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화담 서경덕의 〈화담집(花潭集)〉

이론을 방편문자로 설한 철학자
달마·혜가·유마 모습 보여
“죽고 사는 이치 아니 편안”

화담 서경덕 영정
화담과 비트겐슈타인

벽에 하도(河圖)를 붙여 놓고 / 壁上糊馬圖
거적 속에서 삼년간 생각에 잠겼네 / 三年下董
태초의 혼돈으로 소급해 보면 / 遡觀混沌始
음양오행은 누가 발휘했을까 / 二五誰發揮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천기(天機)〉란 시다. 하도는 낙서(洛書)와 함께 우주의 생성과 변화의 이치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다. 화담은 이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삼년간 두문불출하며 원리 탐구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사물의 이름을 벽에 걸어 놓고 그 사물의 이치가 궁구될 때까지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였다. 이런 화담의 모습을 그의 제자인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물건의 이치를 궁리할 적에 목록을 나열해 써 놓고 차례로 끝까지 궁리해 나갔는데 바야흐로 한 물건을 생각하다가 끝내지 못하고 변소에 가면 변소에서 오로지 계속 생각하여, 얼마 후에 이해하고 일어났으니 이렇게 힘들여 공부하기를 3년 동안 했다. 낮이면 밥 먹는 것을 잊고 밤이면 잠자는 것을 잊었으며, 혹 며칠 동안 문을 닫고 나무판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아무것도 깔지 않았다. 기혈이 막혀 무슨 소리를 들으면 문득 놀래곤 하였다. 이에 삼남 지방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1년 만에 돌아오니 그 후로는 몸이 충실하고 건강해서 움직이나 쉬나 모두 편안하였다.”

어느 정도로 생각에 몰두해야 기혈이 막히는 지경에 이를까?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1년은 족히 휴양을 해야만 회복될 수 있다면 그 몰입의 강도는 어느 정도일까?

조선에는 천재들이 많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교산(蛟山) 허균(許筠),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등등……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동과 천재들이 태어났다. 이들에 비해 화담은 신동도 아니었고, 천재라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몰입의 정도를 따진다면 아마도 화담을 능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화담의 이런 모습은 B.러셀이 천재의 전형이라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을 연상시킨다. 그 또한 지독한 몰입형 천재여서, 한 가지 문제에 골몰하면 정신과 육체를 극단에까지 몰아넣었다. 그의 〈논리·철학 논고〉는, 러셀에 의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을 정도로 사색을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쉬라는 러셀의 권유를 뿌리치고 노르웨이의 숲에 들어가 사색에 잠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도 그의 사색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철학사에 한 획을 긋는 이 책은 포로수용소에서 완성된다. 훗날 비트겐슈타인은 ‘그때 나의 정신은 불타고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러셀의 말대로 ‘열정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의 모습을 조선의 한가로운 시골에서 발견한다는 게 얼핏 신기하다. 심신의 안정 위에서 물 흐르듯이 순리에 따르는 학자의 모습이 연상되는 동양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화담과 비트겐슈타인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동서고금이라는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두 사람은 만나고 있다.

화담과 비트겐슈타인 모두 특별한 스승이 있었던 게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비록 러셀이나 케인즈 등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많은 지식을 얻었지만, 그의 철학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숙고의 결과이다. 러셀과는 서로 다른 견해로 말미암아 멀어지기까지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두 권의 철학책,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는 전적으로 그의 열정과 사색의 산물이다.

화담은 가난한 하급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어떤 사승관계를 맺을만한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는 전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깨우쳐야만 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담은) 항상 말하기를, ‘나는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에 공력이 이렇게 몹시 들었지만 뒷사람들은 내 말대로 하면 공력을 나같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자득(自得)의 즐거움은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었다.”

율곡의 논평처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이 전적으로 주자학(朱子學)에 의지하고 있었다면, 화담의 학문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룩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들의 철학은 매우 독창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분석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면, 화담은 일명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는 새로운 성리학을 펼친다. 화담은 죽음에 임박하여, ‘성현의 말씀이 이미 경전에 있고, 선유들이 주석하였다. 여기에 내가 번거롭게 덧붙일 필요는 없다. 다만 아직 설파하지 않은 것만 지으려고 한다’라고 하며, 〈원리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을 초한다.

이런 독창성은 조선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더 높이 인정되어, 〈화담집〉은 사고전서(四庫全書)에 한국인의 개인 저서로는 유일하게 등재된다. 화담철학이 북송의 성리학자 장재(張載) 철학을 표절했다는 등의 폄하는 그 독창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단견이다.

화담과 퇴계

“화담의 저서에 병통이 없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러니 그 인간과 학문이 어떤지 알 수 있다.”

퇴계가 화담의 저술을 평가하며 한 말이다. 도대체 화담철학의 어떤 점이 그토록 맘에 안 들기에 고결한 인품을 지녔던 퇴계가 이토록 거친 말을 쏟아내며 비난을 했을까? 어쩌면 퇴계가 병폐로 주목했던 지점이 화담철학의 요체일지도 모르겠다.

태허(太虛)는 맑고 형체가 없는데, 선천(先天)이라고 부른다. 그 크기는 밖이 없고, 그 앞은 시작이 없다. 그 오는 바를 헤아릴 수도 없다. 맑고 고요히 비어 있어 기(氣)의 근원이다. (기가) 밖이 없는 멀리까지 널리 퍼져 있으며 충실하게 꽉 채우고 있어 터럭 한 올이 들어갈 만한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다.

