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 칼 융의 〈심리학적 유형〉

프로이트의 수제자였던 C.융
양극의 정신 갈등과 합일 설명
원형론·대극이론 등으로 발전
“‘나’의 존재는 규정되지 않아”
융 이론 모델과 禪불교 유사해
‘무의식’ 관념은 벗어나지 못해

▲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모습. 융은 프로이트의 성욕 중심설에 이의를 제기하여 독자적인 학설을 내세워 분석심리학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집단무의식이론이 나왔는데, 이 개념은 원형이론과 결합되어 종교심리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됐다.
칼 구스타브 융 (Carl Gustav Jung, 1875 ~1961)이 학계에 남긴 수많은 업적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인간의 무의식에는 억압된 충동뿐만 아니라 인간 행동의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원형 (archetypes)이 존재하며 이 원형들 중에 마음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일된 마음을 실현하도록 촉진하는 중핵으로서의 ‘자기원형 (Self archetype)’이 있음을 방대한 자료와 함께 증명한 데 있다.

융의 원형 이론과 개성화 (Individuation) 이론은 비록 그의 멘토였던 프로이트의 학설만큼 많은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심리학 역사상 그만큼 자주 논쟁의 주제가 되는 이론은 없었다. 융의 이론은 그만큼 독창적이었으며 그가 실제를 인식하는 방식은 당시의 세계관과 너무 달랐으므로 동료 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정신의 구조와 역동에 대한 그의 연구는 개인의 심리상태에 대한 탐구를 넘어 신화, 동서양의 종교, 연금술, 점성술, 그리고 초심리학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다방면의 연구에 선구자적인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융의 사상은 심리학과 정신과학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학, 민속학, 그리고 문학계에서도 관심있게 연구되고 있다. 융의 문체는 학자들에게는 지나치게 문학적이고 문학가들이 볼 때는 너무 학술적이다. 게다가 융이 의미하는 분석심리학의 용어들은 명쾌한 정의보다는 우리들의 삶에 깔려있는 불분명성을 대변한다. 융이 말하길, 윤곽이 뚜렷한 개념정의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개념들의 연결적인 구조를 오히려 약화시킨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융의 이론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애매한 것으로 오해받는데, 만일 독자가 융의 저작이 분명하고 명백한 기술보다는 언외의 함축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를 오해할 소지는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융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그의 초기 이론부터 단계적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다.

심리학적 유형
〈심리학적 유형 (Psychological Types)〉은 초기의 융의 이론을 대표한다. 이 책에서 융은 사람이 현상(사물, 사람, 그리고 세계)을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하는지 8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8가지란 내향형과 외향형의 “태도유형”과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이라는 정신의 “기능유형”이 어우러져 8가지의 유형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사물을 인식할 때 마음이 사용하는 특유의 방식이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감각적으로 인식하든지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또한, 경험을 구성하는 판단과정에서 감정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 또는 사고작용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융의 이론에서는 감각과 직관이 대극(對極)이고, 감정과 사고가 서로 대립된 대극의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한 기능이 발휘될 때 다른 기능은 억눌리게 된다. 융은 사람이 각 기능을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는 하지만, 태생적인 제한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 기능유형도 태도유형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융은 유형들과 이들의 조합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복잡미묘한 관계는 생략하고 ‘개성화’와 관련하는 한에서 유형론의 기본원리만 논의한다.

