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 부처의 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 그림 최주현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것은,
중생들은 보고 듣고 생각 일어나는 것 모두가
자기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중생이요,
부처님의 뜻은 자기가 고정돼 있지 않으니까
마음조차도 배꼽이 떨어졌다라는 겁니다.


지금 젊은 분들도 그렇거니와 애들서부터 어른까지 다 알아야 할 인생관, 인생이 어떻게 해서 자기한테 주어졌고 어떻게 조화가 돼서 돌아가는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화원의 꽃이 저렇게 한데 합쳐져서 조화가 이루어졌듯이, 산의 고목이나 벌레 먹은 나무들, 짧고 긴 나무들, 풀 등도 각기 모습이 다 다른 것들이 같이 모여 있기에 조화를 이룬다는 것. 산골마다 물도 좋고 돌도 있고, 그 여러 모습들이 조화된 아름다움으로 우리들 눈에 비추어진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우리들의 삶에 대한 것도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둠이로 생각해서 물 위에 산이 가고, 산 위에 물이 간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지혜 있는 데 마음이 있고 마음 있는 데 지혜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곧바로 자기한테 있다는 얘깁니다. 지혜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을 때 지혜는 물로 비유했고 마음내는 이 자체는 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습 모습이 다른 여러 종류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 산에 비유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살아나가는 모습들이 다르고 이름들이 다르고 또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키가 작은 사람 큰 사람, 모두 다 같이 사는 것처럼 산에도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와 같이 들이나 산이나 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우리 한번 그것을 타진해 봅시다. 물이라는 것은 지혜로 비유하니 우리가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또는 감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온갖 지각이 한데 합쳐진 것을 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귀로 듣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는 눈으로 보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코로 냄새 맡는 것을 받아들이고, 혀로 맛을 아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는 부닥치는 것을 받아들여서 그 모두를 지혜롭게 돌린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로 들어서 화가 불끈 나는 것도 있지만 아주 감미롭고 친근하고, 어떤 땐 웃음이 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어떤 때는 상을 찌푸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이랬을 때에 그 듣는 순간에 마음이 달라진다는 얘깁니다. 달라지는 이 마음 자체가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것은 여러 가지로 듣기 때문에 산으로도 비유한 겁니다.

듣는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도 역시 아름답게 생각이 들 때가 있고, 아주 속상할 때가 있고, 여러 가지가지 아니겠습니까? 냄새를 맡아서 구린내가 나는 것도 있고 향기로운 냄새도 있는 것입니다. 또 맛을 봐서 아주 맛이 없는 것도 느끼고 맛이 있는 것도 느낍니다. 또 우리가 손으로 쥐어서 촉감이 좋은 것이 있고 아주 거친 게 있습니다. 그런 걸 알게 하는 그 자기의 모든, 한데 합쳐진 지혜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청각이 뚜렷하고 시각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모든 게 융합돼서 돌아가는 것을 발현하고 서로 상응하게 하는 그 자체의 지혜가 넓어야 된다는 얘기죠. 바다와 같아야 된다. 좁아서는 허공에 바늘구멍도 안 들어간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우리가 귀로 듣고 혀로 맛을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하는 것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것은, 중생들은 보고 듣고 생각 일어나는 것, 모두가 자기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중생이요, 부처님의 뜻은 자기가 고정돼 있지 않으니까 마음조차도 배꼽이 떨어졌다.’라는 겁니다. 처음 단전을 할 때 배꼽 밑에다 중심을 두라고 하지만 그 배꼽까지도 송두리째 빠졌다 이 소립니다. 송두리째 빠지니까 나라고 내세울 게 없는 것이 공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아까도 얘기했듯이 귀로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느끼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죠. 보는 것도 고정되게 보는 게 하나도 없고 말하는 것도 고정되게 말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행하는 것도 그렇고, 내 몸도 어떠한 부분을 내 몸이라고 할 수 없게끔 모든 면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죠.