화담에 의한다면 이 우주는 기로 꽉 차 있고, 기가 모이고 흩어지면서[聚散] 만물이 생기고 사라진다. 태허와 취산작용은 불교에서 말하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와도 같다. 바다는 선천(先天)의 체(體)이고 파도는 후천(後天)의 용(用)이다. 우주만물의 생성소멸 작용은 마치 바다에 의지해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선천의 태허에서 기가 모이고 흩어짐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원리가 작동하기에 기가 모이고 흩어질 수 있는가?

‘기(氣)의 밖에는 리(理)가 없다. 리는 기의 주재(主宰)이다. 이른바 주재라 함은 밖으로부터 와서 주재하는 게 아니다. 기가 용사(用事)함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일컫는 말이다.’

파도가 일었다가 사라지고, 꽃이 피었다가 지는 모든 일들이 용사(用事)이다. 용사는 취산작용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용사의 원리, 즉 취산의 원리가 리(理)다. 따라서 리는 우주생성 자연변화의 원리이며 법칙이다. 이런 생성변화를 리가 주재한다고 하면 리는 곧 주재자(主宰者)이며 조물주(造物主)이어야 한다. 그런대 화담이 말하는 주재의 의미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화담철학에서 리의 주재성은 내재적인 이유라는 의미와 다름 아니다. 즉 삼라만상의 생성변화는 만물 자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래 그러하기 때문에 그럴 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갑자기 뛰어 오르고 문득 열린다. 누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리의 때라고 한다.’

꽃이 피는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에 피는 것이며 지는 것도 때가 되었기 때문에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고 싶지 않다고 해서 피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지기 싫다해서 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부득불 어찌할 수 없기에, 부득이한 이유, 그게 리다.

화담집에는 그의 독특한 철학세계가 담겨있다.
이런 철학체계에서는 기독교적인 인격신은 물론, 스토아철학의 신의 섭리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젊은 남녀가 눈이 마주칠 때 가슴이 뛰는 건 누가 시켜서도 아니며, 억지로 못하게 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남녀가 때가 되면 사랑을 나누는 건 자연법칙이고 원리이다. 화담의 리는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부득이한 언어문자, 방편반야(方便般若)에 불과하다.

하지만 퇴계는 이런 점이 견딜 수가 없었다. 리가 다만 문자에 불과하다고? 말도 안 돼! 이게 퇴계의 생각이었다. 퇴계가 볼 때, 기를 그냥 자체의 원리에 맡겨두면 남녀는 아무 때나 짝을 지을 것이고, 질서는 깨질 것이다. 꽃이 때를 맞춰 피는 것은 아무 때나 피지 못하게 하는 강한 통제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게 퇴계의 리다. 퇴계의 리는 기의 주재로써 기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한다. 기가 리의 통제에 순응하여만 우주는 질서와 조화를 지킬 수 있다. 한겨울에 꽃이 제멋대로 피면 얼어 죽는 것처럼, 기가 리의 주재를 벗어나 멋대로 작용하면 질서가 붕괴된다.

퇴계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현실인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퇴계는 생전에 세 번에 걸쳐 사화(士禍)를 목도한다.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부르고 선비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다. 선과 악이 뒤섞이고, 정의와 불의가 뒤엉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을 보며, 퇴계는 선과 악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런 현실인식은 그로 하여금 강렬한 도덕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기를 따르다보면 때론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에는 선악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선한 리의 명령을 따르는 것만이 악에 빠지지 않고 도덕적인 이상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화담은 순수하게 자연법칙에 주목하였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자연법칙을 윤리학적 도덕법칙으로 환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과 가치의 착간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다. 이른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길. 조선선비들에게 지상과제처럼 받들어진 이 도덕적 이상사회의 구현은 한편으론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는 구조로 드러난다. 조선은 개체적 자율성에 방점을 찍는, 예컨대 불교나 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유학인 양명학, 같은 성리학인 화담철학까지도 억압하였던 것이다.

평등한 개체적 자율성

화담철학의 특징은 개체의 자율성이 존중된다는 데에 있다. 조선이라는 매우 차별적인 권력체제에서 무차별의 자율적인 개체성을 드러내었다. 이런 개체의 자율성과 평등성은 그를 불교니 도교니 하며 비난하는 근거가 되었다. 조선처럼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나라에서 그의 사상은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의 지배권력이 퇴계 아니면 율곡의 문하에서 배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당연히 화담철학은 환영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화담 자신은 자유롭게 살았다. 또한 굳이 방외(方外)의 선비가 되지도 않았다. 그는 유학자요, 성리학자로 일생을 마쳤다. 왕에게 예(禮)에 관한 상소문까지 올릴 정도로 방내(方內)의 질서체제에 머물렀지만 체제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고, 자유인이었다. 진리에 몰입했고, 깨달음에 열정을 다하는 모습에는 9년 면벽의 달마(達磨)나 한쪽 팔을 자르는 혜가(慧可)가 보인다. 독단을 거부하고, 존재하는 모든 개체의 내적 자율성을 확립하는 데에서는 대승논사(大乘論師)들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는 지독히도 차별적인 사회에서 차별 없는 평등을 자신의 철학 속에 녹여냈고, 실천하였다. 마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완성하고 설하는 유마거사가 환생한 듯 말이다. 화담은 천한 기생 황진이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했고, 사랑했다. 그는 찾아온 사랑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빠지지도 않았다.

1577년 음력 7월 7일. 화담은 시자에게 부축하게 하고는 연못에 나가 목욕하고 돌아와 임종하였다. 향년 57세. 임종을 앞두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지금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이에 화담이 대답하였다.

“죽고 사는 이치를 안 지 오래되었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그러고 보니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도 오버랩된다. 말기암을 앓던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문병을 오기로 한 친구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멋진 인생을 살았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시오.”

우리는 죽을 때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 편안히 말할 수 있을까? 오늘도 내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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