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고 나타난 노인이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 예언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사진제공=경기관광공사

 원효대사 발자취 따라 경기도 사찰순례 (하)

지난호에 이어 경기도관광공사가 선정한 ‘원효성지 순례 사찰 10’ 중 신륵사 삼막사 염불사 망해암 수도사 등 5 곳을 소개한다. 경기도관광공사는 원효성지 10곳 중 5곳 이상을 방문하면 소정의 기념품을 증정하며, 추첨을 통해 연말 템플스테이 참여기회도 제공한다. 순례프로그램은 자유롭게 참여 가능하며, 사전 인터넷 신청을 통해 순례증명책자를 수령하여 각 사찰 방문 시 방문도장을 날인 받을 수 있다. 프로그램의 자세한 내용은 경기관광포털(www.ggtour.or.kr)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기관광공사는 “이번 순례프로그램으로 원효대사의 행적을 따라 유서 깊은 각 사찰의 창건설화 등을 알고, 경기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원효성지 순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경기도 관광공사는 순례를 돕기 위해 자료집 〈길 끝에 놓인 행복을 따라〉도 발간했다. 이는 원효성지 사찰 안내뿐만 아니라 원효대사 명언, 원효대사에게 묻는다 등 질의응답 형식의 글들도 수록돼 있다. 정혜숙 기자

 

신륵사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고 창건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이곳 역시 원효대사가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어느날 원효 스님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어느 연못을 가리키며 “그곳은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 말하고 사라졌다. 원효 스님은 그 꿈을 예사로 보지 않고 7일 동안 기도를 올리며 정성을 다했다. 그러자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후 이곳에 절을 지으니 그 이름이 신륵사다.

여주 8경 중 하나로 신륵사는 여주를 찾는 이들이 첫 번째로 찾는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시인들과 묵객들이 머물며 이곳의 자연을 예찬하고 탐미했다고 하니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천년 세월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삼막사

세 명의 스님이 막사 치고 수도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삼막사는 신라 때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관악산에 들어와 막사를 치고 수도하였다. 그 뒤 이곳에 원효대사가 절을 짓고 삼막사라 칭하였다.

이후 신라 말 도선 스님이 중건해 관음사라 개칭하였는데, 고려의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했다. 이후 나옹선사가 머물며 수도했고, 이후 조선 태조 때에는 왕사 무학 스님이 머물며 국운 융성을 기원해 1398년 왕명에 의해 중건되기도 했다.

삼막사에는 어느 어부의 어머니가 극진한 기도를 올려 풍랑에 휩쓸려간 아들을 구조한 놀라운 일화가 있다. 1958년, 아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널빤지에 의지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 홀연 흰 쌀밥이 담긴 놋쇠그릇이 나타났고 그것을 먹고 기운을 차려 목숨을 구했다. 이후 아들이 감사함에 삼막사를 찾았는데 바다에서 봤던 놋쇠그릇이 이곳 불전에 공양을 올리던 불기와 똑같았다고 한다.

 

망해암

미륵불 모시고 중생의 행복 기원

원효대사가 직접 이곳에 미륵불을 모시고 절을 지어 ‘망해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경기도 안양에 위치. 1407년(태종 7) 한양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을 누르기 위해 왕명으로 몇몇 사찰을 중창할 때 함께 중건하였고, 1803년(순조 3) 홍대비(洪大妃)의 시주로 중건했다고 한다. 이후 1863년(철종 14) 대련 스님이 중창하였다.

이후 6·25전쟁으로 폐사되었다가 청봉 스님이 용화전, 삼성각, 요사채 등을 재건하고 사적비를 세우는 등 사찰을 새롭게 정비했다.

망해암 용화전 안에는 높이 3m의 화강석으로 만든 미륵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세종 때 조세를 운반하는 배가 인천 월미도 부근을 지날 때 심한 풍랑으로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망연자실해 있는 선원들 앞에 갑자기 한 스님이 나타나 선원들을 진정시키고 인도하여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풍랑이 잠잠해진 뒤, 한 선원이 어디에 계시는 스님이냐고 묻자 관악산 망해암이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한양에 도착한 선원들은 은혜를 갚기 위해 망해암을 찾았으나 스님은 없고 그 용모가 아주 흡사한 부처님만이 법당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은 매년 한 섬씩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으며, 이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루가 기울어가는 저녁, 일몰과 함께 안양시 전체가 바다처럼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도사

해골물 마시고 깨달음을 이루다 

평택 수도사는 852년 염거 스님이 창건하였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했다는 동굴이 인근에 위치해 있어, 창건 전에 작은 암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중 수도사 근처 바위굴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원효대사가 밤에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어 보니 바가지에 물이 들어 있는 것 같아 시원하게 마셨다. 그러나 다음날 일어나 물을 마시던 바가지가 해골인 것을 보고는 구토를 하고 말았다. 이에 원효대사는 모든 것이 마음에 있음을 깨닫고 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이요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의 오도송을 남겼다.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 없도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후 수도사는 도적 침입, 산사태, 전쟁 등의 숱한 역사적 시련을 이기고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한국전통사찰음식체험관이 자리하고 있어 사찰음식의 묘미를 맛볼 수 있으며 원효대사 오도성지 체험관을 건립중에 있다.

 

염불사

 도반과 함께 염불하며 정진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함께 염불하던 곳이라 하여 염불사라 이른다. 경기도 안양시에 위치한 염불사는 연주암, 삼막사와 함께 관악산의 3대 사찰로 꼽힌다. 삼성산의 가파른 암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 경치가 매우 빼어나고 웅장하다. 아마도 세 대사가 위용에 탄복하고 매료되어 이곳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위태로운 암벽과 어우러진 웅장한 산들, 물 흐르는 소리, 숲 냄새 가득한 시원한 그늘 그리고 원효대사의 염불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고즈넉한 산사. 염불사에 오면 누구나 평화로움을 선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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