애초에 융은 “어떻게 내가 프로이트와 항상 다른 견해를 가지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해서 세상에 대한 견해가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경험을 결정하고 제약하는 심리학적인 유형이 달라서 그렇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심리학적 유형론은 성격을 분류하는 학문으로 이해됐으나, 최근에 학계에서는 이 이론은 개인이 어떻게 경험을 구성하고 평가하여 발전시키는가 하는 인식론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융은 개인과 세계, 주체와 객체에 대한 관계를 이 책에서 다루며 의식의 다양한 측면과 의식이 세계를 향하여 취하는 다양한 태도를 논의한다. 그뿐만 아니라 융이 이후에 완성하는 원형론, 대극 이론, 개성화 등 무의식의 내용과 기능에 대한 그의 주요 이론들의 초기 형태를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분석심리학에서는 귀중한 문헌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융은 ‘인간 정신에 내포된 두 가지 상반된 대극의 존재와 대극의 합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대조되는 성향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로 통일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통찰도 보여준다. 이러한 설명은 융의 대표적인 이론인 자기실현, 즉 개성화 이론의 기본 개념으로서 〈심리학적 유형〉에서 이미 볼 수 있다.

또한, 이 심리학적 유형론은 프로이트와 융의 조화될 수 없는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 학설이다. 1913년 제4차 국제정신분석회의에서 융은 심리학적 유형론을 발표하였는데 이때가 프로이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융은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초기의 융은 프로이트와 매우 돈독한 관계였고 심지어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1912년에 융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유아의 성욕설을 공식적으로 비판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이후 정신분석학계에서 소외된 융은 1920년 〈심리학적 유형〉이라는 책을 내놓을 때까지 8년 동안의 외로운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해 나갔다.   

융과 프로이트는 애초부터 정신세계를 보는 시각이 판이하였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욕구로 간주하여 냉철한 이성이 무의식적인 힘들을 밀어내고 자아(ego)가 힘을 쓸 수 있도록 의식의 영역을 개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간 정신을 기계적인 구조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의 심리치료는 하나의 수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융은 무의식의 자율적인 치료의 힘을 강조하며 무의식이 보내는 메시지를 의식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융은 자신을 자아 (ego)의 제왕적인 힘을 조력하는 공학기술자로 보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무의식의 세계를 파헤쳐서 문화와 시대를 초월한 인류정신의 뿌리를 발굴해내는 정신계의 고고학자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융 심리학은 마음의 한 측면이 다른 측면을 통제하거나 저지하지 않고, 다양한 마음의 힘들을 거대한 전체로 통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융이 이해했던 마음이란 기계적인 작동의 조합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심적 기능들이 서로 보완하고 보충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은 이미 자동적으로 조정하여 보상하는 힘이 내재하여 있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에너지의 흐름을 막고 있는 원인을 제거하는 기계적인 치료방법보다는 마음이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과 조화되는 행위를 해야 한다. 마음은 소외된 부분을 의식화하여 더 큰 자기 (Self)와 통합을 도모하라고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데 이들이 바로 상징들이다.  융은 상징들이란 억압된 기억의 왜곡된 잔재가 아니라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하여 반드시 달성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이 보내는 경고라고 믿었다.

우리가 수면욕구나 충분한 영양과 휴식에 대한 욕구와 같은 육체가 보내는 신호들을 계속 무시할 수 없듯이, 마음이 요구하는 신호들에도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는 없다. 만일 “마음의 다른 측면”이 계속 주목해 주기를 원하는데도 지속적으로 거부한다면, 그 외면된 부분 (shadow)은 자기(Self 또는 전체로서의 마음)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고 결국 독자적인 기능을 형성한다. 가벼운 증세에서는 이것이 꿈에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더 심각한 경우, 마음의 보상 기능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강제적으로 개입한다. 즉 명백한 이유가 없이 그 사람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든지,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정반대되는 이미지가 마음 대부분을 장악하기 시작해서 정신분열의 위험까지 있게 된다. 그래서 융 심리학의 분석가들은 내담자가 이러한 상징들이 표현하는 바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마음의 보상적인 경향을 ‘초월적 기능’이라 부르는데 개성화란 이 기능에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경구가 주는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이 기능을 ‘초월적’이라고 부른 이유는 사물을 인식하고 경험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정된 좁은 시각을 ‘초월하여’ 다른 인식방법으로 스스로 열게 하도록 촉구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초월적 기능에 더 많이 반응할 수 있다면 그는 더 다양한 유형들 사이에서 유동적이 될 것이며 그의 개성은 균형 있게 발달한다.    

