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불교 70년- 한국불교 70년 전개上

광복 기쁨도 잠시 美군정 집권
친기독교 정책에 불교는 ‘찬밥’

봉암사·고불총림 결사 등
변화 위한 자생적 움직임 전개

이승만 담화에 촉발된 정화 운동
비구·대처 양분돼 지난한 갈등
결국 통합종단 출범하며 마무리

권력 개입에 불교는 민족종교로서
사회적 지위 잃고 부정 이미지 각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고 불교 또한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고 민족종교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조국 광복과 독립국가의 탄생이라는 장미 빛 희망으로 가득 차있던 1945년 9월에 불교계는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조선불교 혁신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교단의 향후 방향성과 노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 결과 사찰령과 같은 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선언하고 중앙교단기구의 설립 및 교헌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때 제기된 교헌의 핵심 내용은 교도제 시행과 사찰 재산의 통일, 수행정신의 선양과 비구승단 보호로 요약할 수 있다.

해방공간에서의 불교
총독부를 대신한 미군정청은 근대국가의 기본원칙인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신교와 천주교만 공인 종교로 지정하는 기독교 중심의 편향적 공인교 정책이 시행되었다. 또한 1945년 11월 2일 군정 법령 제21호에서 아직 폐기되지 않은 구법령은 존속한다고 하여, 본사 주지의 인사권과 사찰의 재산 처분권을 조선 총독이 행사한 사찰령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당시 조선불교 중앙 총무원과 교무회는 미군정에 사찰령의 폐지를 계속 요구하였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한편 1946년에는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선포되었는데, 이는 종교 자유 및 정교분리의 원칙, 그리고 한국이 기독교 문명권에 속해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조치였다. 석가탄신일이 1975년에야 공휴일로 지정된 것과 비교하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특혜임에 분명하였다.

미군정은 개신교, 천주교 인사들을 대거 군정청에 임용하였고 일제가 남긴 귀속재산, 즉 적산으로 분류된 일본불교 각 종파의 사찰과 소속 재산도 한국불교 사찰에 그대로 양도되지 않았다. 미군정은 사찰령의 존속과 사찰재산 임시보호법의 시행을 일본불교 재산의 귀속 문제와 연계하여 고려하였고 사찰령에 의해 사찰 재산 처분권을 행사하였는데, 한국에 있던 일본불교 사찰과 그 재산이 교회로 넘어간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밖에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1932년 장충단 공원의 부지 일부를 양도받아 건립된 박문사의 경우 해방 후 불교계 혜화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쓰이다가 1947년 과도입법의원회의 결정에 의해 장충단 지역의 관유지로 귀속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평성을 잃은 종교정책이 시행된 결과 해방 직후까지 세력이 미약했던 기독교는 미군정 하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고 이승만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기독교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더욱이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특히 개신교와 선교사들에게 파격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1954년 서울신문의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 정화 희망 기사.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촉발된 정화운동은 민족불교 복원이라는 성과가 있었지만, 적지 않은 부작용도 가져왔다.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불교는 근현대의 틈바구니에서 갈길을 잃고 방황했다. 사진=〈한국불교 100년(민족사 간행)〉
결사와 정화, 변화의 움직임
이러한 상황임에도 본사 주지 등 불교계 주도세력은 대처승 중심의 교단 권력을 유지하고 반대파인 혁신세력의 일소를 위해 이승만 정권 초기에는 정부에 우호적으로 협력하였다. 불교계의 최대 현안이었던 사찰령 구제의 철폐, 적산사찰 귀속 문제 등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고 기독교 편향정책에 대한 불만도 자제하였다.

