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아름다운 사찰③ 경주 기림사

광유성인 창건, 643년 원효대사가 재건
‘오종수’ 유명… 화정수·명안수만 남아
석축아래는 옛 전각, 윗녘에는 새 전각
전통학림운영, 차문화 복원 사업 등 계획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안거를 보내신 기원정사의 숲인 ‘기림’에서 붙여진 경주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기림사.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전각을 하얗게 뒤덮고 있다.
경주 함월산 기슭에 있는 기림사(祇林寺)는 불국사보다 앞서 지어진 가람이다. 한때는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의 대찰이었다. 기림사는 천축국(인도)서 온 광유성인이 창건해 임정사(林井寺)라고 불렀다. 그 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크게 확장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때에 이미 대적광전을 건립해 삼신여래를 봉안했고,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건립했다. 그리고 서쪽에는 석조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을, 동쪽에는 삼층목탑과 정광여래사리각을, 남쪽에는 무량수전과 진남루를 건립했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그 터만 남아있다.

기림사를 품고 있는 함월산은 추령을 사이에 두고, 안개와 구름을 토하고 삼킨다는 토함산과 마주해 솟아있다. 그런데 지명이 주는 산과 사찰의 이름이 흥미롭다. 기림사가 들어 앉은 ‘함월’은 달을 품은 산이라는 의미다. 달을 잘 담을 수 있는 둥글고 넓은 분지 가운데, 용이 날아오르고, 봉황이 춤추며, 신령스런 거북이가 물을 마신다는 영구 음수형의 명당자리란 말이다. ‘기림사’도 좋은 것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머금거나 받아들여서’ 마침내 평안한 경지에 이르기를 기원하는 절집이라는 뜻이다.

기림사 주차장에 차를 대면 약 200m 남짓의 산길이 보인다. 산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나무가 높고 숲이 깊어서 제법 운치가 있다. 산길 옆으로는 투명한 계곡물이 흘러 내리는데, 입 안에 머금어 보고 싶을 정도로 물빛이 청명하다. 기림사의 맑은 물 친견에 대한 시발점이다. 천왕문만 지나면 다양한 종류의 약수를 실컷 들이킬 수 있다.

기림사에는 ‘오종수(五種水)’라는 명물 약수들이 있다. 오탁수(烏啄水)는 물맛이 하도 좋아서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이다. 명안수(明眼水)를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 하고, 화정수(華井水)를 머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 같은 약수도 있으니 그 이름은 감로수(甘露水)다.

마지막으로 장군수(將軍水)가 있는데, 마시면 기개가 높아지고 몸이 웅대해 진다고 한다. 이 다섯 종류의 물로 차를 달여보면 물맛에 따라 차맛이 각각 다르다고 전해진다. 장군수는 대적광전 앞 삼층석탑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탑으로 막혀버려 찾아볼 수가 없다. 장군수의 수난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일화가 전해져 온다. 하나는 장군이 나타날 것을 두려워 한 일제가 덮어버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성종 때 장군수 옆에서 역적모의가 발생하자 나라에서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맞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우물은 화정수와 명안수이다. 특히 화정수는 지금까지 마르지 않고 물이 가득한 우물이었다. 명안수는 자리는 있으나 물은 말랐다고 한다. 부주지 운암 스님은 “물길을 찾아 복원하는 일도 기림사의 중요한 프로젝트이다. 나머지 우물은 문헌에 따라 찾아서 차 문화 유적지로써 그 위상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진왜란때 승병지휘소였던 진남루
천왕문을 지나면 반기는 것은 일자형으로 길게 좌우를 편 진남루다. 임진왜란 때 승병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진남루는 다른 절집의 강당처럼 거대하거나 높지 않다. 진남루 벽면은 외창 역할을 하는 나무문이 정갈한 모습으로 야무지게 닫혀 있다. 장방형 문짝이 빚는 절묘한 조화가 조각보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벽면이다. 진남루는 경남 고성 연화산 옥천사의 자방루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건물인 셈이다.

진남루를 등지고 섰을 때 정면은 대적광전, 왼편은 응진전, 오른편은 약사전이다.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조선 후기 법당으로 보물 제 833호다.

