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최한기의 〈기학(氣學)〉

조선후기 실학자 최한기.
화삼귀일로 유불·과학 접합
우주와 나 하나로 통해
기학의 연구성과는 불교영향

기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기학(氣學)은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 1803~1877)가 정립한 학문을 일컫는 명칭이다. 혜강은 조선조 후기의 기철학자이자 실학자였다. 그는 생전에 모두 1,000권이 넘은 저술을 남긴 우리 역사상 최대의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저술을 통해서 그는 기존의 성리학과 서학, 그리고 불교를 넘어서는 기학이라는 독특하고도 새로운 사유체계를 정립함으로써 당시의 조선조가 처해있던 제반문제를 해결해줄 처방전을 제시하는 한편, 시공을 초월한 보편학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기학은 인문·사회·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통합학문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 가운데서도 그의 기학적 사유체계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일련의 철학저술들인데, 그것은 30대의 〈신기통〉과 〈추측록〉, 그리고 50대의 〈기학〉과 〈인정〉, 그의 철학저술로서는 맨 마지막인 60대 후반에 쓰여진 〈승순사무〉를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기학의 학문적 틀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천도(天道)에 바탕을 둔 인도(人道)의 정립과 시행’이라는 틀이다. 이것을 일컬어 천인상행지의(天人常行之宜)라고 부른다. 나중에 〈기학〉에 가면 이 말은 천인운화(天人運化)로 표현된다. 천인운화란 ‘인간이 천과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천인일치(天人一致)적인 삶’이다. 천인운화는 기학에서 ‘학문의 근본바탕(根基)과 표준’으로 간주되며, 기학을 ‘천인운화의 기학’으로 부를 만큼 중요시된다.

이러한 천인상행지의, 천인운화를 혜강은 유교의 개조(開祖)인 주공(周公)·공자(孔子) 정신의 핵심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그의 기학은 ‘지난 성인(聖人)을 계승하여 앞으로 올 미래의 학자에게 길을 열어주는 계왕성(繼往聖), 개래학(開來學)’을 자임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혜강의 기학적 사유체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사대운화(四大運化)와 사등운화(四等運化)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우선 4대운화란 위의 천인운화를 포함한 방금운화(方今運化), 활동운화(活動運化), 통민운화(統民運化)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4대운화에 의해서 기학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학은 방금운화를 견문추측(見聞推測)하여 인간의 내면에 품부된 활동운화의 본성을 발현시켜서 천인운화에 도달한 뒤 천인운화의 기준을 수립코자 한다. 그리고 이 기준에 의거해 통민운화를 시행함으로써 대동일통(大同一統)의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코자 한다.

이 4대운화에 의해서 기학은 ‘인식과 실현의 구조’로서 파악된다. 방금운화, 활동운화, 천인운화가 인식에 의한 깨달음의 구조라면, 통민운화는 이 깨달음을 정치와 교육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사회적 실현의 구조이다. 이 중 사회적 실현의 구조를 기학은 다시 4등운화로 설명한다.

일신운화(一身運化), 교접운화(交接運化), 통민운화, 대기운화(大氣運化)가 그것이다. 일신운화란 수신의 요체로서, 깨달음으로 얻은 천인운화를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교접운화란 제가의 요체로서, 이 천인운화를 가족에게 적용하여 온 가족이 천인운화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통민운화란 치국의 요체로서, 이 천인운화를 국가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기운화란 평천하의 요체로서, 이 천인운화를 국가의 범위를 넘어 천하에 적용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4등운화를 대표하는 것은 대기운화가 아니라 통민운화이다. 왜 그런가? 기학은 제대로 치국을 이룬 나라가 두루 존재할 때, 대동일통의 평천하가 구체화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가의 범위를 넘어선 대동일통은 그것이 구호화, 추상화 되어서 그냥 공허한 이상(理想)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최한기가 소개한 〈지구의〉
기학이 지닌 불교적인 성격은 무엇인가?

