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불교 70년- 고승들

19세기 말 조선에는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물결은 일제 침탈이라는 격랑으로 바뀌었다. 당시 불교도 이런 시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경허 스님은 정혜결사를 주창하며 선풍(禪風)을 진작시켜 일제 시기 불교의 정맥이 굳건히 유지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경허 스님을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꼽는 이유도 여기 있다. 경허 스님의 법은 제자 혜월·수월·월면(만공) 스님에게 이어졌고, 이 같은 명맥은 면면히 현대 한국불교로 계승됐다. 오늘의 한국불교를 만든 것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어가기 위한 스님들이 구도열과 정법 수호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원력과 열정은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사회를 이끌어간 정신적 스승인 고승들로 화현됐다.

이에 본지는 해방 이후 근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입적하신 고승들의 면면을 간략히 정리했다.

선사
일제 강점기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어 갈 수 있도록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은 만공 스님(1871~1946)이다. 경허 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은 만공 스님은 수덕사를 중심으로 40여 년 간 선 수행을 지도하며 수좌들을 이끌었다. 또한 왜색불교로부터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선학원 창립을 주도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구하 스님 (1872~1965)은 질곡의 근현대사에서 변화하는 교단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1911년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이래 통도사가 전통사찰로서의 사격을 갖출수 있도록 건물들을 중창하고 옛 유물들을 수집해 보존하는데 앞장섰다. 

근현대 선지식인 혜봉 스님(1874~ 1956)은 늦은 나이에 출가했지만 제방 선원을 돌아다니면서 수행과 설법에 집중했고 이내 이름을 널리 알렸다. 남장사 조실로 있으면서 최초의 비구니 강원 ‘관음강원’을 열기도 했다.

한암 스님(1879~1951) 역시 경허 스님의 전법 제자로서 만공 스님과 함께 일제 강점기 한국불교를 이끈 선지식이었다. 1941년 불교 총본산으로서의 조계종이 결성되자 초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특히 한암 스님은 6.25 한국전쟁 당시 공비 소탕을 위해 오대산에 불을 놓으려 할 때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로도 유명하다.
혜암 스님(1885~1985)은 100세가 넘도록 묵묵히 참선 정진에 몰두하면서 수행자로서 본모습을 잃지 않은 인물이었고 더욱이 덕숭총림의 초대 방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납자들을 제접하며 한국 선종의 법맥을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한 선지식이었다.

효봉 스님(1888~1966)은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판사를 지내던 중 독립운동가들에게 중벌을 내리는 데 회의를 느껴 출가했다. 1954년 정화운동의 주역으로 불교 정화를 이끌었고, 1962년 통합종단 초대종정으로 추대됐다.

동산 스님(1890~1965)은 선·율을 겸전한 선지식이다. 용성 스님을 은사를 출가한 스님은 천불선원에서 3년 결사를 마쳤다. 1954년 전국비구승대회에서 효봉·금오·청담 스님과 비구 대표로 이를 이끌었고 종정에도 선출됐다.  

고봉 스님(1890∼1961)은 현대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혜봉 스님과의 만남으로 출가한 스님은 파계사에 이르러 개오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사건’을 일으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1950년 공주 마곡사 은적암, 아산 봉곡사, 대전 복전암, 서울 미타사 조실을 역임했다. 제자로는 한국불교 해외 포교의 선구자 숭산 스님이 있다.

만해 스님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진 춘성 스님(1891∼1977)은 거침없는 언행과 행동,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했던 스님으로 세상에 더 회자됐던 선승이다. 후학들에게 수행자의 본분은 무소유에 있음을 강조했고 스스로 이를 실천하고 살았다.

경봉 스님(1892∼1982)은 1925년부터 30년간 통도사 양로염불만일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53년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조실로 추대됐다. 82세부터 시작한 극락암에서의 정기법회는 90세가 되는 노령에도 시자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법좌에 올랐으며, 매 회마다 1000여 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했다. 한시, 시조, 서예,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다양한 작품을 통해 대중을 교화했다.

