 영원히 그렇게 사는 게 아니고요, 영원한 만남이 아닙니다. 우리는 캠핑 나왔다가 한 철 나는 겁니다. 그렇듯이 구름이 한데 합쳐졌다가 또 그 구름이 증발돼서 비로 내리고, 화(化)해서 비로 내렸다가 또 증발돼서 구름이 되고, 또 비로 내리고 모든 일체 만 중생들이 다 너 나 할 것 없이 용도에 따라서 다 먹어서 부분이 되고 합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구름이 한데 모였다 흩어지면 또 딴 구름하고 또 모입니다. 딴 구름하고 모이니까 착을 두지 마십시오. 한 철 같이 친구로서 이렇게 지냈을 뿐이지 거기다가 착을 두진 마십시오. 몸이 죽었다 하더라도 거사님의 마음속에, 한마음 속에 다 있는 거고 일체제불의 마음도, 일체 조상의 마음도, 일체 중생의 마음도 모두 내 한마음에 있다 생각하면 가깝게, 항시 끝간 데 없이 가깝게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착을 두고 멀리 둘로 보지 마십시오.

질문자7(남) 대단히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질문자8(여) 큰스님, 저는 요즈음 너무 행복합니다. 제가 공부하는 과정이 잘돼 가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스님께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주인공을 확신을 하거든요. 확신을 하는데 지금 주인공을 저와 같다고는 생각하지마는 이상하게 안 나타나고 발현이 안되는데, 그 주인공을 발현하는 과정에서 모든 분별심이라든지 아상이라든지, 모든 게 다 없어지면은 저절로 주인공이 발현이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분별심이 저의 전생의 습에 의해서 생기는 것 같아서 그 분별심마저 주인공에 그냥 놓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고 그냥 아무런 의심도 안 나고 그냥 마냥 행복하거든요.

큰스님 행복한 것도 거기 놔요.

질문자8(여) 그래 가지고 며칠 전에 친구하고 부산 용두산 공원에 놀러 갔는데, 제가 거기서 느끼는 게 완전히 극락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하나의 허공에서 인연들끼리 만나 가지고 비둘기도 날고 친구하고 이야기도 하고 삼삼오오 이렇게 다른 사람들도 즐겁게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너무너무, 하여튼 좋았어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큰스님 좋으면 됐어요. 사계절 없는 봄날을 만난 듯이 항상 다가오는 것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것 잡지 마세요. 그리고 편안하다 즐겁다, 이런 것까지도 감사하게 거기 놓고 돌아가세요.

질문자8(여) 예. 고맙습니다.

큰스님 질문 좀 하시라 그랬더니 뭐, 작으나 크나 질문은 질문입니다만, 저 보살님이 나와서 하신 말도 모든 게 근중한 겁니다. 다 버릴 게 없죠. ‘저렇게 되지도 않는 질문을 하는구나.’ 이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되지도 않는 데서 되는 게 있거든요. 하하하. 모두 되지도 않는 데서 되는 것을 알게 되고, 되는 데서 안되는 거를 또 알게 되고, 반복해서 돌아가다 보면은 ‘야, 안되고 되는 게 없구나!’ 이런 걸 또 알게 되죠.

그러니까 일체 만물만생 돌아가는 걸 잘 보세요. 따져 본다면 한 가정뿐이 아니라 한 몸에서도, 지금 수십억의 중생들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다스리는 내 마음이 이 모든 것을 둘로 보지 말고 다 다스려야 이게 화(化)해서 나투면서,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모든 안팎의 살림살이를 잘하고 갈 텐데, 내 속에 든 악업 선업의 그 업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니까, 그냥 털구멍을 통하고 눈구멍을 통하고 귓구멍을 통해서 온갖 악한 거는 다 몰아오고, 액운은 다 몰아오고, 좋은 거는 적고, 이렇게 해 나갑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스리는 마음에 바로 이 수십억의 의식들이 다 따라 줍니다. 다스리는 그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에 기준을 둬서 다 따라 줍니다.