대적광전은 배면 일부만 제외하고는 모두 장방형 막돌 1벌대 쌓기한 기단 위에 자연석을 적당히 방형으로 다듬은 초석과 주좌와 고맥이좌까지 다듬어진 초석들을 혼용해 약한 흘림을 한 원기둥을 세운 다포식 건물이다. 어칸과 협칸의 공간포는 2구(具)씩이고 측칸의 공간포는 l구이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 3출목 내 4출목으로 주두와 소로의 굽면은 사면이고 굽받침은 없다. 정면 각 주간에는 소슬빗살꽃살창을 달았다. 어칸과 협칸은 4짝씩이고 측칸은 3짝씩인데, 어칸과 협칸의 모양은 서로 같지만 이들은 측칸의 모양과는 다르다. 좌우 측면 전면쪽 측칸에는 두짝의 여닫이 꽃살창호를 달았다. 후면의 어칸과 두 측칸에는 두짝 판문을 달았다. 대적광전은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법당 안에는 흙으로 빚은 3m 이상 높이의 커다란 삼존불이 봉안돼 있다. 문득 올려다보면 아득해 지다가 정신이 번쩍 들 법하다. 조선 인조 7년(1629)에 조성된 것들로 보물 제958호다. 한가운데가 지혜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본존불(本尊佛) 비로자나불이다. 왼편은 노사나불, 오른편은 석가모니불이다. 무인처럼 주위를 압도한다.

김시습 선생의 영정을 모신 매월당
흥미로운 것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이다. 수인은 수행자의 다짐을 나타내는 손 모양을 말한다. 예를들면 석굴암 본존불의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우리나라 불상들은 대체로 이 수인을 하고 있다.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얹은 길상좌(吉祥坐:결가부좌의 하나) 상태에서 왼손을 배꼽 앞에 가만히 놓고 오른발을 짚은 오른손의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자세다. 석가모니는 득도하기 전에 마왕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땅의 신을 이용해 마왕을 물리쳤다. 항마촉지인은 ‘땅을 가리켜 마왕을 항복시킨 손 모양’이란 뜻이다.

기림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의 수인은 지권인(智拳印)이다. 지권인은 왼손을 가슴까지 올려서 검지를 편 다음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가만히 감싸쥔(혹은 머금은) 손 모양을 말한다. 비로자나불은 모두 이 수인을 하고 있다. 이때 오른손은 불계(佛界),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뜻한다. 그러니까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은 지금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미혹함과 깨달음도 본래 하나라는 설법을 하고 있는 중이다.
기림사는 2m가 넘는 석축으로 아랫녘과 윗녘이 구분되어 있다. 아랫녘에는 대적광전을 비롯한 옛 전각들이 모여 있고, 윗녘에는 삼천불전을 비롯한 새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진남루와 대적광전 등 무채색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다양한 모양의 담벼락이다. 차곡차곡 머리통 만한 돌로 쌓은 돌담과, 기왓장을 포개 무늬를 넣은 흙담 등이 사찰의 고즈넉한 풍경을 변주한다.

기림사는 보물들이 많은 사찰이다. 사찰 입구의 성보박물관서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기림사 보물의 중심은 박물관 한가운데 모셔져 있는 건칠보살좌상이다. 1501년(연산 7년)에 만들어진, 진흙으로 만든 속에 삼베를 감고 종이를 발라 그 위에 옻칠을 하고 다시 금을 입힌 불상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은 늘씬하게 잘 빠졌다. 옷 주름도 여성의 숄이 흘러 내리듯 뇌쇄적으로 몸을 감싼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꽃미남 같은 불상이다.

박물관에는 삼존불에서 나온 복장유물과 지옥, 염라대왕을 묘사한 탱화 등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옆 산자락에는 김시습의 영정을 모신 사당도 있다. 이 영당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1435~1493)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 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선생의 뜻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은거한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 5년(1868)에 훼철됐다.

고종 15년(1878)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 유림이 경주부윤 민창식에게 청해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으나 그 후 퇴락됐다. 이후 1998년 경주시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했으며,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향사를 봉행한다.
김시습 선생은 신동으로 장래가 촉망됐으나 단종 3년(1455)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했으며, 경주 용장사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했다.

기림사엔 최근 불국사 승가대학장인 덕민 스님이 4월 5일 주지로 부임해 변혁을 꾀하고 있다. 부주지 운암 스님은 “주지 스님이 새로 오셔서 두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첫 번째는 승가대학원 성격의 학림을 운영하는 것이다. 전통 교육방법 그대로 학인을 교육시켜 전통학맥을 다시 부흥시킬 생각”이라며 “또 하나는 기림사가 오래된 차문화유적지임을 다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사찰 뒤편에는 차밭이 1만여평이 있다. 이를 잘 활용해 사찰 전통 차문화를 복원 발전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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