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下

▲ 진관사 대웅전. 문신 이승소는 문집〈삼탄집〉에서 진관사와 관련한 시를 썼다.
사가독서의 장소였던 사찰

“세종(世宗)이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문학(文學)하는 선비들을 모아 놓고, 아침저녁으로 맞아서 자문하였다. 그러고도 오히려 문학이 진작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중에서 젊고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절에 가서 글을 읽게 하였으며, 공궤(供饋)를 매우 풍족하게 해 주었다. 정통(正統) 임술년(1442, 세종24)에 평양(平陽) 박인수(朴仁?), 고령(高靈) 신범옹(申泛翁), 한산(韓山) 이청보(李淸甫), 창녕(昌寧) 성근보(成謹甫), 적촌(赤村) 하중장(河仲章), 연안(延安) 이백옥(李伯玉)이 명을 받고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공부를 무척 부지런히 하였고, 시(詩)를 주고받는 것도 쉬지 않았다. 그 당시에 승려 일암(一菴)이 항상 수행하면서 그 글들을 등사하여 전하였다.”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齋叢話)〉의 한 대목이다. 진관사는 국가적인 수륙재가 열리는 도량이고 삼각산 서북쪽에 위치하여 한양과 가까웠으므로 선비들의 방문도 잦았을 것이다. 거기에 세종이 유능한 젊은 선비들에게 휴가를 주어 진관사에서 글을 읽게 했으니, 절은 당대 지식인들의 집합소 역할을 했다.

세종 때 시행된 이 특별휴가 제도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젊은 선비가 사가독서 명단에 오르는 것은 상당한 광명이자 일종의 권위이기도 했다. 임금이 실력을 인정하여 특별히 휴가를 주어 학문에 더 집중하도록 했으니 ‘가문의 영광’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한 사가독서의 장소로 진관사 등 사찰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절 선비들에게 절은 종교적 공간이 아니라 조용하고 깨끗하여 공부하기에 좋은 수련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스님들은 선비들과 지식을 교류하기도 했고 그들을 보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용재총화〉에 나오는 선비들이 지은 글들을 모은 책이 〈육선생유고〉로 편찬되어 전해지고 있다.

 

세종 때의 문신 이승소(李承召 1422 ~1484)의 경우도 진관사 스님들과 교유가 깊었던지 그의 문집 〈삼탄집(三灘集)〉에는 진관사 관련 시구가 몇 편 수록돼 있다. ‘진관사의 주지 명신이 부채를 보내주다(津寬寺住持明信惠扇)’라는 시를 보자.

 

증종선원청시명(曾從禪苑聽詩名)

환선금장기후정(紈扇今將寄厚情)

막아론교위양지(莫訝論交違兩地)

수지결업재삼생(須知結業在三生)

한한최선운림와(閑閑最羨雲林臥)

역역다참세망영(役役多慙世網?)

방장기시문연어(方丈幾時聞軟語)

차조계수탁진영(借曹溪水濯塵纓)

 

내 일찍이 선원에서 시의 명성 들었는데

깁부채를 보내어서 후한 정을 보이었네.

논교하니 떨어져서 있는 것을 걱정 말고

업 맺음이 삼생에 다 있다는 걸 부디 아소.

한가로이 운림 속에 누운 게 젤 부럽거니

애 쓰면서 세상 그물 걸려 몹시 부끄럽네.

방장실서 어느 때나 나긋한 말 듣고 나서

조계의 물 빌려 나의 티끌 갓끈 씻으려나.

 

고단한 일상, 떠나고 싶은 마음

시에는 부채를 보내 준데 대한 감사 이상의 마음이 표현되고 있다. ‘한가로이 운림 속에 누운 것이 제일 부럽다’는 것은 벼슬살이에 바쁜 자신의 일상에 대한 반조이다.

그래서 미련에서 스님에게서 좋은 말씀을 듣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이 이 시의 핵심이다.

‘조계의 물’은 절 주변에 흐르는 계곡물을 뜻하는데, 양나라 지약(智藥) 선사가 광동성 남쪽에 흐르는 시내의 물맛을 보고 그 상류를 찾아 보림사를 세운 것에서 연유한 말이다. 이승소는 진관사의 맑은 물에 티끌 많은 자신의 갓끈을 씻고 싶다는 의중을 드러내며 시를 맺고 있다. 갓끈을 씻는다는 말은 한시에서 자주 인용되는 은유다. 벼슬을 떠나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혹은 자연으로 돌아가 은둔의 삶을 지향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낙일정정백첩요(落日亭亭白堞遙)

청류상억석남교(淸流尙憶石南橋)

명하취백다하상(明霞翠柏多遐想)

일곡산가답만초(一曲山歌答晩樵)

 

아슬한 저 성가퀴에 해는 이울고

맑은 물은 상기도 석남교가 기억나오.

명하라 취백이라 속(俗)을 떠날 생각 많아

한 가락 산 노래로 나무꾼과 수답하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서교(西郊)의 진관사(津寬寺)를 지나면서’라는 시다. 그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1권에 실려 있다. 제목 그대로 해가 질 무렵 진관사 근처를 지나며 쓴 시다. 시인의 의중은 세 번째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명하는 밝은 노을을 말하고 취백은 푸른 잣이란 말인데, 이는 도가(道家)에서 먹는 장생불사의 약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덕무는 진관사 근처를 지나면서 자신도 고달픈 벼슬살이를 버리고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 것이다. 그런 심사이기에 ‘한 가락 산 노래’를 읊으며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되고 나무꾼과 수답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꾼과 수답한다’는 것은 ‘선비’ ‘사대부’ 등으로 표현되는 신분의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나무꾼과도 인간 대 인간으로 평등하게 대화를 한다는 것이니, 차별의 세상에서 무차별의 세상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조계의 물 빌려 나의 티끌 갓끈 씻으려나’하는 이승소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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