금오 스님(1896~1968)은 경허·만공 스님의 법맥을 이어나간 고승이다. 경허의 선풍은 혜월·수월·만공·한암 스님에 의해 드날렸고, 보월 스님을 거쳐 금오 스님에 이르러 선림(禪林)을 이뤘다. 1954년에는 교단 정화의 선봉에 나서 비구대회 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전강 스님(1898∼1975)은 치열한 구도행을 보여준 선사였다. 1914년 해인사에서 출가한 전강 스님은 예산 보덕사·정혜사 등에서 피를 쏟고 머리가 터져가며 100일 동안 용맹정진해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통도사 보광선원, 법주사 복천선원, 김천 수도선원, 광주 자운사 등의 조실을 역임했다.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이 법제자다.

고암 스님(1899∼1988)은 철저한 수행자이면서 인욕과 자비행으로 평생을 살아간 고승이다. 1967년 고암 스님은 효봉 스님의 입적으로 공석중인 조계종 종정에 추대됐지만 고사하다 수락했다. 상좌가 20살이 넘으면 존대말을 썼고, 공양주를 도맡아 하는 등 항상 하심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줬다.

벽안 스님(1901~1988)은 1935년 거사의 신분으로 금강산 마하연 석우 선사 회상에서 안거 후 여러 선원에서 정진하다 3년 뒤 경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후 경봉 스님의 법통을 이어 받는다. 그 뒤 종립학교의 육성과 후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동국학원 및 원효학원 이사로 재직했다.

구산 스님(1909∼1983)은 출가 이후 송광사와 백양사, 통도사, 해인사, 금강산 등을 돌며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면서 끊임없이 ‘이뭣꼬’를 의심했다. 스님은 ‘칠바라밀 요일’이라는 독특한 신행 체계를 만들어 매일매일 목표를 정해 생활불교를 실천할 것을 불자들에게 강조했다. 이와 함께 70년대부터 해외포교를 강조해 미국 등지에 송광사 분원을 설립하는가 하면 송광사에 국제선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한국불교 근현대사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은 1947년 이뤄진 봉암사 결사이다. 봉암사 결사에는 성철, 향곡, 청담, 자운, 혜암, 법전 스님 등 훗날 수행으로 일가를 이루는 고승들이 대거 동참했다.

청담 스님(1902~1971)은 봉암사 결사를 비롯해 정화운동을 이끌며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던 고승이다. 조계종 종정, 총무원장, 중앙종회 의장, 룸비니 한국협회 총재, 동국학원 이사장 등의 소임을 맡아 한국불교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향곡 스님(1912~1979)은 경허·혜월·운봉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이어 받았다. ‘납자를 제접하는 데에는 향곡만한 스님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한국불교의 선풍을 진작시키는 데 기울였던 스님의 노력은 대단했다. 법제자로는 현재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이 있다.

성철 스님(1912~1993)은 한국 근현대사 있어서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고승이다. 동산 스님 문하에서 수학하며 득도한 성철 스님은 파계사에서 장좌불와 8년 정진을 하는 등 끊임없는 구도열을 보여줬다. 1967년 해인총림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하면서 대중들에게 100일 법문을 설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81년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추대식에 참여하는 대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발표했다.

성철 스님은 평소 제자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잠을 적게 잘 것, 말하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간식을 먹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 등을 권했다. 스님 자신도 청빈하게 생활하며 소금기 없는 음식을 먹고 작은 암자에서 평생을 살았다.

봉암사 결사에 참가했던 혜암 스님(1920~2001)은 이판과 사판을 아우르는 선지식이었다. 1994년 종단 개혁에서 애종심의 사표가 됐고, 1998년 종단 사태와 관련 조계사 앞 우정국로에서 열렸던 전국승려대회에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종도들의 갈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1999년 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취임해 한국불교를 이끌었다.

서옹 스님(1912~2003)은 백양사를 무대로 ‘참사람’ 결사를 주창하며 임제정맥을 이어온 한국 현대불교의 대표적 고승이다. 1963년 동국대에 대학선원을 개원해 원장을 맡으며 참선의 대중화에 힘을 쏟았으며, 197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에 추대된다. 이후 스님은 백양사 조실(1981),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1990),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1996) 등으로 주석하면서 후학 제접과 한국불교 발전에 힘쓰다 2003년 마지막 날 백양사 설선당에서 좌탈입망했다.

