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정토사 불교대 입학식 법문-지운 스님(동화사 율주)

대승불교의 핵심… 연민의 마음 일깨운다

 연민은 상대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노력

자비손으로 쓰다듬으면 심신의 통증 완화

마음을 자비로 가득 채우면 보리심 증득 

▲ 지운 스님은 … 송광사·동화사 강주, 조계종 행자교육원 교수사, 기본선원 교선사(敎禪師) 등을 역임했다. 조계종 단일계단 위원 및 교수사자비선 명상센터(자비수관, 자비차선, 자비경선) 수행지도 법사, 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 승만경연구회 자문위원, (사)한국차(茶)명상협회 이사장, 팔공총림 동화사 율주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찻잔 속에 달이 뜨네〉 〈차(茶) 수행법〉 〈몸과 마음이 사라져가는 여행〉 〈깨달음으로 가는 길〉 등이 있다.
불교는 사랑을 초월한 자비의 실천을 강조한다. 자비는 연민을 내포한다. 연민은 상대에 대한 소유의 집착을 버리고, 고통을 소멸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이다. 지운 스님은 3월 14일 울산 정토사 법문을 통해 자비심(慈悲心) 함양을 위한 자비수관 수행법에 대해 설했다. 자비수관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손으로 나를 보듬고 자신의 업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법이다. 지운 스님은 이 과정을 통해 삼법인을 체득하고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자비수관의 대상은 사람이다

오늘 주제는 ‘몸과 마음을 깨우는 여행’입니다. 몸과 마음을 깨우는 방법에는 ‘자비수관’(慈悲手觀)이 있습니다. 자비수관은 명상법의 하나로 일전에 제가 <자비수관과 뇌 과학>이라는 책을 쓴 적도 있습니다. 제가 자비수관의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잘 전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체득할 수 있을까하는 고심한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불교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수행을 어렵게 느끼는 분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비수관이라는 것이 네 글자 안에 그 뜻을 모두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일 앞에 자비(慈悲)가 들어갔는데 이것이 재밌습니다. 불교의 수행법에 있어서 간화선의 대상은 화두입니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신수심법이라고 해서 몸·감각·의식·의식현상을 관찰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자비수관은 대상이 사람입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고 자비심을 키우는 거죠. 또 한편으로는 몸을 대상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법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자비’가 왜 필요한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전 세계 어느 종교든 ‘사랑’을 얘기합니다. 인류가 ‘사랑’을 외치고 있는데 그러면 세계 평화가 진작 이뤄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같은 종교끼리도, 심지어 같은 종교 안의 종파끼리도 왜 총을 겨누고 싸울까요? 가만 생각해보면 창조주를 매개로 하는 종교를 보면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피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반대로 불교에서는 왜 그런 일이 없을까요?

불교는 2천 년이 넘는 동안 전쟁을 하거나 사람을 죽인 역사가 없습니다. 그곳에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을 얘기하는 종교는 많아도 연민(憐憫)을 얘기하는 종교는 별로 없습니다. 이게 차이입니다. 자비(慈悲)의 비(悲)가 바로 연민입니다. 사랑과 연민의 차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사랑은 생명을 보호해주는 것, 즉 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민은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누고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도 연민은 책임까지 따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연민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불교뿐입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사랑이 아닌 연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민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싸울 일이 없어지고 지구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연민을 내포한 자비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무한한 자비를 일으켜야 합니다. 이 우주가 꽉 차게 자비를 일으킬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냐는 것에 많은 의문을 품지요.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화가 나면 어떠십니까? 화가 잔뜩 날 때는 내 세상에 온통 화가 가득 차버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자비도 그렇게 꽉 찰 수가 있습니다. 우주를 자비심으로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자비로 자신의 우주를 채웠다면 그 다음 자비를 바탕으로 보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보리심은 일체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 밖으로는 중생을 구제하고 안으로는 지혜를 가지기 위한 것입니다.

자비심이라는 것은 참 무한하고 대단한 것입니다. 사랑은 소유하지 못하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비심은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해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애(愛)를 자(慈)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슬픔 중에서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애(哀, 슬프다)와 비(悲, 슬프다)가 있습니다. 애는 소유할 수 없을 때 오는 슬픔이며, 비는 상대의 고통을 보며 같이 아파하며 느끼는 슬픔입니다. 내가 고통을 치유해줄 능력이 없다면 함께 기도 해주고, 능력이 닿는다면 직접 그 사람을 고통에서 구해내는 것이 연민입니다. 그 마음을 합치면 자비가 됩니다.

 

자비의 손으로 몸과 마음 치유

요즘은 자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자비심을 갖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더러 짜증이 나기도 하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TV라든지 신문이라든지 여러 매체를 통해서 분노 조절을 못해 폐망한 사람들의 소식을 간혹 접할 수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자동차로 사람을 받아버리는 경우도 있고 울산 계모 사건처럼 더 충격적인 사건도 있죠. 뿐만 아니라 요즘 TV를 보니 다중인격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것도 이런 사회상을 반영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비와 관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분노를 다스리고 자비의 마음을 가르치는 방법이 자비수관입니다. 자비수관에서 ‘수(手)’는 손이라는 뜻입니다. 자비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상상의 손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천수천안관자재보살의 손입니다. 그 상상의 손이 내 몸과 감각기관을 일깨웁니다. 상상의 손이 내 몸에 접촉을 하게 되면 마음속에 있던 잠재의식과 업(業)의 종자들이 형상으로 피어납니다.