그렇다면 그렇게 고정되지 않게 돌아가는, 조화롭게 돌아가는 것을 ‘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왜 ‘한 사람’이라고 했을까? ‘한’이라는 것은 이 내 몸 안에 5억이라는 생명이 들어서 한데 합쳐져서 조화를 이루고 자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돌아가니까 ‘한’이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한데 합쳐졌기 때문에 그 생명체가 손을 움죽거릴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모든 것에 상응할 수가 있고 받아들일 수가 있고, 줄 수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공하다라는 얘기죠.

모든 것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바로 한 화병에 여러 가지 꽃을 담아서 조화가 되게 하듯이, 산에도 모든 게 조화가 돼서 있듯이 그렇게 조화가 돼서 연방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하면은 그 사람의 소임 맡은 지금 대표인 즉, 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표하는, 한 사람의 마음이 5억의 생명을 대표하기 때문에 지혜롭게 돌아가는 겁니다. 대표하는 그 마음이 생각하는 대로, 우리 이 몸 안에서 돌아가는 것도 거기에 응해서 돌아가는 것이요, 또 그 마음에 응해서 바깥의 상대를 접하는 것도 내 마음에 의해서 접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도 있죠. 뜻을 이루어서 참자기를 자기가 발견한 자는 계법을 지키지 않아도 그 계법을 범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계법을 지키지 않는 반면에 결국은 범하지를 않는다. 앉아서 다리를 틀고 좌선을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끊임없이 게으르지 않게 정진하는 것이 참선이니라.’ 한 것입니다.
내가 꼭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깨친다 안 깨친다를 떠나서 우리 젊은이들이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 여자고 남자고 젊고 늙고 간에 이것을 불문에 부치고 자기 앉은 방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중생이라고 말한 것인데 우리가 이 한국이라는 조막댕이만 한 나라에 태어났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자기 몸을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이 자기 가정을 보호하고, 자기 가정을 보호하는 사람이 사회도 보호할 줄 알고, 또한 국가적으로도 그렇거니와 세계적으로도 우주적으로도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야 내가 앉은 자리를, 내가 내 발등에 불 떨어지는 거를 끌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반면에 여러분이 ‘아, 부처님 법은 이렇게 어렵구나. 이걸 깨달아야 한다니 아이고, 우린 깨닫지 못해서 중생이지.’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중생 부처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선의 생각을 해도 그것은 집착이니 인을 짓는 것이니라.’한 겁니다. 아무리 내가 보시를 하고 좋은 일을 하고 공부를 잘한다 하더라도 착을 둔다면은 그것도 선인(善因)을 짓는 거죠. 집착을 했으니까. 그래서 악에 집착을 해도 아니 되고 선에 집착을 해도 아니 되느니라. 일상생활에서 요만한 거 하나라도 착을 둬서는 안 되느니라. 내 마음이 고정되게 돌아가지 않고 공했으니 내가 하는 모든 일도 전부 공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도 착(着)을 두지 말고 그냥 무심, 무심으로 해라 했던 겁니다.