이거 거짓말로 알지 마세요. 그래서 내가 항상 이렇게 말하죠. ‘숙명통(宿命通)’ 하면은 컴퓨터와 같다고. 과거에 모든 업을 지은 것이 바로 현실에, 인연에 따라서 모두 내 몸속에 거듭거듭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나온다고요. 그러면 그것이 발로가 돼서 그냥 나오는데,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되맡겨 놓으면, 그 숙명통 컴퓨터에 앞서 입력이 돼서 자동적으로 나오던 게 그냥 다시 입력을 하니까 그게 그냥 없어져 버리고 말거든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불바퀴에 닿기만 하면 다 타 버린다고 하면 모두 모르기 때문에, 과거에 입력됐던 그 자체가 바로 내 몸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스님이 동짓날 팥죽을 쑤다가 팥죽 끓는 것을 보고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했더랍니다. 그와 같이 내 몸뚱이 이 속이 팥죽 솥이라면 그 팥죽 솥에서 팥죽이 끓지 딴 데서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깐 팥죽 방울이 자꾸 움죽거리니까 바로 법신(法身)이거든요. 요것도 법신! 요것도 법신! 하는 겁니다. 네? 그러니까 내 몸속에 있는 그 수십억의 의식들을 다 한마음으로 뭉쳐서 모든 걸 다스려서 거기다 놓고 돌아가신다면, 살림을 하신다면 모든 입력이 됐던 게 다 무너지면서, 오간지옥도 무너지면서, 그 악업·선업 업식이 다 무너지면서 이게 놓는 대로 없어집니다. 그리고 입력이 된 대로 또 나옵니다. 그럼 또 되놓고 되놓고, 이렇게 나오는 자리에다 되놓으십시오. 길을 가다가 엎드러지면 그 길을 딛고 일어나듯이. 이열치열이라는 속담의 말도 있듯이.

또 내가 항상 얘기하죠. 천이통(天耳通)하면은요, 무전통신기를 말합니다. 이게 ‘불교’ 하는 것도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佛)이라면, 바로 교(敎)는 그렇게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라고 한 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통하는 거나, 보이는 데서 통하는 거나, 날아다니는 새들이 통하는 거나…. 모두 우리네가 잘못 생각을 해서 ‘아이고, 저거는 말도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게 저래.’ 이러고 남을 원망한다고요. 여러분이 미국에 가면 미국 말을 못해서, 내가 못해서 통하지 못하는 거지 그 사람네들이 못해서 통하지 않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깐 꽃이라든가 풀이라든가, 내가 못 듣는 생각은 안 하고, 그쪽에서 말을 못하는 걸로 알고 있단 말입니다. 왜 그쪽이 못합니까? 모두 통하고 사는데. 그러니까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못하고 한국의 뜻을 모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한국’ 이 국토가 한 국토지 두 국토가 아닙니다.

그러니 천이통 해서 이게 통하는 거를 말하자면, 수없이 무전통신기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표현을 한다면. 지금 너무도 잘 아시죠? 천이통을 무전통신기로 표현해도 된다, 타심통(他心通)을 탐지기로 표현해도 된다, 또는 천안통(天眼通)을 천체망원경으로 표현해도 된다, 신족통(神足通)을 팩시밀리로 표현해도 된다. 우리네 이 살림살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모두가 지금이나 그때나 세상이 바뀌어지고 변하고 부서지고 이렇게 하니까 이름이 다를 뿐이지 그 뜻은 항시 똑같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모든 것을 놓고 돌아간다면, 그렇게 그 입력됐던 데서 나오는 거를 다시 입력을 하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동시에 그렇게 돌아가게 된다 이겁니다. 얼굴에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귀가 있고, 몸이 있고 뜻이 있고 이렇듯이, 모든 게 그렇게 부딪치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한 몸에서 그렇게 돌아가는 거죠. 소리가 저 바깥에서 나면은, 싸움을 하거나 이런다면은 눈으로 보는 동시에 듣기도 합니다. 그리고 판단도 내립니다. 그러니 동시지 어디 따로따로 있습니까? 이름은 따로따로 있다 할지라도. 그러니 모두가, 일체가 다 같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오온(五蘊)의 오신통(五神通)이 그저 자꾸 같이 동시에 돌아가니까, 이 마음 한군데다 모든 것을 한데 뭉쳐 놓으면 놓는 대로 통신이 되고, 놓는 대로 작용이 되고, 놓는 대로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그놈이 있으면 할 것이고 그놈이 없으면 못할 거고 그놈이, 모든 거는 영원한 친구 그놈이….’ 그러기도 하고,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본래자성불(本來自性佛)이라고도 하고,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고 뭐, 별 이름이 다 있죠.