기학이 성립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미친 것이 셋이다. 그것은 유도(儒道)와 서법(西法), 그리고 ‘불교’였다. 기학은 이 셋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취장사단(取長捨短)의 방법에 의해 화삼귀일(和三歸一)시킨 학문으로서, 이때의 일(一)은 곧 기학을 가리킨다. 이에 기학은 일통학문(一統學問)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셋의 장단점을 기학에서는 어떻게 파악하는가?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유도의 장점〉 윤리강령과 인의(仁義)라는 덕목.
〈유도의 단점〉 귀신, 재앙(災殃)과 상서(祥瑞)에 관한 것.
〈서법의 장점〉 천문학[曆]+수학[算]+대기에 대한 학설[氣說]로서의 역산기설(曆算氣說).
〈서법의 단점〉 천주교의 교리 중 괴이하고 허무한 화복설(禍福說).
〈불교의 장점〉 깨달음의 틀, 만법귀일(萬法歸一)의 궁극적인 본체인 일(一)에 대한 관심.
〈불교의 단점〉 실유(實有)를 버리고 허무(虛無)를 취함.

여기서 불교의 단점이란 현상계는 물론이고 궁극적인 본체조차도 실체가 없는 공(空) 내지 허무로 보려고 하는 입장이다. 혜강은 이것을 비판하여 특히 궁극적인 본체인 천(天)은 기불멸론(氣不滅論)의 관점에서 실체가 있다고 봤다. 이때 천은 신(神)·기(氣)·리(理)·형(形)·운화(運化)의 다섯으로 구성된 형이하적인 것으로서 운화지기(運化之氣) 혹은 대기(大氣)로 불리며, 활동운화의 본성을 지니고 만물을 낳아주는 생명체로서 간주된다. 인간이 본받아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의 전범(典範)이 바로 이 천이다.

개인이 천인일치적인 삶인 천인운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품부된 활동운화의 본성을 발현시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깨달음’이라는 계기가 필요하다. 이 깨달음을 기학에서는 뜻밖에도 견성(見性)이라고 명명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견문추측법에 의거하여 방금운화를 꾸준히 탐구하다가 보면 천에 대한 객관적이고 검증가능한 정보가 축적될 것이고, 이러한 축적이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보면 드디어 활동운화 하는 대기의 본성을 체인(體認)하게 된다. 체인은 전체완형(全體完形)의 인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일컬어 〈기학〉에서는 ‘견문추측으로 전체대용에 도달[推達於全體大用]하여 대기활동운화의 본성을 보아 얻음(見得大氣活動運化之性)’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이제 인간의 내면에 품부된 활동운화의 본성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견득활동운화지성(見得活動運化之性)’이라고 한다. 이는 결국 기학적 깨달음인 견성(見性)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천인운화의 본성을 똑똑히 본다(的覩天人運化之性)’는 말과 동의어로서 곧 천인운화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천인운화에 도달하면 ‘천인운화의 기준’에 의거하여 통민운화를 시행함으로써 대동일통의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방금운화란 ‘지금여기에서의 운화’라는 의미로 지금현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물리(物理), 인정(人情), 그리고 운화지기를 가리킨다. 불교 역시 ‘지금여기(now and here)’를 매우 중시한다. 참나(眞我)인 우주와 지금여기는 등가(等價)로 간주된다. 이는 기학도 마찬가지이다.

이외에도 기학에서는 불교용어를 무수히 많이 차용하고 있다. 그 용어들을 분류하면 그것은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불교용어를 변형하여 사용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첫째,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불교용어로는 진면목, 개오(開悟), 돈오, 정각, 전등, 직절법문(直切法門), 중도(中道), 구경법(究竟法), 보각군생(普覺群生)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불교용어는 무상대도(無上大道), 연기(緣起), 산하대지허공(山河大地虛空), 선종창학(禪宗倡學), 성문(聲聞), 공적(空寂) 등이다.

셋째, 불교에서 차용하여 변형시켜서 사용하는 용어는 화삼귀일(和三歸一/會三歸一), 근기(根器/根機), 사재탈락(渣滓脫落/身心脫落), 유아독존(唯我獨存/唯我獨尊), 제피안(?彼岸/度彼岸), 통만귀일(統萬歸一/萬法歸一), 보시(報施/布施), 가국천하타성일체(家國天下打成一體/打成一片) 등이다.