해방 이후 교단 내부에서는 식민지 잔재의 척결과 불교 개혁을 주장한 혁신세력과 본사 주지 등 보수적 기득권 세력이 서로 대립하였는데, 재정투명화, 사회평등 등의 구호를 내세운 혁신세력이 좌익으로 치부되면서 교단 개혁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친기독교 정책과 반공주의는 불교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미쳤고, 해방 공간에서 이루어졌어야 할 친일불교 청산과 자주적 종단 건설의 꿈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한편 해방 이후의 혼란한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불교계에서 일어난 자생적 움직임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 비구 수행승들이 주도한 결사운동을 들 수 있다. 청담(1902~1971)스님과 성철(1912~1993)스님 등이 1947년에 일으킨 봉암사 결사가 대표적인데, 이는 교법과 계율에 근거한 선 수행 실천을 목표로 하였고 자주, 자생, 자립을 모토로 하였다. 비록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지만 수행 및 계율 전통의 회복과 승려 노동을 포함한 교단의 자립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봉암사 결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와 함께 백양사 만암(1876~1956)스님이 1947년에 결성한 고불총림도 독자적 불교 정화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만암스님은 당시 불교계가 분열되어 있고 선의 종맥 계승의식이 부재함을 지적하면서 식민지 불교체제에 안주하여 정화에 미흡하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계율 수지와 출가 전통 회복을 통한 교단 재정비를 추진하였는데, 대처승이 교단을 주도하고 있던 현실을 인정해 비구=정법, 대처=호법으로 구분한 통합종단의 형태를 추구하였다.

또한 삼보사찰인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청정수행비구들이 운영하고 향후 점진적, 단계적으로 정화를 이루자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고불총림 청규에는 승려 자격, 일상생활 및 수행, 의무와 상벌, 재산관리 등이 규정되었다. 고불총림은 처음에 백양사를 중심으로 22개 사찰에서 시작하여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갔는데, 이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동력을 잃게 되었다.

1949년 6월에는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1950년 3월에 그 시행령이 발효됨에 따라 자경농의 농지 소유를 원칙으로 한 유상매수와 유상분배가 이루어졌다.

당시 종단의 교정이었던 만암 스님은 수행승들의 생활고와 수행 공간 부족 등 문제가 심각해지자 1954년 4월 비구승들에게 전통사찰 18개를 내준다는 방침을 정하였지만 대처 주지들의 반대로 인해 시행되지 못했다. 이즈음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지지 담화가 발표되었다. 즉 1954년 5월 사찰 내에서 대처승을 축출하라는 대통령 유시가 내려졌고 이후 1962년 4월까지 8년에 걸쳐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이승만은 “일본인 중의 생활을 모범으로 해서 우리나라 불도에 위반되게 행한 자는 이후부터 친일자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으니, 가정을 가지고 사는 중들은 다 사찰에서 나가서 살 것이며 우리 불도를 숭상하는 중들만을 정부에서 도로 내주는 전답을 개척하여 지지해 가게 할 것이니 이를 시행하기를 지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정화운동이 시작되자 불교계는 종권과 사찰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처와 비구 사이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큰 내홍을 겪게 되었다. 1954년 8월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 비구승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사장을 올리자는 안건을 채택하였고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에서 비구승이 교단운영을 주도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 사찰의 운영권을 가지고 있던 대처 측의 반발이 극심하였지만 정부 시책에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하였다.

대신 비구승들을 수행승, 자신들을 교화승으로 이원화하여 비구승에게 일부 수행사찰을 양도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즉 표면적으로는 정화에 찬성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승려자격을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승려대회를 통해 종권이 비구 측에 넘어가게 되자 이들은 교단과 사찰을 빼앗겼다고 하여 법적 소송을 벌여나갔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일어난 불교정화는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라는 정치적 명분과 비구승 중심의 수행 및 계율 전통 회복이라는 불교적 가치를 표면에 내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독교 우위 정책에 입각하여 정치적 반대파가 된 불교계 실세 대처 주지들을 제거하고 정권 연장을 도모하려는 정략적 판단이 개입되었다.