여러분도 집에서 별 이름 다 가지고 있죠? 아버지라는 이름, 형님이라는 이름, 아들이라는 이름, 남편이라는 이름, 여러 가지 다 가지고 있죠? 어머니, 할머니 뭐 할 거 없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거 할 때, 할머니 노릇 할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딸 노릇 할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아들 노릇 할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남편 노릇 할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이거는 자동적으로 아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얘,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아들 노릇 하고, “여보!” 그러면 “응, 왜 그래?” 그러고 남편 노릇 하고, “아버지!” 그러면 “얘, 언제 들어왔니?” 하면서 아버지 노릇도 잘하거든요. 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멋진, 자성(自性)의 이 멋진 묘법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든 것을 맡겨 놓을 수 있다면 모든 게 거기에서부터 두뇌로 통신이 돼서 사대(四大)로 통신이 된단 말입니다. 사대로 통신이 되면 온통 들고 나면서, 하나의 생각이 수십만 개로다가 입자가 돼서 들고 나면서 일들을 하거든요. 작용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심(無心)과 유심(有心)이 다 같이 작용을 해야만이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게 작용을 그대로 지금 하고 있죠.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가 쌍방이 같이 작용을 해야만이 100% 불이 들어오게 되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전력은 하나지마는 갖다가 잇는 데는 줄과 줄을 한데 이어야 불이 들어오죠? 그래서 인연의 법칙에 의해서 발전이 되고 또 창조력을 기르는 것이죠. 우리가 다 같이 작용하는 도리를 하나로 말하지만 그 하나도 작용하는 게 없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 많이 찰나찰나 화(化)해서 돌아가니까 없다고 한 것입니다. 평등공법(平等空法)을 말하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몸뚱이가 있을 때 이 공부를 모두 열심히 하셔야 될 겁니다. 스님네들만 공부하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공부하는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마음은 다 마찬가지죠. 절에 입산을 해서 있다 할지라도 속가에서 살림하는 거보다 더 낫지 못하면은 마찬가지죠. 입산을 해 가지고도, 살림을 하는데 요거는 요렇게 해서 ‘내 살림, 내 거’ 이렇게 한다면 모든 게 이 부처님 법에 그르치는 거죠. 그래서 그저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같이 나누어 먹고, 들어오는 대로 나누어 입고, 서로서로 남의 원망을 하지 않고,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말 한마디라도 부드럽게 해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 때문에 계율도 지킬 수 있고 질서도 지킬 수 있고, 무조건 사랑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살면서, 또는 입산을 해서 어느 도량에서 산다 하더라도, 형제들이나 한 가족을 차이를 두고 항상 ‘내가 이만큼 하니까, 너는 내 아래야.’ 하고서 이렇게 할 게 아니라 내 아래가 바로 내 스승이란 걸 아셔야 합니다. 풀 한 포기도 내 스승이요, 내 아랫사람도 내 스승이요, 잘못하는 걸 봤을 때 그 잘못하는 걸 보고도 스스로 느끼는 바가 있고, 잘하는 걸 보고도 느끼는 바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 아님이 하나도 없고요.