그렇다고 ‘마음 내놔 봐라.’ 한다면 어디, 눈에 마음이 붙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귀에 마음이 붙어 있다고 하겠습니까? 코에 붙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배꼽에 붙어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너무도 광대하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어디 고정되게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부처라는 이름이 있지 만약에 공하지 않았다면 부처라는 이름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팔십종호(八十種好) 할 때 ‘종호’, ‘종’도 ‘호’니라. 하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이 어렵다,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떠나서 시간과 공간이 초월된 상태로 우리는 지금 그냥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산도 없거니와 옛 사람도 없고, 옛 물도 없다는 뜻이 바로 이런 데 속합니다. ‘어렵다’고 생각하시지 말고, ‘내가 중생이다 부처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마시고 ‘내가 이렇게 하면은 중생이고 저렇게 하면 부처인데 내 부처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 부처의 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잘못되고 잘된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좋고 이렇게 하면 언짢은 거를 너무도 잘 알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 상식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벌써 태어났으면 나쁘고 좋은 걸 안단 말입니다. 우리가 의려를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알 만큼은 알 수 있는 거니까 그걸 묵인하고 그냥 부처님의 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는데 마음먹기에 달린 이 한생각을, 시대로 봐서도 우리가 단연코 중생이 아니라 부처의 행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크게 생각하려면 크게 생각하고 작게 생각하려면 작게 생각하고, 내가 우주 바깥을 벗어나려면 벗어나고 안에 들어 있으려면 들어 있고, 혹은 굴속에 들어가서 있으려면 있고, 바늘구멍 속에라도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크고 작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참자기의 작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생활 속의 어떠한 작은 일이라도 그렇고, 나라를 비유할 때도 그렇고, 사회를 비유할 때도 그렇고, 우리가 각중(刻中)에 어떠한 걸 봤다, ‘이거 참 위태하구나.’ 이럴 때 즉 ‘이럭하면 안 돼!’ 하는 그 일념을 낼 수도 있죠.
한 사람의 한 생각, ‘한 그릇’이라는 뜻도 되고 ‘한마음’이라는 뜻도 됩니다. 5억이라는 생명의 능력도 우리가 생활을 해 나가는 데 부담이 없이 해 나가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딛고 다니게 하고 또 먹고 싶으면 먹게 하고 가고 싶으면 가게 하는 능력을 갖게 했습니다. 생각을 하게 했고요. 그러니까 그 능력을 발휘해서, 우리의 몸뚱이는 하나가 아니라 5억의 생명들이 한데 합쳐서 대표인으로 됐는데, 대표인끼리 또 한데 모이면은 그 ‘한’이 너무도 광대무변해서 어디고 안 닿는 데가 없이, 아니 담을 게 없이, 아니 돌아가는 게 없이, 아니 덮는 게 없이, 아니 비치는 게 없이 광대무변하게 상응할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처님 법을 빨리 알 수가 있을까, 지속적으로.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한생각 낼 때에, 한생각은 생각 내기 이전의 근본인데 그 근본으로 하여금 생각을 낼 때, 크고 작은 것은 그대로 유(有)의 법으로써 그냥 무심으로 해 가야 되겠지만 내 생각 자체가 그대로 법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어저께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합디다. ‘어느 분이 이렇게 말합디다.’ 하는 것은 나라고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럽니다. 어저께 텔레비전에서 씨름을 하는데 말입니다, 한 사람은 덩치가 크고 한 사람은 덩치가 작았습니다. 그거를 보는 순간 ‘약한 사람이 덩치 큰 사람을 한번 이겨 보는 것도 좋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얘기를 하거나 ‘내가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순간 ‘야, 저건 그렇게 하면 재미있는 게임이야.’ 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덩치가 작은 사람이 팔이 저리고 아파서 못 쓰면 도저히 덩치 큰 사람을 넘길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의 에너지가, 덩치가 작은 사람의 마음과 이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 팔에 힘이 솟아난 겁니다. 그러니까 그 큰 몸뚱이를 넘기는 게임을 모든 사람들이 볼 때 ‘이왕지사 이겼던 거 조그마한 사람이 이겨라.’ 하하하, 이렇게 했던 것을 지금 말씀드리는 건데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써 내 가정을 지키고, 내 몸을 지키고, 사회를 지키고, 국가를 지키는 데에 이러한 한생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싸움이 없으면서도 실은 어떠한 위기에서 싸움을 해 나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랬을 때에 생활이나 몸에 대해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모든 것을 해 나가려면 마음이 넓어야 한다 이겁니다. 이 한국만 생각하지 마시고 널리 세계를 보고, 우주적으로도 지금 앉은 방석을 온전하게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화병에 꽃을 꽂아서 향기를 맡고 아름다움을 즐기고 생활이 잘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조화가 잘될 수 있듯이 말입니다. 부처님 법에는 이 생명 저 생명이,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지마는 둘이 아니면서도 너무나 철두철명하게 너와 내가 있는 것입니다. 여자 남자가 없으면서도 여자 남자가 뚜렷하게 있어 여자 할 일은 여자가 하고 남자 할 일은 남자가 하듯이 그렇게 뚜렷한 것입니다. 둘이 아니면서도 모습 모습은 다 각각이나 조화를 이루듯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마음부터 알아야 그야말로 한생각을 내도 지혜롭게, 넓게 할 수 있는 겁니다. 마음부터 알아야 하는 것은, 내 마음은 체가 없어서 내놓을 것이 없이 공했다. 그러니까 공한 내 참나를 그냥 무조건 믿고 무슨 일을 하는 것도 내가 옳다고 생각했을 때는 무조건 한다. 또 사회적으로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텐데, 우리 국민이 이거는 안 되겠다 할 때는 무조건 국민을 위해서, 대인을 위해서 밀고 나간다. 내가 회사원이라 할지라도 그렇고 공장을 한다 무슨 장사를 한다 이런 경우도 다 그런 점으로 인해서 융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생각에. 한 사람만이라도 생각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회사는 아주 융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한생각을 잘한다면 이 나라는 바로 물질과학으로부터 정신과학으로, 마음으로써 만법을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깨친다 안 깨친다 이거를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자꾸 스스로 좌절해요. 여러분은 자기를 못 믿어요. 여러분은 자꾸 자기가 생각하는 거를 ‘중생이 생각하는 건데 이거 안되지.’ 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것뿐만 아니라 큰 것도, 타인의 일이라도 말입니다. 공장을 처음 냈는데 ‘이게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할 때 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며, 한생각을 탁 내 줄 때 그 공장은 그대로 유지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생각을 내 주는 것도 그렇고 한생각을 하는 것도 그렇고 한생각의 그 향기로운 냄새가 온 우주를 다 덮고 우주를 싸고 아니 닿는 데 없이 닿을 수 있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음의 능력입니다. 마음은 여러 가지로 낼 수 있고 여러 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몸뚱이도 한 사람의 몸뚱이지만 이름이 다 각각 있지 않습니까. 눈이다 코다 귀다 손이다 발이다 간이다 하는 이름이 여간 많지 않습니까. 이 많은 이름들이 한데 합쳐진 게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이 하는 노릇이 부처가 하는 노릇이다 이겁니다.