월하 스님(1915~2003)은 1950년대 정화운동에 나선 이후 종앙종회 의원에서부터 총무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쳐 종정에까지 오른 조계종 어른이었고 50안거를 기록한 이사(理事)를 겸한 선승이었다. 80세가 넘어서도 방청소와 빨래를 직접 했으며 자가용 없이 버스를 타고 다녔다.

원담 스님(1933~2008)은 만공 스님으로부터 직접 탁마한 마지막 선승이었다. 어린 시절 절에 들어간 동진 출가자로서 천진무애한 모습을 보여 불교계에서 대표적인 ‘천진불’로 꼽혔다. 또한 스님의 서예는 국내 최고의 선필로 알려지기도 했다. 제자로는 현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 등이 있다.

지난해 12월 입적한 법전 스님(1938 ~2014)은 현존하는 마지막 봉암사 수좌였다. 1956년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서 득력(得力)한 뒤, 1957년 33세의 나이에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이후 제방 수행처의 정진대중들은 법전 스님에게 '절구통 수좌'라는 별호를 붙여 줬다. 2002년 조계종 11대 종정, 2007년 12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교육·역경
만암 스님(1875~1957)은 선과 교를 겸비하고 일찍이 인재불사의 중요성을 알고 노력해왔던 고승이다. 1929년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 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한 스님은 한국불교가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후학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뜻을 세우고 1947년 정광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또 1951년 한암 스님의 입적으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의 새 교정에 오른 스님은 이후 종단의 분규 속에서도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운허 스님(1892~1980)은 한국불교 역경사에 길이 남을 고승이다. 스님은 〈능엄경〉을 시작으로 〈무량수경〉〈범망경〉〈정토삼부경〉 등을 번역했고 1961년에는 한국불교에서 처음으로 〈불교사전〉을 펴내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1964년 역경원장과 역경위원장의 책임을 동시에 맡아 20세기 최대의 불사라 일컬어지는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한글화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관응 스님(1910~2004)은 선교를 겸수(兼修)하고 포교에도 남다른 원력을 가진 스님이었다. 1965년 천축사 무문관에 입방해 6년간 수행했으며, 만년에는 직지사 조실로서 후학을 이끌었다. 칠순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직지사에서 〈선문염송〉을 강의하여 후학들에게 조사어록을 해석하는 새 안목을 열어 주었다. 또 황악학림에서는 3년간 강석을 열어, 원산, 연관, 범하, 자일 등 10여명의 강백을 길러내기도 했다.

탄허 스님(1913~1983)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도교 등 동양사상 전반, 특히 〈화엄경〉과 〈주역〉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았다. 탄허 스님은 15년 동안 한암 스님을 모시고 오대산 상원사에 머물면서 불교내전(佛敎內典)과 선학(禪學)의 일체를 수학했다. 이후 1953년 강원도 종무원 원장과 월정사 조실을 맡은 탄허 스님은 오대산에 수도원을 세우고 동국대 대학선원, 대전 자광사 등을 오가면서 수행에 전념했다. 1972년에는 화엄학 연구소장을 맡았으며 1974년 평생을 바친 〈신화엄경합론〉을 간행했다.

지관 스님(1932~2012)은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최고의 학승이며, 교육자였으며, 총무원장을 역임한 교단지도자였다. 지관 스님은 생전에 〈치문경훈〉 〈대혜서장〉 〈도서〉 〈선요〉 〈절요〉 〈요경서설〉 〈남북전육부 율장비교연구〉 〈비구니 계율 연구〉 〈불교교단 발달사〉 〈계율론〉 〈조계종사〉 〈가야산해인사지〉 〈역대고승비문총서〉 〈가산불교대사림〉등의 저술을 남겼다. 특히 필생의 원력인 〈가산불교대사림〉은 현재 14권까지 발간됐으며, 스님의 입적이후에도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이 유지를 이어 받아 편찬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율사
묵담 스님(1896~1982)은 조계종과 태고종의 종정을 두루 지낸 스님으로 청정 비구였다. 특히 해동칠불(海東七佛) 제9대 율사로서 한국불교 계율 수행사 자체이기도 하다.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제 5·6·7세), 1975년 태고종정을 역임했다. 

