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24회- 고구려의 불탑
고구려불탑 현존하는 것 없어
요동성육왕탑지에 세운 목탑 시초
대부분 목탑, 8각 다층이 주류
‘8각’은 신앙적 의미 내포한 양식
부처님 8대 성지 8각으로 표현
8각탑 평양에 집중적으로 조성
정릉사탑지 8각5층, 높이 40m 추정
지난 호까지는 인도에서 시작된 불탑의 조성이 불법홍포와 함께 주변의 여러 나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우리나라 불탑 조성의 전개와 불탑신앙의 변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삼국 중 제일 먼저 불교를 수용하였던 고구려의 불탑은 현재 원형으로 전해지는 것이 단 한기도 없다. 단지 문헌상의 기록으로 고구려인들의 불탑 조성과 신앙을 간접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불탑 관련 역사에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아쇼카왕’과 관련된 내용이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편’의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삼보감통록>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 주변에 있는 탑은 옛 어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 고구려 성왕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스님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스님은 없어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곁에는 3층으로 된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서 스님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만 무성할 따름이었다. 그곳을 파서 보았더니 한 길쯤 되는 곳에서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계속 파보니 명문(銘文)이 나왔는데, 명문 위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한 신하가 그 글을 알아보고 불탑이라고 말했다. 왕이 자세히 묻자 신하가 말하기를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이라 합니다. 성왕은 이로 인하여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이내 7층의 목탑을 세웠으며, 그 뒤 비로소 불법이 전해 오자 그 사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이를 줄이다가 본 탑이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이 통일했다는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이할 것이 없다… (하략).
라는 기록이다. 요약하자면, 한나라 때 요동성 근처에 인도의 아쇼카왕이 토탑을 조성하였다. 그 자리에 고구려 성왕이 7층목탑을 세웠는데, 지금은 썩어 무너졌다는 내용이다.
이 삼국유사의 내용에서 주목할 점은 ‘성왕’은 누구이고, ‘포도’란 무엇인가? 아쇼카왕은 왜 요동성 옆에다 탑을 세웠는가? 탑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라는 의문점 들이다.
성왕이라 표현된 주인공의 정체에 대하여,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스님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아닌 것 같다고 본문에서 밝히셨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 ‘광개토태왕’일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다음은 ‘포도’라는 용어의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포도는 불탑을 의미하는 여러 용어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연 스님은 주석을 달아 원래는 휴도왕(休屠王)인데 그것을 포도왕(蒲圖王)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다소 혼란이 생긴다. 즉, 앞의 문장에서는 불탑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포도왕이라고 이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탑을 ‘포도왕’이라고 표현한 예는<삼국유사>이외에는 다른 한역 경전이나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용어이다. 이 점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서두에 기록된 “<삼보감통록>에 실려 있다!” 라는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보감통록>이란 것은 <집신주삼보감통록>을 지칭하는 것으로 664년에 당(唐)의 학승 도선(道宣)이 지은 것이며,<삼국유사>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내용과 다른 점은 ‘彼名蒲圖, 王因生信(피명포도, 왕인생신)’이라 하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름은 포도라 하고, 그로 인하여 왕은 믿음이 생겼다’라는 내용만 전하고 있으며, 별도의 주석이 없다.
또한 <집신주삼보감통록>과 거의 같은 시기인 668년에 당나라 도세(道世)가 편찬한 불교백과사전인<법원주림> ‘경탑편’에도 <집신주삼보감통록>과 일치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일연 스님은 무슨 연유로 특별히 각주를 달고 ‘포도왕’은 ‘휴도왕’을 말한다고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용된 원전에는 그런 각주가 없다는 사실이다. 단지 고구려에서는 불탑을 포도(蒲圖)라고 표현한 예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불탑의 특징은 대부분이 나무를 주요 재료로 한 ‘목탑’이라는 점과 ‘8각 다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평양에 있는 상오리사지의 목탑은 기단은 8각이지만 탑신은 4각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을 제외한 정릉사탑, 금강사탑, 영탑사탑 등은 모두가 기단과 탑신이 8각을 이루고 있다. 목조불탑을 8각으로 조성하였다는 것은 몇 가지 신앙적 의미가 있다.
4각 보다 8각을 택하였다는 것은 목조건축의 구조상 설계뿐만 아니라 축조과정과 재정면에서도 복잡하고 곤란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결코 강한 종교적 신념이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처님의 8대 성지를 직접 참배할 수 없었던 고구려 불자들은 깊은 신심의 표현을 8각의 불탑조성으로 대신 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8각임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웅장한 것은 고구려인들의 불심과 기상이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들어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8각 탑들은 평양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는데, 정릉사는 현재까지 밝혀진 고구려 사찰 가운데 가장 크고 웅장하다.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의 용산리 동명왕릉 남쪽 약 150m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하며, 북한 학자들에 의하면 사찰의 넓이가 경주 황룡사의 두 배가 넘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절이었다. 1974년부터 대규모로 발굴하여 일부 복원을 하였다. 발굴 결과 전형적인 1탑3금당식의 고구려 사지임을 확인 하였다. 특히 중앙의 탑지는 추정결과 2중 기단의 ‘8각5층목탑’으로 높이가 약 40m에 달한 것으로 짐작된다. 사찰 중심에 8층목탑을 배치한 것은 불교신앙의 의례가 불탑신앙을 근본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 복원된 정릉사에서는 중앙의 ‘8각5층목탑’ 대신에 소규모의 ‘8각7층석탑’<사진3-1,3-2>으로 대신하여 복원인지 창조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알아 본 것 외에도 고구려의 불탑은 상오리사지, 토성리사지 등 목탑지가 발굴 된 바 있다. 이것을 표로 정리하여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 호에는 백제의 불탑 조성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사진 출처
사진1. 리화선, 조선건축사, 도서출판발언, p.61 발췌
사진2. 리화선, 조선건축사, 도서출판발언, p.141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