그렇게 백지장 하나 사이인데도 그게 그렇게 안 돌아가니까 힘이 든다 이겁니다. 마음의 주인공은 바로 가슴에서 느끼는 점입니다. 느끼는 점! 이 가슴에 와 닿아 가지고 느끼는 점입니다. 느껴서 그대로 생각나면 그냥 그대로 법입니다. 그러니 보는 것도 아주 세밀하게 볼 수가 있는데 그거를 여러분이 느끼면서도 못 믿는 것입니다. ‘야, 이게 내 마음으로 이렇게 느껴지는데, 모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까 이건 안 된다는데….’ 이러거든요. 남의 말을 그렇게 잘 들으면서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자기 주인공의 뜻은 왜 못 믿습니까? 자기 스스로 믿고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자재한다면 그대로 법신 아닙니까?

그래서 법신은 ‘자(子)’로 치고 마음내기 이전은 ‘부(父)’로 쳤습니다. 마음을 내서 용(用)을 할 때 ‘부’는 ‘자’로 하나가 돼 버리고,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는 한데 조화가 돼서 가만히 있으니까 부처거든. 그러니 여러분이 생각할 때 좁게 생각하지 마시고 넓게 생각을 하십시오. 부처님께서 ‘누구 형상에다가 절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뜻은 그걸 알고 하면은 절을 해도 자기요, 모르고 하게 되면 타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빨리 깨쳐야겠다 해도 그것이 착이 되는 거니까 빨리 깨쳐야겠다 하는 그 말 자체가 아닌, 그대로 자기를 믿으라는 얘깁니다. 욕심이 생겼다는 얘깁니다. 욕심이 생겼는데 내가 항상 말을 하듯이 여기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자기 자신(自信)이 있다면 그것을 밀고 나가고 자신이 없다면 밀고 나가지 말아야 하겠죠. 이것이 자기 분수에 따라서 판단하고 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판단을 할 때 처음에는 요기밖엔 못 디뎠는데 나중에는 저기까지 딛게 됐다 이겁니다, 지혜가 넓어져서. 그랬을 때 차츰차츰 뛰어야 되는 거지 이걸 한꺼번에 뛰려면 안 되니까 살면서 체험을,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체험을 해 나가시라 이겁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