그래서 말을 하자면 일체 만생, 만 중생이라고 해도 되지마는 만물만생에 들고 나면서…, ‘들고 나며’ 하는 것은 이게 보통 얘기가 아닙니다. 들고 나면서 찰나찰나 화(化)하면서 나투는 부처님의 뜻은 불바퀴가 돌아가는 사이 없이 돌아가면서 나투는, 화해서 나투는 그것뿐입니다. 우리가 이러니저러니, 이게 잘하느니 저게 잘하느니 하고 이렇게 논의를 한다면 부처님의 발 꼬리도 못 쫓아갑니다. 부처님의 모습은 없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모습이 있는 한 부처님의 모습도 계신 겁니다. 풀 한 포기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계신 거고, 지수화풍이 있는 것도 부처님이 계신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돌아가셔서 이제는 말세가 됐다 이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여러분의 행동이 부처님의 법이요, 여러분의 그 모든 움죽거리는 그것이, 바로 화해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보현신입니다. 화신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또다시 요다음에 만나면은 질문을 그런 걸로다가 버리지 마시고, 우리가 말로 그냥 떨어뜨린다면 모르겠습니다마는 말로 떨어뜨리는 게 아닙니다. 컴퓨터를 제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사람이 움죽거려야 컴퓨터도 움죽거리는 반면에 컴퓨터는 사람의 마음을 다 집어먹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능가할 수도 있죠.

그 마음의 뜻을, 부처님께서는 삼천 년 전부터 ‘마음 떠나서는 일체 만법을 행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설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법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자비라는 것은, 가정에서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무조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 그게 바로 자비입니다. 무조건 그렇게 자비를 베풀어야 마음과 마음이 서로 불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내 아들이 잘못되지 않고 잘 나갈 수 있고, 내가 술 먹지 않고 또는 화투 치지 않고, 하하하…, 또 나가서 잘못되지 않고, 가다가도 그냥 차에 잘못되거나 하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는, 뭐든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거지 누가 갖다 주고 뺏어 가는 게 아닙니다.

하여튼 여러분, 한군데다가 뭉쳐서 놓는 작업을 열심히 하십시오. 일체 만법을 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모든 걸 닥치는 대로 거기 맡겨 놓는 것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거기서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용광로에다가 전부 넣으면, 그냥 넣기만 하는 작업을 하면은 생산이 되는 건 저절로 생산이 돼서 다시 나오죠? 연탄도 그냥 가루로다가 다 몰아서 넣으니까 연탄이 되어서 나오고, 연탄이 되어서도 차곡차곡 나가는데, 연탄을 만드는 데서는 다 같이 만들지만, 집집마다 나누어 가는 데는 다 각자 집으로 갑니다. 모습은 다르고 모양은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모두 다르지만 말입니다.

비가 내리면은 일체 만 중생들이 다 그 물을 먹고 살죠. 그러면서도 물을 감사하게 생각도 안 합니다. 모두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 그 빗물을 아니 먹는 게 없는데도 그러니 그렇게 양식을 내려주는 것도 감사하다고 생각 한 번도 해 본 예가 없고, 또 온기가 항상 꺼지지 않게 여러분 앞에 있는데도 감사한 줄 모르고, 불도 감사하게 쓸 줄 모르고, 바람 공기도 감사하게 생각지 못하고, 딛고 다니는 자기 흙도 감사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실정이라고 봅니다. 모든 게 나 아님이 없습니다. 인연에 따라서 전부 나 아님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독불장군처럼 나 혼자 내가 잘나서 산다고 한다면 먹지도 말고 입지도 말고 뭐, 땅을 딛고 다니지도 말고 물도 먹지 말아야 하고 아예 그냥, 그렇게 해야죠, 뭐.

그러니까 그 뜻을 잘 아셔서, 먼저 작업할 게 바로 그거라는 말입니다. 과거 씨는 현실의 싹이 돼서 그 싹에 열매가 열려서 그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는 줄 모르고 과거로, 바로 내가 나기 이전, 그 과거로 돌아가서 찾으려고 한다면 절대로 그건 오산입니다. 그리고 나를 끌고 다니는 놈이 그놈이라는 걸 알고 무조건 ‘그놈으로부터 나온 거니까 그놈으로부터 해결해라. 그놈으로부터 나 아닌 내가 있다는 걸 증명을 해 줄 수 있다.’ 하고 일체 만법을 다 거기다가 놓는 작업으로써 생활해 가기를 바랍니다. 이만 그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92년 4월 19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