자운 스님(1911~1992)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이 바탕에는 치열한 수행정진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 감로사에서 자료를 수집, 한글, 한문본 율서 4만 8000권을 간행해 현대 한국불교에서 율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1981년 조계종 단일계단의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돼 1991년까지 수많은 수행자들에게 계를 주기도 했다.

일타 스님(1929∼1999)은 1976년 해인총림의 율주로 추대되면서 〈사미율의〉, 〈불교와 계율〉 등 계율 관련서를 발간하고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일제 강점기 이후 무너져 내린 지계정신을 다시 확립하는 데 매진했다.

포교
석주 스님(1890~2004)은 질곡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고승이다. 1963년 대한불교 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 1971년 제7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스님의 포교에 대한 남다른 활동은 어린이 포교로 이어졌다. 종단이 어린이 포교에 역량을 투입하지 못했던 1965년 스님은 칠보사에 어린이회를 창립해 어린이 포교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대은 스님(1894~1989)은 근대 포교의 기틀을 다진 선지식이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스님은 1929년 각황사(現 조계사)에서 ‘중앙포교사’ 소임을 맡아 종단 공식 ‘조선불교 1호 포교사’가 됐다. 이때 가진 원력으로 〈불교시보〉를 10년간 발행하고 만주 열차에서 불교를 전하는 등 포교에 힘썼다. 해방 이후에도 알기 쉬운 경전 번역과 해설서로 대중들에게 불교를 전했다.

숭산 스님(1927~2004)은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해 평생의 원력을 바친 고승이다. 스님은 1966년 일본 신주쿠 홍법원을 시작으로 홍콩, 미국, 캐나다, 영국, 브라질, 프랑스 등 32개국에 120여개의 선원을 개설,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렸으며 외국인 수행자들을 제자들로 속속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5만 여명이 넘는 외국인을 제자로 뒀다.

광덕 스님(1927~1999)은 철저한 지계를 바탕으로 평생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갈구했으며 반야바라밀 실천운동을 전개해 생활불교 운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스님은 1954년 부산 좌천동 한 가정집에서 열었던 사랑방 법회를 시작으로 불광법회를 개설해 부처님 본연의 근본불교를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또 일생동안 30여 권의 불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기도 했으며 각종 찬불가를 작사해 현대 불교 음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무진장 스님(1932~2013)은 포교에 평생의 원력을 바쳤다. 스님은 조계사에 머물며 청빈한 삶을 실천하고 불교발전과 대중포교를 위한 일에 매진했다. 조계종 제2·4대 포교원장을 역임하고 2007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된 뒤 대종사로 품수됐으며 2010년 조계사 회주로 추대됐다. 평생 대중교화와 교육에 매진한 까닭에 조계종 포교대상을 비롯해 제3회 대원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문화·예술
만봉 스님(1910~2006)은 단연 불교미술의 거장이며 당대 최고 금어(金魚)다. 스님의 기법은 색상이 유독 화려하다는 것과 초(草)가 다양하고 세밀하다는 뚜렷한 개성이 돋보인다. 스님의 손을 거친 사찰 단청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특히 경복궁 경회루, 남한산성, 공주 마곡사 등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송암 스님(1914~20002)은 한국 불교 범음 범패를 알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선지식이다. 스님은 월하·벽해 두 어장스님으로부터 범음 범패를 전수받아 1973년 범음 범패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받는데 큰 공헌을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이었던 석정 스님(1924~2012)은 금강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스님은 서너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전국 각지의 고탱화를 돌아보고 연구한 끝에 마침내 옛 탱화의 색감에 감춰진 비밀을 밝혔으며 손상된 불화들의 옛 불화들의 보존과 수리에 힘썼다. 주요작품으로는 송광사 대웅보전의 후불탱화 등이 있다.

법정 스님(1932~2010)만큼 필묵 하나로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인물이 세간과 출세간을 통틀어 다시 존재할까. 스님은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20년을 홀로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속세를 떠나 자연의 벗이 된 후, 자연이 주는 가르침을 곧고 정갈한 글을 통해 보여줬다. 스님의 저서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 〈서 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홀로 사는 즐거움〉,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맑고 향기롭게〉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숫타니파타〉, 〈진리의 말씀(법구경)〉, 〈인연이야기〉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