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 유교 경전 〈주역〉

태극·괘 등 통해 인간사 논해
儒經 중 하나… 미신 치부 곤란

세상의 변화를 읽고 이해하고
올바르게 대응하는 것이 핵심
‘모든 것은 변한다’ 관계론 등
불교의 인식론과 유사점 많아

장아함 가운데 〈사문과경〉에는 불교의 사문들이 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이 나온다. 그 가운데 아주 자세하게 언급되는 것이 점치는 일 등의, 세간에서 미신이라 부르는 것들을 불교의 사문들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강조된다. 그렇게 부처님이 불교의 출가자들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한 것들을 하는 스님들이 현실에 꽤 많다는 것에 새삼 당혹스럽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가 다르다고 변명하면 합리화가 될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좀 생뚱맞은 생각이 떠오른다. 부처님이 〈주역(周易)〉을 아셨다면, 그 〈주역〉에 의해 치는 점도 금지를 시키셨을까?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점치는 책을 넘어선, 한자문화권의 형이상학과 우주론 등 철학의 근본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은 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가 〈주역〉의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겠는가?

〈주역〉의 계사전에 “주역에 태극의 원리가 있으니,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고, 팔괘가 길흉을 결정하고, 길흉을 잘 판단함에 의해 큰 업적을 이룬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을 압축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태극기인 것이다.

만약 〈주역〉을 미신으로 돌린다면 그 원리를 도상화하여 국기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는 미신 공화국이 될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주역〉의 철학과 원리는 받아들이되 그것에 의한 점복은 배척하면 될까? 그것도 그리 쉽게 말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점법이라는 성격을 떠나서 〈주역〉의 철학과 원리가 홀로 존재할 수 있을지 따져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역〉의 체계를 차근차근 설명해 보자. 〈주역〉은 점서임에 분명하다. 중국 주 왕조의 역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夏)왕조의 역법으로 연산역이라는 것이, 은(殷)왕조의 역법으로 귀장역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구성을 보면 64개의 괘(卦)라는 것에 베풀어진 점사(占辭)들의 집합인 경과, 주역의 원리를 부연한 십익(十翼)이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앞에 들었던, 십익의 하나인 계사전의 말에 따르면 〈주역〉의 근본원리는 태극이다. 그러나 태극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정말 근본의 근본에 해당한다. 점치는 방법에서도 태극은 상징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이 태극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음과 양이 조화되면서 끝없이 순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하나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태극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은 양의(兩儀)이고, 일반적으로 이 양의는 음양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에 들어오고, 〈주역〉이라는 책 속에 나타나는 〈주역〉의 근본 원리는 양과 음이라는 두 부호이다. 양이라고 불려지는 부호인 ‘-’과 음이라고 불려지는 부호인 ‘--’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괘로서 인생과 우주 자연의 모든 일들을 해석하고 또 그 변화를 예측하고자 하는 것이 〈주역〉이다.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부호, ‘--’ ‘-’를 기본으로 하여 그것들을 세 개씩 겹친 여덟 개의 부호를 만들어 낸다. 이른바 팔괘이다.(乾兌離震巽坎艮坤) 그런 다음 이 팔괘를 다시 두 개를 겹쳐 64개의 부호 체계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64괘이다. 이 64개의 괘를 가지고 인간과 자연의 모든 일들을 점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주역〉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정연한 점법은 없다.

그리고 〈주역〉의 체계 속에는 점법 이상의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점이란 본디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해석하고 그로부터 어떤 행동의 방침을 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부호들은 각각 거기에 어떤 사물이나 성질, 사태 등을 걸 수 있는 괘(卦)이다.

기본 부호인 -과 --에는 각각 강건함:유순함, 남성적:여성적, 밝음:어두움 등의 성질이 대입될 수 있다. 팔괘로 전개되면 좀더 구체적인 사물들이 대입될 수 있다. 에는 임금, 말, 머리, 하늘, 아버지 등이 대입될 수 있다. 에는 신하, 소, 배(腹), 땅, 어머니 등이 대입될 수 있다. 64괘로 전개되면 좀더 복잡한 사태까지도 거기에 대입되어 풀이될 수 있다.

옆의 괘는 지천태(地天泰)라고 이름하는데 이는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밑에 있는 괘이다. 그리고 이 괘는 스스로를 낮추는 하늘의 마음과 하늘을 받드는 땅의 마음이 드러난 괘로 풀이되며 그래서 하늘과 땅의 교감으로 만물이 창통하는 형세를 나타낸다고 일반적으로 풀이된다.

천지비(天地否)라는 괘는 하늘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땅은 하늘을 받들지 않아 만물의 생성이 단절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일반적으로 풀이된다.

주역에 대한 상식이 없는 분들에게 기본적인 설명을 해 준뒤 이 두개의 괘를 보여주면서 어떤 것이 좋은 상황을 보여주는 괘냐고 물어보면 거의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밑에 있는 괘, 즉 천지비괘를 선택한다. 그렇지만 주역의 해석은 그렇지 않음을 위에서 이미 보여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역의 점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

이 두개의 괘는 단지 어떤 일의 길흉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야 할 도리 또는 사람의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위와 아래가 소통하는 구조의 사회와 위와 아래가 단절되어 양극화된 사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괘를 풀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만약 주역의 점을 통해 이 괘를 얻고 어떤 결정을 했다고 하자.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단지 하나의 일을 결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보는 하나의 중요한 관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역〉의 체계를 가지고 점을 치는 과정을 음미해 보자. 점을 치는 이는 정성껏 괘를 뽑고, 그 괘를 통하여 자신이 놓인 사태를 해석하고, 미래의 변화와 그에 대응하는 자신의 행동방침을 결정하려 한다. 그런 첫 단계에서 일단은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는, 음과 양이라는 기본 부호로 이루어진 괘를 얻는다. 복잡다단한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가장 간단한 부호로 정형화된다.

