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석화백의 화폭속 선지식-관응 스님 3

벌이 사람보다 낫다는 농담 한마디에도
무생물조차 존재 의미있다며 정색하시던 스님
분별력 뛰어넘는 ‘유연한 사고’ 강조
20년 지난 지금도 스님의 가르침 기억

▲ 단맛, 140X73cm, 종이에 수묵, 2015, 작가소장. 관응 스님과의 대화에 열중한 사이 차가 식어버렸다. 차에서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님께서는 “황악산 중턱에 사는 장수말벌이 와서 찻잔 속에 있는 차의 단맛과 맑은 색을 다 빨아먹고 표표히 날아갔다”고 하셨다.

관응 스님께서 물으셨다.

“김 화백,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왜 그리나요? 그림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까?”
나는 원초적인 질문에 당황했다. 스님의 질문은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를 꿰뚫고 있었다.

“저는 조선의 된장 냄새를 그리고자 합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모습과 이 땅에서 숙명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정신을 그리고 싶습니다. 불의와 억압, 그리고 압제를 뚫고 잃어서는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대중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땅의 모습을 내가 추구해야 할 예술의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로서 해야할 일이라는 확신에서였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도록 말미에 수록된 작가노트 내용을 중심으로 스님의 질문에 성심껏 답했다. (작가노트는 시공사 아르비방 김호석 도록(1994)과 샘터화랑 전시도록(1994)에 수록되어있음) 내 말이 끝나자 스님께서는 수초(守初)라는 호를 지어 주시고는 “처음의 뜻을 지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그 말씀을 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수초’라는 법명을 쓴 이가 있었습니다. 중국 스님인데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마삼근(麻三斤)’ 이라 답을 했던 분이지요.”

나는 성철스님의 화두도 마삼근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마삼근을 두고 스님과 나 사이에는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오랜 침묵을 깨고 나는 스님께 여쭈었다.

“왜 부처가 참깨 세 근입니까?”

순간 스님은 화들짝 놀라며 “왜 마 삼근을 참깨 세 근으로 보느냐”고 되물으셨다.

“저는 마(麻)라는 글자가 삼베 재료인 삼과 참깨 그리고 마마자국을 의미한다고 배웠는데, 불법과 연관짓는다면 삼베가 아닌 참깨와 관련이 깊다 생각합니다. 말린 삼 3근은 삼베를 13자 정도 밖에 짜지 못합니다. 길이로 봐서 별 효용성이 없어 보이죠. 그런데 참깨는 홉, 되로 계량하지만 중국에서는 근 단위로도 판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깨 1개를 심으면 하나의 대에서 2백여개 이상의 깨가 수확됩니다. 참깨를 털 때 얼마나 좋으면 ‘깨 쏟아지듯’ 이란 표현을 했을까요? 참깨 농사를 지어보니 살이 통통한 하얀 깨가 툭툭 터지며 수북이 쌓이는 모습에 환희가 일더군요. 이외에도 참깨를 볶아 기름을 짜면 혀를 부드럽게 하여 마음을 좋게 만들기도 하지만 푸성귀 등 채소를 무칠 때 사용하면 천연 구충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참깨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불교 역시 공부할수록 생각이 증식되는 것이나 깨닫게 되면서 얻는 환희심이 참깨에 담긴 의미와 일견 비슷하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말씀 드렸다.

스님은 내 말이 끝나자 마삼근을 참깨 세 근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빙그레 웃으셨다. 그 웃음은 마치 이가 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미소 같이 아름다웠다.

이어 스님은 내게 “너무 생각이 복잡합니다. 글자는 약속이지만 사고가 유연하게 넘나들어야하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김 화백은 너무 사변적이군요. 자신에 갇히면 자신도 보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스님의 조언에 부끄러웠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궁금한 바를 여쭈었다.

“스님 그러면 불교란 글자에 매달리고 끌려 다니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녹차를 마시며 논쟁은 계속됐다. 이야기는 종교와 동서양 철학을 넘나들며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녹차가 앞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열중했다. 논쟁이 한 풀 꺾여 정리 될 즈음 차를 입에 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차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스님께 무슨 차이기에 이렇게 무미한지 여쭈었다. 이에 스님께서는 머리를 뒤로 젖혀 파안대소 하시며, “김 화백이 하도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모르겠지만 황악산 중턱에 사는 장수말벌이 와서 찻잔 속에 있는 차의 단맛과 맑은 색을 다 빨아먹고 표표히 날아갔는데 그걸 보지 못한 모양이지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스님의 말씀에 “황악산 벌은 차 맛도 다 아는 모양이네요? 참, 사람보다 낫네요”라고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그러자 스님의 표정은 일순간 심각해졌다.

“김 화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이름을 가진 모든 것은 제 이름 값을 하면서 생을 영위해갑니다. 아니 이름을 가지지 않은 생물·무생물조차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거예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으며 존재할 이유가 있습니다. 김 화백의 말은 곤충이 인간보다 못하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러나 곤충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충, 해충의 생각을 뒤집으면 인간은 그 반대로 해로운 동물이 되는 셈이지요. 그런 생각을 지우면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더 넓어질 것입니다.”

아차 싶었다. 스님의 말씀은 내게 큰 가르침이 됐다.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전갈을 받고 다비식 하루 전 중암을 찾았다. 스님이 머무시던 방에서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시자스님의 배려였다. 나는 큰 어른을 잃은 슬픔에 괴로웠지만 스님의 육신을 보는 순간 스님과 함께 한 시간과 공간이 몸 속 세포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감사한 마음이 슬픔을 눌렀다. 공교롭게도 나는 스님의 가시는 날 정수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김천시내 병원에서 6바늘을 꿰매고 붕대를 붙인 채 밤새 다비장을 지켰다. 스님이 가신 날, 머리에 난 상처는 스님과의 깊은 인연을 더욱 강렬하게 기억하는 계기가 됐다. 밤새도록 이글거리며 타는 불 소리가 마치 스님의 독백처럼 귀를 때렸다.

"삼이냐? 참깨냐? 앞이냐? 뒤냐? 그 말이 가지는 분별력의 벽을 넘어야 하지 않겠어요? 언젠가 이 말을 알아들을 때 무릎을 탁 치며 세상을 얻는 느낌이 올 때가 있을 거요."

스님께서 입적하신지 올해로 10년째다. 현실을 벌에 빗대어 표현할 내용이 있어 벌을 그리려고 밑그림을 그린다. 내가 원하는 그림은 안 그려지고 불현듯 스님의 말씀만이 귓전에 맴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황악산 중턱에 사는 장수말벌이 찻잔 속에 몸을 적셔 차의 맑은 향과 색을 다 빨아먹고 날아갔다…”
스님, 스님 말씀대로 황악산 장수말벌이 날아와 찻잔 속에 들어와 차향을 모두 빨아먹은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스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하도 귀하고 귀해 그 법열의 단맛에 차향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까?

▲ 화삼매, 65X91cm, 종이에 수묵 담채, 2015, 작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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