한 보살님은 자비수관을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수많은 미꾸라지가 빠져나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보살님이 남편에게 추어탕을 해주었다고 해요. 이 경우에는 자신이 지은 행위가 마음에 저장되어 있다가 자비수관을 통해 나타나는 거에요. 간혹 자비수관 중에 자신도 몰랐던 트라우마가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비수관 중에 업(業)이나 트라우마처럼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형상화되어 떠오르면 그것을 환영이라 생각하지 말고 실체가 없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손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뇌 과학에 따르면 인체의 모든 부위에 연결되는 신경세포가 머리에 있는데 그것이 손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은 그만큼 뇌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며 일반적으로 손을 가장 많이 쓰기도 하지요. 병원에서도 뇌를 다친 후 신경세포를 회복시키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훈련이 손 훈련입니다. 물건을 손으로 자꾸 움직이게 하는 등 손 동작을 계속 시켜서 뇌세포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흔히 뇌세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뇌세포는 한 인간이 죽을 때까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뇌 세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자비손(慈悲手)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비수관을 행하는 과정은 생명이 연결되는 신호를 받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쓰다듬으면 안 됩니다. 마음속으로 ‘사랑한다, 고맙다’ 하면서 쓰다듬어야 몸과 마음의 통증이 완화될 수 있습니다. 거짓말처럼 몸이 회복됩니다. 자비손으로 몸을 쓰다듬어 주면 그 순간 몸의 기혈이 열리고 몸 상태가 좋아질 것 입니다. 자비손이라는 것은 하나의 방편입니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그림자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몸에 맺힌 것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비수관입니다.

 명상으로 탐욕 줄이고 무상고무아 통찰

마지막으로 관(觀, 보다)은 객관적으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화가 날 때 본인이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고 있는 사람은 괜찮은데 자신이 화를 내고 있는 줄 모르는 사람은 곁에 두기에 매우 위험합니다. 충동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관(觀)은 거리를 두고 대상을 본다는 것인데, 이를 행하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됩니다. 첫번째는 나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나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현상은 일종의 정신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기분이 좋으면 나도 좋고 상대가 나쁘면 나도 나쁘다는 생각은 매우 안 좋습니다. 대상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좌우되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두번째는 똑같은 생각을 계속 반복하고 머릿속에서 자동화시키는 것 또한 안 좋습니다. 관(觀)의 또 다른 의미에는 ‘발견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진리의 발견, 즉 마음과 몸이 변하는 과정을 발견하는 것을 무상관찰이라 합니다. 이 관(觀)을 하게 되면 모든 대상은 변하며, 소유한 대상이 변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따라서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적 성숙을 이루게 되고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비수관 명상법을 간략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허리를 쭉 펴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몸에 힘을 완전히 빼도록 합니다. 그리고 눈을 감습니다. 가슴에 하얀 연꽃봉오리가 올라오는 상상을 합니다. 이윽고 정수리에서 연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그리고 그 연꽃 속에 흰 옷을 입은 관자재보살이 들어와 앉습니다.

관자재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갖춘 보살인데, 그 보살의 모습이 나의 현재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른 쪽 손에는 감로수를 들고 있습니다. 이제 그 감로수를 머리에 붓습니다. 온 몸이 흠뻑 젖도록 붓습니다. 맑고 투명한 물이 내 온 몸을 타고 내려가며 몸속에 그대로 흡수되고 있다고 상상합니다. 투명하고 맑은 물 색깔이 변하는 과정을 살펴봅니다. 그 물을 받아들이고 있는 내 몸을 봅니다. 물을 부어주며 몸을 내 아이라 생각하고 어머니가 아이를 어르듯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를 속으로 되 내이며 쓰다듬습니다. 마침내 손가락과 발가락 끝으로 물이 쭉 빠져나가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눈을 뜹니다.

물은 정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이 감로수를 붓는 의미는 우리가 쌓아온 업의 장애를 소멸하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죄를 씻어낸다는 의미가 있지요. 이렇게 매일 5분만 수행해도 효과가 나타나며 수행시간을 늘인만큼 병이 있는 사람은 병이 나을 것이며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극복할 것이고, 더 나아가 탐욕과 성냄이 줄어들고 무상·고·무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더러는 상상으로 하는데 뇌 과학적으로 어떻게 효과가 있는지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이라는 것이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얘기입니다. 미국에서 연구학자들이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농구팀을 두 편으로 나누고 일주일동안 한 팀은 열심히 골을 넣는 연습을 시키고, 또 다른 팀은 앉아서 상상으로만 골을 넣는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시합 결과는 상상으로만 골을 넣은 팀이 이겼습니다. 이미지트레이닝이라는 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꿈과 현실은 같다고 말합니다. 대상의 인식과 인식의 결과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상상은 집중명상의 일환이니, 의심의 여지없이 수행에 몰두하면 분명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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