그리고 일정한 해석의 규칙을 통하여 어떤 사태의 상징을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얻어진 자신이 얻은 64괘의 하나가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자신의 앞에 주어지게 된다. 거기는 용들이 싸워 들판에 피를 흘리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며, 절름발이가 산을 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며,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의 힘겨운 투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나타나는 상징들은 다시 자신의 사태에 맞추어 그것을 해석하는 인식 주체의 활동과 연결되게 된다. 물론 64괘를 해석하는 과정에 이미 자신이 점치고자 하는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주체의 활동이 개입되고 있지만, 일단 기본 부호들의 체계로 재구성된 괘들은 그 나름대로의 해석 규칙을 지니고 있기에, 점치는 주체의 개입은 그 틀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주역〉은 철학적 원리를 내포한 부호를 통해서 점을 치는 것이기에 그것의 해석에는 일단 자신의 상황에서 한 발짝 벗어나 그 부호체계의 의미를 통찰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관심을 적정선으로 유지하며 부호체계의 해석 법칙에 유의하며 자신의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상징을 잡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을 음미함에 의해서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타개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점을 치는 주체는 언제나 그러한 변화의 가운데 있으며, 또한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또 변화에 대응하는 자이다. 변화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내느냐, 또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큰 틀에서 보아 아주 흉한 상황이라고 파악되면 조심하고 조심하여 흉함이 적도록 노력하면서 다음의 변화를 맞아야 한다. 길하다고 하여 방종하면 오히려 흉함을 초래한다.
이것이 〈주역〉의 상징체계를 통해 얻는 일반적인 교훈이다. 이를 통해 ‘진정한’ 현실의 보다 안전하고 올바른 영위를 목표로 삼는 것은 바로 〈주역〉을 공부하는 목적이다.

결국 〈주역〉의 체계는 우리가 처한 실제의 현실 상황을 이해하고 그 변화를 예측하며, 올바로 대응하기 위한 도구이다. 〈주역〉을 통해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올바로 행위하여 올바른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주역〉을 공부하거나 점을 치는 주체의 책임이다. 다시 말하면 〈주역〉은 변화를 이해하고 대응하려는 인간 주체의 노력에 새로운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논어〉에는 “낮은 곳으로부터 배워 높은 곳에 이른다”(下學而上達)이라는 말이 있다. 〈주역〉의 점이라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미신적인 요소라 할 수도 있겠으나, 거기에는 분명 하학상달(下學上達)의 기틀이 있다. 가장 구체적인 인생의 일을 묻는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우리의 일상사에서 배우는 일이 된다.

그러나 그 결과로 얻어낸 점괘는 가장 추상적이고 높은 원리를 드러내 보인다. 그러하기에 음양이라는 가장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를 겹쳐서 만든 괘를 통해 우리의 구체적인 일을 조명해보는 행위 속에는 높은 원리와 비근한 일상사의 만남이 있다. 그렇게 높은 원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이어져 나가다 보면 태극이라는 커다란 조화의 원리로 세상을 이해하는 크고 높은 경지까지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주역〉의 점을 음미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바로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일이 될 것이다.

여기서 처음의 물음을 상기해 보자. 불교의 정신에서 주역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점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단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원리에 의해 관조할 수 있게 하는 주역의 점이라는 크게 해로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점치는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높은 원리에 해당하는 주역의 철학은 불교적 사유와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으며, 또 상보적인 측면도 있다.

근본적인 공통점은 불교와 주역이 모두 ‘변화’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며, 관계론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주역의 틀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고정 불변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요, 언제나 상황과 관계성 속에서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다. 우선은 괘라고 하는 상황이 있고, 그 속에서 각각의 효가 다른 효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의해 길흉이 결정된다. 존재 자체가 선하다든가 악한 것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음양이라는 기본 원리 또한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아니다. 음과 양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며,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생기는 끊임없는 순환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또한 양은 선이요 음은 악이라는 식으로, 어떤 존재를 선이라든가 악으로 규정하는 방식도 거부된다. 음이 음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 하면 그것이 바로 선이요, 그렇지 못하면 악이 발생한다. 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주역〉의 철학은 우리에게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인정할 것을 가르친다. 자신의 위치를 올바로 돌아보고, 그 위치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올바르게 감응하고 조화하는 것이다.

태극이라는 커다란 조화의 이상 속에서 우리들이 각각 어떤 괘, 어떤 효들을 연출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현실 속에서 조금의 여유도 찾지 못하면서 아둥바둥하던 삶을 벗어나, 커다란 이상을 향하는 존재로서의 자각 아래 굳세면서도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전기를 가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가쁘게 쉬던 호흡이 긴 호흡으로 변하면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여유, 한번은 가져봄직 하지 않은가?

   
▲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주역〉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부처님이신들 이를 배격하실까? 그렇지만 또 이렇게 〈주역〉을 이해하는 데까지 나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주역하면 점을 생각하고, 주역을 이야기하면 바로 점쳐달라고 들이대는 사람들이 태반인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며, 그 속에서 바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큰가를 절감하게 된다.

그렇기에 점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주체성을 포기하고 운명에 매달리려는 미신이 될 우려가 있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 절실한 문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원동력을 찾을 것인가? 절실한 삶의 욕구를 바탕 원동력으로 하여 높은 원리로 나갈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종교의 모습이 아닐까? 아래서 배워 위로 이르는 길을 그 틀 속에 갖추고 있는 주역, 그 속에서 우리 불교가 지향해야 할 길을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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