융은 잠재력의 개발이 다방면의 경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융에게 있어서 잠재력의 발현은 내팽개쳐져 있었던 마음의 다른 측면들을 사용하면서 시작한다. 개성화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아 이미지와 대립된다는 이유로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당면한 상황에 (직관, 감각, 사고, 감정 중에서)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사람은 관념적인 생각에 빠져 있지도 않고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감각원리에 의해 생의 태도가 정해지지도 않고 일원론적인 직관주의에서도 벗어나서 주어진 상황에 맞게 태도유형과 기능유형을 사용하는 유연성이 있다. 이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균형 맞추는 힘에 따라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써 그는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된다. 이러한 개성화의 과정은 융 특유의 모호한 설명 덕분에 명확한 그림을 그리기는 어렵지만, 불교의 선수행과 비교해 볼 때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융과 불교
융의 종교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과 관련되어 있지만, 20세기 초 유럽 사회에 동양의 사상을 해석하고 전달한 융의 역할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동양에 대한 그의 해석을 살펴보면 언제나 그의 원형론과 개성화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록 동양사상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한 편협한 해석이라는 비판도 없진 않지만, 집단 무의식의 심리학을 통한 동양사상의 해석은 당시 서구인들에게 동양의 사상과 이미지를 자신의 사적인 경험과 관련지을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함으로써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과 인기를 촉발하였다.

〈역경〉, 〈태을금화종지〉, 〈티베트 사서〉, 〈선불교 서론〉 등 그 당시 가장 잘 알려진 동양의 서적은 언제나 융의 해석과 함께 출판되었다.  융의 동양 해석은 그의 개성화 이론이 동양의 영적인 전통과 유사하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선불교와 융의 개성화 모델을 비교하자면, 이 둘의 공통점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는 확정적일 수 없다는 견해를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성화된 사람과 선불교의 선사는 자신이 단지 주어진 상황과 주어진 시간에서만 이러 저러한 사람으로 정해질 뿐이라고 이해한다. 이처럼 심리학적 유형에서 고정적이지 않다면, 그 사람은 각각의 상황이 주는 새로움과 신선함을 더 많이 경험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고정불변의 자아에 대한 분별 망상을 내려놓고 아집을 타파해 무심의 대아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단지 주어진 상황과 시간 속에서 정형화된 자아관이 없이 강박적인 무의식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개성화되었거나 선수행을 하는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저항 없이 현재를 현재로 다룬다. 이처럼 융과 선불교의 이상은 마음이 양극단의 갈등 없이 전일한 전체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을 바탕으로 융은 불교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가 품고 있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이론으로는 선불교의 무념 무아의 경지를 이해하기에는 무리였다. 융에게 있어서 무의식이란 어느 정도까지 의식화할 수 있는 것일 뿐 끝까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그는 정신분석가로서의 위치에서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원형이 보내는 이미지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상상과 직관 그리고 과학적인 객관성이 필요하다고 융은 믿었다.

문진건/ 동국대 명상심리학과 교수
반면에 선사들은 그러한 이미지들은 깨달음을 얻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간주한다. 선사들은 원형 이미지의 해석에 마음을 쓰는 것은 문자의 해석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해석에 대한 집념은 융이 무상 무념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기 어렵게 한다는 말이다.

1958년 융과 조우한 히사마츠 신이치 선사가 말하고자 했던 바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무의식을 무의식으로 보고 그것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얽매이는 한 영원히 그 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 없는 선수행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융은 말했다. 깨달음을 이루더라도 무의식적인 번뇌는 또다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무의식을 완전히 정복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사가 되묻는다. 무엇이 무엇을 정복한다는 말인가? 융은 아마도 잠시나마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맛보았을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