1960년 11월 19일 제2회 전국승려대회 이후 진행된 비구스님의 시위대열.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촉발된 정화운동은 민족불교 복원이라는 성과가 있었지만, 적지 않은 부작용도 가져왔다.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불교는 근현대의 틈바구니에서 갈길을 잃고 방황했다. 사진=〈한국불교 100년(민족사 간행)〉
통합종단의 출발, 그러나…
1960년에는 4.19 민주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였고 이에 대처 측은 비구승 측을 관제 불교단체로 규정하고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사찰령 구제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당시 대처 측의 사찰 재진입과 함께 법정에서의 운영권 승소 사례가 빈번해졌고, 이에 대한 비구 승려의 할복 기도와 법원 난입 사건 등이 터지면서 사회문제로 크게 비화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는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정권은 비구 측과 대처 측 어느 쪽도 한국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사찰령에 의해 의법 조치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단일한 종을 만들어 자율적으로 불교를 재건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비구와 대처 양측이 참여하여 분교 해소와 단합 및 자율을 내세운 불교재건위원회 재건비상종회를 열게 되었다.

그 결과 1962년 4월에 통합종단 대한불교 조계종이 성립되었다. 대처 측에서는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정통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법원에서 통합종단의 근거를 공인하였고 결국 승려 자격에 대한 양자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1962년 5월에는 사찰령을 계승한 불교재산관리법이 통과되고 그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재산 관리 뿐 아니라 불교 단체 등록 및 운영을 국가에서 관리, 감독하게 되었다. 당시 조계종단은 종권 및 사찰관리권, 종단의 정체성을 정부 법령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이 법에 적극 찬성하였다. 하지만 이는 국가에서 불교를 관리, 통제하는 사찰령 체제의 연장선이었고 교단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후 1970년에는 대처 측이 별도로 태고종을 설립하여 통합종단에서 탈퇴하였고, 양측의 대립과 분쟁은 공식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불교정화는 식민지 불교체제에서 형성된 대처승과 본사 주지의 전횡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대개 대처승들이 본사 주지를 맡고 교단을 주도하면서 불교가 세속화되고 교단 상층부의 부패와 타락이 발생하였으며 반대로 비구 수행승들은 배척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 이후 불교는 사회와 민족에 기여하는 대중불교, 민족불교로 거듭나야 했지만 식민지 잔재의 지속과 수행 및 계율 전통의 위축이라는 현실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정화는 시대의 필연적인 과제였지만, 교단의 주체적 자정 능력 부재와 정치권력에 의한 행정권, 사법권의 개입이라는 구조적 문제점을 동시에 떠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체 승려의 10%도 안 되는 비구승들이 처음으로 사찰 및 교단 운영을 전담하게 되면서 수많은 현실적 문제가 발생하였고, 불교에 대한 기본 이해도 없는 이들이 대체인력으로 갑자기 승려가 되는 등 인적 수준의 급격한 저하가 일어났다. 수행비구가 조계종을 주도하면서 선종 전통의 우위성은 확고해졌지만, 교학, 의례, 문화 등 다양한 불교전통이 단절되고 축소되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했다.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또한 정화과정에서 일어난 분규와 폭력은 불교의 사회적 이미지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사찰을 운영하던 대처승들이 밀려나면서 학교, 사업체를 비롯한 상당수의 사찰 재산을 빼돌렸고 서적, 문화재 등을 반출하여 경제적, 문화적 손실 또한 매우 컸다.

이처럼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불교는 격랑의 세월을 겼으면서 많은 파동과 부침을 거듭하였다. 비구와 대처의 대립, 승려의 본분과 현실 권력의 긴장관계, 전통과 근대의 이중주는 갈등과 모순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해소되어 가는 과정도 주체적, 자율적이 아닌 국가권력에 의한 타율적 조정과 교단 내의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전통종교, 민족종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사회적 권위를 상실하였고 위상 또한 크게 추락하였다. 정화의 이면에는 권력과 재부를 둘러싼 다툼과 폭력, 인적 수준의 저하 등이 도사리고 있었고 비폭력과 청정함을 내세워야 할 불교는 상당 기간 그 반대의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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