기학과 불교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기학과 불교가 다 같이 보편학으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하고 기학에서는 활동운화지성(活動運化之性)이라고 한다. 이 보편성을 뭐라고 부르건, 이 ‘자리’에 입각하면 인간은 시공을 초월한 우주적 존재가 된다. 이 경지를 주객일체, 만물일체, 만성일체(萬姓一體)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언제나 이 자리에 입각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 보편성을 발현시키는 깨달음이라는 계기가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심과 성이 동일하다고 보는 데서도 기학과 불교는 동일하다.

비록 두 학문이 그 깨달음을 견성이라고 표현할지라도 그 내용은 상이하다. 기학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만으로 궁극적인 경지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불교적 견해를 비판한다. 그리고 성리학의 입장도 비판한다. 성리학에서는 그 본체인 리태극(理太極)이 내면과 외물에 똑같이 품부되어 있다고 보고, 내면에 있는 리태극을 발현시키고자 외물에 나아가 그것을 거경궁리(居敬窮理)함으로써 리일(理一)의 관통성(貫通性)을 체증(體證)하려는 입장을 취한다. 기학이 성리학을 비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리태극은 그 실재성(實在性)이 검증될 수 없는 관념의 소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비록 리태극을 깨달아서 성의-정심을 거쳐서 수기(修己)가 완성된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하였더라도 이 경지는 도덕적인 완전성을 보장할지언정, 그것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삶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기학적 깨달음의 특징이 드러난다. 활동운화의 삶이란 어떤 삶인가? 활동운화란 생명성(活), 운동성(動), 순환성(運), 변화성(化)의 의미를 갖는 용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두운 곳을 밝히고 막힌 곳을 뚫는 매우 역동적이고 신바람 나는 창의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전범인 천을 활동운화적 존재로 보기에 이런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혜강은 서양 천문학을 통해서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이 활동운화를 천의 본성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인간의 도덕적 건전성 못지않게 육체적 안락함, 물질적 풍요로움과 연관된다고 봤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학적 깨달음이 이러한 활동운화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 이유는 기학적 인식의 대상인 방금운화는 ‘같은 것’과 ‘다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자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방금운화의 하나인 물리의 경우, 그것을 ‘개물마다 각각 다르게 품부 받아 지닌 천리’라는 의미의 물물각수지천리(物物各殊之天理)로 이해하며, 따라서 이 물리는 천리의 측면에서 보면 같고 물물각수의 측면에서 보면 다르다는 것이다. 나머지 방금운화인 인정과 운화지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방금운화를 오랫동안 견문추측하면 객관적인 추측의 이치(推測之理)가 내면에 쌓이기 마련인데, 이것을 활용하면 생존과 생활에 필요하고 편리한 각종 도구의 발명과 물질적, 육체적인 조건을 갖출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한편으로 언젠가는 이 추측의 이치 가운데서 대동의 보편자이자 기일(氣一)의 관통성인 활동운화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기학은 불교와 성리학은 물론이고 서학과도 다르다. 불교와 성리학은 대동의 보편자인 같은 것만을 보려고 하였다면, 서양과학으로서의 서학은 다른 것에만 주목하고 같은 것을 도외시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학과 불교의 ‘지금여기’에 대한 견해 차이도 이 지점에서 분명해진다. 둘 다 지금여기란 참나인 우주라는 유기체(有機體)를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우주세포의 하나라고 보며, 나아가 이 우주세포 속에는 우주적인 정보가 온전히, 고스란히 들어있어서 이것을 발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방법은 서로 다르다. 불교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수행법에 의거하여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고자 한다면, 기학은 외부의 방금운화를 견문추측 하여 내면의 ‘지금여기에 항상 이르러 있는 활동운화’를 드러내려고 하며, 그 과정에서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동시에 탐구해 나가게 된다.

이상의 고찰에서 기학이라는 학문체계 정립에 있어서 불교가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손병욱 경상대 교수

 이는 혜강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음을 알려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기학이 지닌 깨달음의 학문으로서의 특징은 불교에서 영향 받은 바가 매우 컸다고 하겠다. 앞으로 기학 연구자들이 지금까지 도외시해 왔던 이런 점들에 주목하면, 현실적 의미가 배가 되는 심도 있는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에 연구자들의 각별한 관심을 촉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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